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상 품 정 보가 격수 량합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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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뉴엘 <비리디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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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1900년> 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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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 앙겔로풀로스 <1936년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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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뉴엘 <잊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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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뉴엘 <트리스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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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뉴엘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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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뉴엘 <자유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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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의지

 

 

책 욕심이 지나치면 결국 문제가 생긴다. 우선 돈 지출이 대책없어지고, 읽지않은 책이 책상에 자꾸 쌓이면 이 책 저 책 뒤죽박죽되어 종당에는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한 마리 쫓으면 될 것을 두 마리 세마리 할것없이 욕심껏 쫒다보니 한 마리는 커녕 모두 놓치는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당장 눈에 확 띄는 책이 있는데 어찌 참으란 말인가. 

 

어제 한길문고에서 몇일전 주문했던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을 사들고 왔다. 그런데 하루를 못참고 오늘 오전 수협에 들러 무통장 입금으로 셰익스피어 연구서인 스티븐 그린블랫의 <세계를 향한 의지>(박소현 역, 민음사)를 또 주문했다. 얼른 셰익스피어를 읽고싶어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1417년, 근대의 탄생

 

 

 

계획대로 하자면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비극, 역사(헤로도토스, 투키티데스), 철학(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순서로 읽어갈 예정이니, 셰익스피어는 아직 한참 멀었다. 이전에 아카넷(강대진 역)에서 출간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감히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었지만 스티븐 그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 덕분이다 - 를 비롯해서 라틴 고전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도 있고 단테도 읽어야 한다. 더욱이 단테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강의>(안티쿠스)를 비롯 여러 연구서를 병행해서 읽어야 하기때문에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러니 셰익스피어는 아쉬워도 좀 기다려야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다. 계획이 어긋나더라도 속도 위반을 할밖에. 다만 본격적으로 덤벼들 수 없으니 변칙적인 방법을 쓰자. 가령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 <리어왕> <헨리 5세>, 오손 웰즈 주연의 <오셀로>, 맥베드를 영화화 한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거미집의 성>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한 의지>를 읽는 것이다. 최종철이 번역한 민음사판 4대 비극은 이미 읽었으니 대충 영화를 보면서 스티븐 그린블랫을 읽는다면 셰익스피어 접근이 좀 용이할 것이다. 

 

 셰익스피어 전집 2차분 세트                시공 RSC 셰익스피어 선집 

 

나는 요즘 읽고 있는 그리스 고전에 최대한 시간과 열정을 투입하고,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도 그리스 고전 못지않게 공을 들여야할 작가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김정환이 번역한 전집판, 시공사판 RSC본, 이경식 교수의 문학동네판(<햄릿> <템페스트> <베니스의 상인>)를 서로 비교하면서 읽으려고 한다. 병행해서 국내에 번역된 각종 연구서도 가능하면 최대한 찾아볼 작정이다.

 

새 책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정말 매일 삶의 진리에 대해 새롭게 말해 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 바람들은 자연스럽다. 이 기적은 쉽다. 저기 하늘에 있는 천당이란 거대한 도서관이 아닐까 싶어서다.

한 편의 책을 잘 씹으세요, 조금씩 마시세요, 책의 장면들 하나 하나를 맛보세요. 이 모든 규범은 아름답고 좋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이 그것들을 관통한다. 우선 먹고 마시고 보려는 좋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많이 보고, 또 보고, 계속 보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부터 내 책상 위에 쌓인 책들 앞에서, 혹은 도서관이나 서점의 서가에 쌓일 책들을 생각하며, 책의 신에게, 나는 게걸스런 독자로서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일부 문장을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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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도록 오래 책을 읽자면 신체 강건해야하고, 컨디션조차 최상으로 유지해야한다. 하물며 한가한 이의 잡기요, 심심풀이 땅콩이라니! 많은 에너지와 끝없는 열정이 요구되는 책읽기는 육체노동 못지않은 중노동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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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한정되고, 일상은 분주하니 책을 읽기 위해서는 최상의 책, 고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좋은 책도 냉큼 먹을 수 없다. 우선 이해하기쉽고 흥미진진한, 먹기좋고 달콤한 책, 가벼운 책은 도처에 넘쳐나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꾿꾿하게 고전을 고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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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 한 권의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걱정,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평생 쉼 없이 읽어도 삶이 무엇인지 깨닫기 힘든게 또한 우리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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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나를 은둔자라고 이름 붙인 건 세상의 편견일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 하는 사람의 생리상 자기 작품에 충실하자면 불필요한 일에 등 돌린 채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과 대중적 상품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져 있고, 우리 모두는 그 숙명에 철저히 길들여지고 세뇌되어 있다. 나는 그 숙명에 완강히 저항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영화예술에 바치는 경애심이다.”  - 배용균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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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알다시피 내가 평생 책을 읽어왔잖아? 예전에는 그 뜻을 몰랐거든. 근데 이제사 조금씩 알겠어.

