비밀일기 - 절망의 수용소에서 쓴 웃음과 희망의 일기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윤소영 옮김 / 막내집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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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비밀일기>를 읽는 내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중첩되는 경험을 한 것은 나뿐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귀도'와 우리의 일기 주인은 얼마나 닮은 점이 많은지......  '귀도'에게 '죠슈아'가 수용소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듯이 '조반니노'에게도 '알베르티노'와 '카를로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삶을 이어나갈 힘이 되었던 것이다. 두 주인공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비참한 수용소 생활을 버티면서도 늘 희망과 웃음을 보인다. 차라리 슬픈 그들의 웃음이 이 책과 영화에 가득하지만, 그저 맘 놓고 웃을 수도 없는 것은 그들이 겪어 낸 그 시간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그저 일기인 이 책은 우리에게 독일의 만행과 그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세계 정세의 흐름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과레스키가 왜 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지 조차도 주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의 흐름이 매끄럽다든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유머 넘치는 삽화와 수요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해학과 풍자는 읽는 이들에게 웃음과 함께 아픔을 전달한다. 아들과 딸이 꿈에 찾아 온 이야기에서 가족에 대한 그림움이 진하게 느껴지고, 감자를 나누어 먹는 포로들의 모습에서 어떻게든 공평하게 삶을 이어가려는 그들의 고뇌와 노력이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그 곳에 갇힌 그들은 '단테'를 강독하고 법학 토론을 할 정도로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으나, 한 줌의 빵과 담배를 위해서 기꺼이 책을 내 놓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 부서져 엉망이 된 소포를 끌러서 쌀과 밀가루를 구분하려 하고, 비누와 버터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들의 수용소 생활 장면은 영화의 장면을 바탕으로 다시 살아나 웃고 떠들었을 농담조차도, 혹은 과레스키가 아주 맑은 날이라고 표현 날, 더운 날이라고 표현한 날들이 있었음에도 오로지 춥고 비가 오는 더러운 곳에서 노동에 찌들어 지친 이들의 장면만 상상이 되었다.

 일기의 내용은 수용소 생활 중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수용소의 더러운 마당에 괸 작은 물웅덩이에서 바다를 보기도 하고, 독일인이되 착한 독일인인 장교에 대한 안쓰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도 자기의 현실에 대한 해학을 잊지 않고,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풍자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오로지 과레스키의 마음 속의 일들과 혹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거대하거나 한없이 사소한 사건들로 점철된 이 일기는 어쩌면 그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거나, 어쩌면 잠시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의 삶조차 지루한 것이니, 그의 처지에서 그의 눈으로 우리도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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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이들 1 - 숨어사는 아이들 봄나무 문학선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지음, 이혜선 옮김 / 봄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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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자주 나오던 노래가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였다. "기도하는~~" 하면, 화답이라도 하듯이 "꺄악!!!!" 하던 그 소리들이 기억난다. 그 때 유행하던 이야기들 중에 '창 밖의 여자' 보자 더 불쌍한 여자는 '창틀에 끼인 여자'라는 농담이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것은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이 책 <그림자 아이들>의 책 소개를 보는 순간 들었던 생각이다.

  주인공 루크(이름조차 얼마나 의미 심장한가 말이다.)는 셋째 이다. 자식을 둘만 낳도록 규정한 독재자의 결정에 셋째아이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이다. 열한 살의 나이가 되도록 다른 사람들은 만나보지 못한 루크. 루크의 친척들조차 루크의 존재를 모른다. 루크의 형들은 집안일을 돕고 학교에 다니지만, 루크는 늘 집안에만 있다. 집근처에 숲이 있을 때만해도 뒷마당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울 수 있었고, 형들과 공놀이도 할 수 있었지만, 숲이 사라진 후로는 아예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있게 되었다. 혹시 창 밖의 누군가가 그림자라도 볼까봐 이젠 식사조차도 식탁에서 함께 하지 못한다. 다락방에서 읽었던 책들만 다시 또 읽고,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린던 루크는 어느 날 다락방의 환기구 밖으로 밖을 내다보게 된다. 숲이 있던 그 자리에는 여러 책의 큰 집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인부들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큰 차들이 땅을 울렸다. 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본 적이 없는 루크는 신가했다. 집들이 다 지어지고 사람들이 입주한 후에도 루크는 늘 밖을 내다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집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들 둘 혹은 하나의 아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분명히 아들이 둘인 스포츠 가족의 집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기척을 발견한 것이다. 루크는 그 누군가가 셋째 아이라고 확신했다. 밖에 나가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루크의 두려움이 호기심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만난 아이 젠은 루크와 너무도 달랐다. 돈 많은 배런의 셋째 아이인 젠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었던 루크와 달리 젠은 인터넷을 통해서 또다른 셋째 아이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젠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루크는 자신의 처지를 알게되고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많은 것을 버리고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한 루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은 어떤 것일까?

