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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다룬 영화를 꼽으라면 우선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스토커>, 마틴 스콜세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 잉그마르 베르히만 <제 7의 봉인>, 루이스 부뉴엘<나자린>(베니토 페레스 갈도스 원작)<비리디아나>, 로베로 브레송<시골 사제의 일기>(베르나노스 원작), 파졸리니 <마태복음>, <당나귀 발타자르>, 노만 주이슨 <신의 아그네스>(존 필미어 원작), 모리스 피알라 <사탄의 태양아래>(베르나노스 원작),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거미의 계략>(보르헤스 원작), 드니 아르캉 <몬트리올 예수>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중에서 최고작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배용균의 <달마...>를 들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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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년>을 만든 배용균은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 작가’다. 언제나 감독과 각본, 촬영, 편집, 기획을 혼자서 해낸다. 유머라고는 거의 없는데다가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 영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믿음은 거의 노이로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강박관념은 그의 영화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배용균의 영화적 계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또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생활의 리얼리즘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리얼리즘)에 닿아 있다.
(...)영화 속에서 다루는 자연의 풍경에 그 어떤 다른 변형도 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 속에서 생활을 끌어내려는 마음에서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배용균은 우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과 표정 사이에서 번뇌의 입구를 본다. 바로 이 순간, 리얼리즘의 사이사이로 모더니즘의 형식이 껴들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광경 속으로 영화의 수사학이 펼쳐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표정은 수도자들의 번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자기 성찰 사이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한편의 영화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빚어내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 수많은 선화에서 영향받았을 화면들은 그런 의미에서 번뇌이며, 그가 넘어서려고 하는 차안과 다가서려고 하는 피안의 경계를 타고 물어보는 공과 색의 넘나듦이다." - 정성일(영화평론가, 감독)
지나치게 멋부린듯, 현학적이어서 호감이 가지 않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배용균 평이다. 정성일은 배용균이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라고 표나게 리얼리즘을 내세우고 있는데,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진실을 구현하려는 모든 예술가들은 리얼리스트일 수밖에 없다. 단지 우리가 구분하기 좋도록 리얼리즘 앞에 '전통적','마술', '시적'이니 하는 접두어를 붙일따름이다. 건 그렇고, 내가 배용균의 영화에 대해 극찬을 하는것은 영화적 메시지보다 영상이미지, 화면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서사를 근간으로 하는 문학과 달리 영상이미지의 산물이다. 따라서 감독의 메시지가 화면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느냐가 최대 관건이라고 본다. 좋은 작품일수록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듯 좋은 영화 역시 메시지와 영상이미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기 마련인데, 바로 배용균의 <달마가...>그렇다. 아마 배용균의 전공이 영화가 아니라 회화- 조형학- (쿠로자와 아키라도 한때 미술학도였고, 타르코프스키도 회화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인것도 좋은 화면을 만든데 일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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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영화가 종교를 좀더 많이 다뤘으면 좋겠다. 인구 30만이 채 안되는 이 좁은 군산 바닥에 교회가 70개가 넘는다잖은가. 그러니 너도나도 종교를 다뤄야 마땅하고, 무겁던 가볍든 자꾸 물음을 던져야한다. 그렇다해서 임권택의 <아제 아제...> <만다라>식의 유치한 문예영화는 제발 그만두고 가능하면 종교비판 쪽으로 방향을 좀 틀었으면 좋겠다.
연전에 이창동 감독이 <밀양>을 통해 기독교의 위선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한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작업을 더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이런 작업을 한 대표적인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이다. 그는 <비리디니아>에서 한 초보 수녀의 허물어지는 과정을 통해 기독교의 위선성을 가차없이 까발린바 있다.
가령 종교 비판은 두 가지 방향으로 행할 수 있는데, 첫째는 <밀양> <비리디아나> 식으로 종교가 세상에 대해 어떤 위선을 저지르는가라는 현실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노만 주이슨의 <신의 아그네스>, 로베로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처럼 전통적으로 알고있던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후자의 경우,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세속화된 우리시대(하비 콕스)에는 중세와 어떤 차별성이 있어야 하는지, 나아가 바이블은 일점일획 오류가 없다는 한심한 시대의 종교적 작태에 대해 가차없이 지적하고, 현대신학적 성과를 영화 속에 반영해야 한다.
다만 신과 종교를 보다 근원적으로 다른 영화들, 즉 타르코프스키, 베르히만, 브레송의 경우 아직 우리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낯설다. 더구나 신학이 부재한데다 중, 목사, 신도 할 것없이 총체적으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한국종교계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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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우리시대의 한국영화가 종교적 소재를 더 많이 다뤄졌으면 하는게 나의 소망이고, 만약 바람대로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베르히만, 브레송, 타르코프스키 보다 스페인 교회제도의 위선과 타락을 지속적으로 비판한 루이스 부뉴엘을 참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