- 참 이상하네, 뜻을 모르는데 어떻게 책을 놓지않고 계속 읽었대요?

- 그러게...뭐 대충 알긴했지만 전체 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거지. 그러던게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를 지금은 좀 알겠어.

- 당신, 그런 말 예전에도 했어요. 그때도 당최 뜻을 모르겠다고.

- 그랬었나? 암튼 당시는 비록 이해가 안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손에 들고있으면 언젠가 알게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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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之不亦說乎" 맞는 말이다. 이게 무엇인지 암중모색하던차, 결국 그 의미를 알게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처럼 고단한 시절에, 이처럼 지루하기만 일상에 이만한 기쁨이 어데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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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시간관리에 철저하고, 신체 건강에 각별히 신경 쓰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고전은 물론이고 새로운 책, 좀더 많은 책을 읽고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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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쯤 있을 제 3회 정기연주회 메인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제 7번 A장조 Op. 92>으로 결정되었다. 1번, 5번에 이어 7번이니 지휘자께서는 베토벤을 특별히 선호하시는듯. 하긴 우리 지휘자가 아니라도 심포니의 경우 베토벤이야말로 누구나 선호하는 최고의 작곡가일 것이다. 그동안 베토벤 1번, 5번, 바이올린 협주곡을 했으니 내년 연주까지 벌써 네 곡째다. 짧은 오케스트라 경력치고는 자주 연주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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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시작한지 한 달째 여전히 난관은 1악장인데, 3옥타브 A음을 가능한한 표나지않게 연주해야하고, 점16분음표와 8분음표가 결합된 연속된 리듬 처리도 문제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떠올릴때마다 레슨샘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 프로가 따로있는게 아닙니다. 설사 프로라해도 몇일  연습 안 하면 금방 표가 나고, 연주가 말이아니거든요. 그만큼 연습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사 연습을 열심히 한다해도 어떻게 연습했는가라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린다. 기계적인 반복 연습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  

 

교칙본과 연주 악보를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반복 연습하는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한 소절을 연주하더라도 생각하며 연습해야 한다는 것. 더욱이 아마추어의 가장 큰 함정은 기본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해도 진행속도가 한없이 더디다. 어쩌랴,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그저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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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두 달쯤 지나자 1악장은 어느정도 연주가 가능하다. 골치아픈 리듬감도 좀 감이 오고, 도입부 3옥타브 A음도 그럭저럭 낼 수 있게됐다. 어제부터 2악장 알레그레토를 시작했다. 문제는 3옥타브 A음이 다시 나오는 3악장 프레스토이다. 471마디부터 7마디를 연속해서 한 호흡으로 A음을 연주해야하고, 이게 다시 6마디째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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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전부터 시작한 교칙본 알렌 비주티의 롱톤 파트 중 하이음이 나오는 5번~ 8번까지 지속적으로 반복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트럼펫에 국한한다면, 베토벤 7번 교향곡의 성패는 특유의 강렬한 리듬감을 얼마나 정확히 연주할 수 있는가, 그리고 3옥타브 A음을 얼마나 매끄럽고 강하게 연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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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샘은 연주음반을 자주 들어보라고 자주 강조한다. 아닌게 아니라 아마추어에겐 일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반복해서 듣는것도 훌륭한 공부법이다. 유튜브에서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로열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를 골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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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다룬 영화를 꼽으라면 우선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스토커>, 마틴 스콜세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 잉그마르 베르히만 <제 7의 봉인>, 루이스 부뉴엘<나자린>(베니토 페레스 갈도스 원작)<비리디아나>, 로베로 브레송<시골 사제의 일기>(베르나노스 원작), 파졸리니 <마태복음>, <당나귀 발타자르>, 노만 주이슨 <신의 아그네스>(존 필미어 원작), 모리스 피알라 <사탄의 태양아래>(베르나노스 원작),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거미의 계략>(보르헤스 원작), 드니 아르캉 <몬트리올 예수>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중에서 최고작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배용균의 <달마...>를 들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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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년>을 만든 배용균은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 작가’다. 언제나 감독과 각본, 촬영, 편집, 기획을 혼자서 해낸다. 유머라고는 거의 없는데다가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 영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믿음은 거의 노이로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강박관념은 그의 영화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배용균의 영화적 계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또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생활의 리얼리즘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리얼리즘)에 닿아 있다.