  내가 속한 무리에서 조금만 나를 원하지 않는 듯 보여도 왈칵 서러운 생각이 드는 게 사람이다. 청소년들이 또래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싸우고 따돌리는 것들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만 보아도 인간이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동물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니, 부모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 주인공이 갖는 장체성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의 존재가 다른 가족들의 기쁨이 아니라,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내가 숨쉬는 일 자체가 나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에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좌절하고 상심할 것이 틀림없다. 대체로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스스로 망치려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루크는 바르고 건강한 사고를 한다. 이런 문제들의 원인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아서 또 다른 수많은 자신들을 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마도 루크가 자기자신에 대한 이런 믿음과 힘을 갖게 된 것은 가족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루크를 키우는 동안 어머니가 보여준 한없는 사랑이 자신의 존재가 한낱 물거품이 아니라 든든한 뿌리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루크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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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걷기여행 - On Foot Guides 걷기여행 시리즈
프랭크 쿠즈니크 지음, 정현진 옮김 / 터치아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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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꼭 해보아야할 일들에 대한 미련과 희망을 사람들은 늘 가지고 있나보다. '죽기 전에 꼭......" 운운하는 각종 책들이 등장할 때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 진다. 죽기 전에 꼭 보아야할 아름다운 장면은 무엇일까? 죽기 전에 꼭 먹어보아야 할 만큼 맛있는 음식은 또 무엇이며, 죽기 전에 꼭 해보아야할 스포츠는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할 곳은 어디일까?" 하는 질문이 가장 많았나 보다. 언젠가부터 다른 어떤 종류의 책보다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분야의 책이 여행서가 되었다. 정말로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작가들이 그야말로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들을 때로는 화려한 사진과 짧은 글들로, 또 때로는 단 한 장의 사진조차 없이 오로지 텍스트로만 전하고 있다.

  여행에대한 로망만 있을 뿐 실천력이 전혀 없는 나는 이런 종류의 책들을 퍽 많이 읽었다. 그러니 전 세계 어느 곳이든 나의 관심이 머물지 않은 곳은 없다. 유럽이고, 동남 아시아고, 미국이고, 남아메리카고 간에 말이다. 나는 소금 사막에서 맨발로 걸어도 보았으며, 뉴욕을 걸으면서 샅샅이 탐험하기도 했고(물론 쇼핑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잘 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사륜 구동으로 건너기도 했으며, 뉴질랜드에서는 캠핑카로 즐기는 법을 알고 있다. 또 아이슬란드에서 대중교통이용하기라든가, 런던에서 눈치있게 살아내기도 할 줄 안다. 간접체험을 통해서도 마치 그 곳에 가본 듯 읊조릴 수 있으니 책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말이다.

  그러나, 프라하만큼은 영원한 나의 로망이 될 것이다. 머지 않은 시기에 곧 가게될 그 곳 프라하에서의 알차고 멋진 시간을 위해서 나는 미리 다녀왔다. 결코 좁지는 않은 도시 프라하.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고 먹을 것조차 많은 그 곳을 백배 즐기기 위해서 우선 가볍게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깊이 들어가기엔 조금 부담스러우니 수박 겉핥기라도 먼저 맛을 보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국립 박물관으로 하기로 했다. 국립 박물관의 내부 전시물은 의외로 빈약하다 하니 오늘은 박물관의 건축미만 즐기기로 하자. 신르네상스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인 박물관의 수많은 조각상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박물관을 등지고 선다. 바로 앞에 보이는 광장이 바츨라프 광장이다. 프라하에서의 역사적 사건에 꼭 등장하는 그 광장은 아름다운 꽃과 사람과 호객꾼과 소매치기와 노점상들로 가득하다. 멋진 건축물들의 아름다운 자태가 광고판에 가려져 아쉽지만, 광장중앙을 가로질러서 프라하 시민회관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쪽 거리를 따라간다. 체코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프라하 시민화관은 크림색의 벽과 푸른 색의 지붕이 근사하다. 구시가 광장에서 천문시계의 신기한 모습을 감상하고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관광객들의 관심거리 카를교로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틈에서 다리의 조각품을 제대로 보기는 힘들다. 공연과 그림을 감상하고 사람들을 본다. 카를교를 건너면 프라하의 작은 구역 말라 스트라나를 만난다. 말라 스트라나에서 프라하 성까지 거리를 구경하면서 전진한다. 프라하성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제 카프카를 찾아서 황금 소로를 누빈다. 22번지의 푸른집에서 카프카의 숨결을 찾아보고 비현실 세계로 가는 문인 '마지막 랜턴 빛의 집'을 상상해 본다.

  광장의 바닥과 계단의 바닥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이 책 <프라하 걷기 여행>을 보면서 나는 프라하를 마치 내가 사는 도시인양 가깝게 느꼈다.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곳곳에 가득한 유서 깊고 아름다운 건물과 기념물들 때문에 이 곳 프라하는 걷기엔 더할 나위없는 도시라고 한다. 길의 바닥에 깔린 작은 돌들이 너무도 낭만적이다. 이런 길을 걷는 상상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하나하나 유서깊은 건물들과 장소, 조형미가 완벽한 광장의 기념물들과 우아한 벤치들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들뜨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저 프라하를 걷게하는 안내서일 뿐인데 이렇게 실감이 나다니 정말 잘 만들어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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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평원의 개미들 - 제2회 문학동네 청소년장편소설 공모 대상 수상작
오송이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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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모래 평원은 어디일까?

 

  한 소년이 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고, 친구는 연인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언젠가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소년은 친구의 곁에서 함께 기다린다. 소년은 친구의 연인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소년은 친구를 떠나지 못한다. 그 친구는 친구일 수도, 형제일 수도, 혹은 소년 자신일 수도 있다. 친구의 몸은 점점 가려움증이 심해지고, 곧 다가올 모래 폭풍의 예감에 소년은 두려워진다. 소년은 끊임없이 친구에게 떠날 것을 간청하지만, 친구는 이제 집으로 가는 길조차 잃었다고 말한다. 그 모래 평원으로 집배원이 오고, 세금 징수원이 오고 강도가 온다. 경찰은 시름에 잠겨 한없이 먼 지평선을 향하여 떠났으며, 임산부는 시막 한 가운데서 비명을 지르며 죽은 아이를 낳는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사막은 있다. 그 황량한 곳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키우고 고독에 물을 준다. 그리고 세상의 거친 비바람에 시달릴 때 그 곳으로 돌아가 조용히 뜨거운 태양 아래의 모래에서 젖은 심장을 말린다. 어쩌면 소년의 모래평원은 소년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곳에서 소년은 외롭고 힘든 날들을 보내면서 탐욕에 눈을 뜨고 거짓말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미지의 그녀를 기다리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모래 평원이 상징하는 것은 소년의 앞에 남아있는 이 거친 세상일 것이다. 그 곳에서 소년은 친구를 배우고 사랑을 알고 이별의 상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생의 질김을 깨달을 것이다. 또, 인생의 황혼인 사람이나 배가 부른 여자나, 혹은 짐을 들고 다니는 험한 사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소년은 유랑민들이 가르쳐 준 그 별자리를 볼 것이다. 별자리를 따라가면 쭉 뻗은 건조하고 뜨거운 철길과는 다른 곳으로 소년을 데려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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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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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을 집었을 때, 얄팍한 두께에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대체로 요 정도 두께와 너비를 지닌 책은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서 한 나절이면 충분했으니 말이다. 옮긴이의 말까지 포함해서 315쪽이다. 좀 작은 글씨와 빽빽한 편집이긴 했으나, 그 정도야 내공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4개의 단편이라기엔 어딘지 넘치고 중편이라기에는 살짝 아쉬운 작품들을 막상 읽기 시작했을 때, 그 자신만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랜만에 겸손 가득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집의 부제를 '네 편의 긴 단편들'이라고 정했다. 그 부제의 의미는 단순히 작품의 길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네 명의 주인공들과 그들 전체를 아우르는 화자가 만들어내는 이 이야기들은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을 더 길게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소설의 정의가 무색하게도 이 작품은 소설같지 않다. 작품에는 수십 장의 흑백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사진들은 소설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삶의 궤적 역시 작가의 삶의 궤적과 많은 부분에서 만나고 있다. 작가는 "나는 일체의 값싼 허구화의 형태들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나의 매체는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옮긴이의 말 312쪽)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두 문장의 말이 이 작품의 특징을 결정짓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소설들 역시 1인칭 시점을 택하는 경우 독자들은 소설이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종종 다큐인지 드라마인지 헷갈리고, 그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소설에 대해서 갖고 있던 편견의 일부를 인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네 편의 소설들에는 각각의 주인공들이 있다. 그들은 의사이고, 화가이고, 교사이고 신사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이다. 그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떠나야했고, 그것은 그들의 평생의 삶을 지배한다. 아름다운 어린시절과 참혹한 청년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 한없이 아름답게 채색된 그 마을을 빼앗김으로써 그들은 영원히 떠도는 마음의 이민자가 되어 버린다. 그들 중에는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영원히 독일땅을 밟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세상과 마음을 열고 통섭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유리시켜 방황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요즘의 우리를 발견한다면 과장일까? 흔히들 요즘을 고향을 잃어버린 세상이라고 말한다. 우리 또래들 중에도 어린 시절 참외 서리하던 고향의 기억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도시 출신인 나는 그런 아련한 기억은 없다. 그래도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함께 골목을 뛰놀던 친구의 기억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지금은 그 마을엔 골목도 없고 그들도 이미 없다. 내가 태어난 집은 병원이라면서 웃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 세대는 다들 마음 둘 데를 잃은 이민자들이 되는 걸까? 건조하고 이기적인 요즘의 세태에는 혹시 고향이 없는 사람들의 쓸쓸함이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없이 쓸쓸하고 또 쓸쓸한 이 소설은 차가운 날씨와 함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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