 

(...)영화 속에서 다루는 자연의 풍경에 그 어떤 다른 변형도 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 속에서 생활을 끌어내려는 마음에서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배용균은 우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과 표정 사이에서 번뇌의 입구를 본다. 바로 이 순간, 리얼리즘의 사이사이로 모더니즘의 형식이 껴들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광경 속으로 영화의 수사학이 펼쳐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표정은 수도자들의 번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자기 성찰 사이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한편의 영화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빚어내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 수많은 선화에서 영향받았을 화면들은 그런 의미에서 번뇌이며, 그가 넘어서려고 하는 차안과 다가서려고 하는 피안의 경계를 타고 물어보는 공과 색의 넘나듦이다."  - 정성일(영화평론가, 감독)

 

지나치게 멋부린듯, 현학적이어서 호감이 가지 않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배용균 평이다. 정성일은 배용균이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라고 표나게 리얼리즘을 내세우고 있는데,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진실을 구현하려는 모든 예술가들은 리얼리스트일 수밖에 없다. 단지 우리가 구분하기 좋도록 리얼리즘 앞에 '전통적','마술', '시적'이니 하는 접두어를 붙일따름이다. 건 그렇고, 내가 배용균의 영화에 대해 극찬을 하는것은 영화적 메시지보다 영상이미지, 화면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서사를 근간으로 하는 문학과 달리 영상이미지의 산물이다. 따라서 감독의 메시지가 화면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느냐가 최대 관건이라고 본다. 좋은 작품일수록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듯 좋은 영화 역시 메시지와 영상이미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기 마련인데, 바로 배용균의 <달마가...>그렇다. 아마 배용균의 전공이 영화가 아니라 회화- 조형학- (쿠로자와 아키라도 한때 미술학도였고, 타르코프스키도 회화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인것도 좋은 화면을 만든데 일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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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영화가 종교를 좀더 많이 다뤘으면 좋겠다. 인구 30만이 채 안되는 이 좁은 군산 바닥에 교회가 70개가 넘는다잖은가. 그러니 너도나도 종교를 다뤄야 마땅하고, 무겁던 가볍든 자꾸  물음을 던져야한다. 그렇다해서 임권택의 <아제 아제...> <만다라>식의 유치한 문예영화는 제발 그만두고 가능하면 종교비판 쪽으로 방향을 좀 틀었으면 좋겠다. 

 

연전에 이창동 감독이 <밀양>을 통해 기독교의 위선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한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작업을 더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이런 작업을 한 대표적인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이다. 그는 <비리디니아>에서 한 초보 수녀의 허물어지는 과정을 통해 기독교의 위선성을 가차없이 까발린바 있다.  

 

가령 종교 비판은 두 가지 방향으로 행할 수 있는데, 첫째는 <밀양> <비리디아나> 식으로 종교가 세상에 대해 어떤 위선을 저지르는가라는 현실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노만 주이슨의 <신의 아그네스>, 로베로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처럼 전통적으로 알고있던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후자의 경우,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세속화된 우리시대(하비 콕스)에는 중세와 어떤 차별성이 있어야 하는지, 나아가 바이블은 일점일획 오류가 없다는 한심한 시대의 종교적 작태에 대해 가차없이 지적하고, 현대신학적 성과를 영화 속에 반영해야 한다.

 

다만 신과 종교를 보다 근원적으로 다른 영화들, 즉 타르코프스키, 베르히만, 브레송의 경우 아직 우리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낯설다. 더구나 신학이 부재한데다 중, 목사, 신도 할 것없이 총체적으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한국종교계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4.

여하튼 우리시대의 한국영화가 종교적 소재를 더 많이 다뤄졌으면 하는게 나의 소망이고, 만약 바람대로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베르히만, 브레송, 타르코프스키 보다 스페인 교회제도의 위선과 타락을 지속적으로 비판한 루이스 부뉴엘을 참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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