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연주든 독서든 아마추어 애호가인 나로서는 진지하고 심각하기보다 가볍게 즐기려고 한다. 그래서 문학서의 경우도 작품을 읽는것 못지않게 번역상태나 장정 등에 대한 외적 관심이 클 때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최종철 번역판(민음사)으로 4대비극을 오래 전에 읽긴했지만 대개의 고전작품이 그렇듯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지다. 언젠가 시간이 가능하면 본격적으로 읽어볼 계획인데 책을 구입하기에앞서 우선 번역서 현황을 좀 살펴본다. 

 

대부분의 국내 유수 출판사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번역 출간하고있다. 일찍이 정음사에서 전집을 낸바 있는데, 최근에만 하더라도 최종철 교수의 민음사판 전집, 시인 김정환의 아침이슬판 전집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밖에 시공사에서 RSC와 판권 계약을 맺고 현재 다섯 작품을 선보였고-  RSC(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 시리즈는 1623년에 나온 전집(제1이절판)이 번역 대본임 - 문학동네에서도 이경식 교수에 의해 몇몇 작품이 출간된바 있다. 

 

******************

펌/ 로쟈 이현우(서평가)

 

김재남 교수의 최초의 한국어판 셰익스피어 전집은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됐었으나 절판된 지 오래인 상태에서 신정옥 교수의 문고본 판형의 전집(전예원)이 유일했었다. 그러다 2008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김정환 시인의 셰익스피어 전집(아침이슬)이 완간을 앞두고 있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셰익스피어를 전담해서 번역해온 최종철 교수도 2014년부터 셰익스피어 전집(민음사)을 출간중이다.

 

셰익스피어 1인 번역은 김재남, 신정옥, 김정환에 이은 시도로 의미가 있다. 현재 김재남본은 절판된 상태에서 몇몇 작품만 다시 나와 있고, 김정환본은 아직 완간되지 않은 상태다. 신정옥본은 너무 풀어서 옮긴 대목이 많아서 '운문성'을 감지하기 어렵다. 운문성을 살린 번역으로는 김정환 시인본과 경합이 되겠다. 

 

최 교수는 시 형식으로 쓴 연극 대사를 산문으로 바꿀 경우 시의 함축성과 상징성 및 긴장감 그리고 음악성이 거의 사라진다면서 "시적 효과와 음악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정확성을 확보하는 우리말 번역"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역자는 "두 언어가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영어의 음악과 리듬을 우리말로 꼭 그대로 재생할 수는 없다"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오보'에 해당하는 단어들의 자모 숫자와 우리말 12~18자에 들어가는 자모 숫자의 평균치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멕베스' 등 셰익스피어의 극작품 중 정수라 불리는 비극이 담길 4, 5권도 내달 출간된다.

 

4대 비극을 포함하여 2차분으로 나올 책들도 사실은 이미 번역본이 나와 있는 상태이므로 전집판으로 판갈이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 최종철본은 "시 형식으로 쓴 연극 대사"에서 '시 형식'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연극 대사'라는 점은 간혹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모든 걸 충족시킬 만한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면, 각각을 만족시킨 번역본이 따로 나오는 것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막바지에 이른 김정환본도 조만간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개인 번역 전집의 상황이 그렇고, 한국셰익스피어학회에서도 전문 연구자들의 번역판으로 작품총서(동인)를 계속 출간하고 있다. 이제 수년 안으로 네댓 종의 셰익스피어 전집을 우리가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물론 전집판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이고, 4대 비극 같은 주요 작품들에 한정하면 독자의 선택지는 훨씬 더 넓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이번 전집과 함께 가장 최근에 나온 건 펭귄클래식판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주요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와 있고 김정환, 신정옥 전집판으로 있기에 비교해서 읽어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

 

팝가수 밥 딜런(75세)이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음악을 통해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 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중 가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1901년 상이 생긴 이래 처음인데, 어찌보면 이번 수상은 노벨문학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결과다. 다시 말해 과거의 수상이력을 봐도 알겠지만 노벨문학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의 작가, 작품에 수여되는 상이 아니라는 것. 유럽문학계의 퍼포먼스쯤 될까?

해마다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냐고 성화가 빗발치곤했는데 가뜩이나 이번은 '닭쫒던 개' 신세가 됐다. 결과적으로 우리 위대한(?) 시인의 작품성과가 대중가수 밥 딜런만 못하다는 애기.

 

내가 사는 군산은 허구헌날 고은 타령이다. 기억이 희미하긴한데, 오래전 연작시집 <만인보>와 소설 <화엄경>인지 뭔지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대체 시인 고은이 왜 노벨문학상 후보로 떠받들여지는지, 왜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로 평가되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한때 민주투사 전력이 있으니 차라리 평화상이라면 모를까 문학상이라니....

 

암튼 여기 군산은 해마다 '시민의 날'에 맞춰 '진포예술제'라는게 열리는데 그때마다 채만식과 고은은 단골메뉴다. 좀 과장하면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행사가 열릴지 아득한 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극 <만인보>가 무대에 올려졌나본데, 고은 타령 채만식 타령이 참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그렇게도 레퍼토리가 없단 말인지 아니면 예술제 기획자의 안목이 그정도 수준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그동안 노벨문학상을 할리우드영화정도로 시시하게 여겼더랬는데, 이번 수상 결과를 보자 슬슬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뭐 고은도 고은이지만 하루키가 미역국 먹은게 천만다행이다. 워낙에 3류 대중작가로 치부한 판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아트앤스터디' 김상봉<그리스 비극론 1> 제 6강  

 

(..) 폴리스는 지리적 한계를 가지는 정치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자연과 사람과 신이 만나는 우주적 교차로이자 형이상학적 좌표였다. 종교와 맞물려 있는 것은 왕권의 계보가 아니라 시민적 공공성이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의 종교는 자유로운 시민의 종교일 수 있었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 억압의 기제, 순치 내지 사기를 위한 체계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통해서 실존의 지평을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폴리스는 인간이 숨쉬는 공간이자 신이 보호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시민이 폴리스를 사유/염려한다는 것은 자연과 신과 인간을 총체적으로 배려한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보편은 정신의 개별성과 보편성이 공속하는 토양에서 가능했다. 모든 실제적인 정신은 개별자 속에서 발생하나, 개별자 속에서 발생하는 정신은 개별성에 함몰되지 않고 절대적 총체성(인간, 신, 자연)의 영역까지 자기를 확장하고자 한다. 개별적 주체가 보편성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모순이다. 비극은 바로 이 두 가지 대립적 계기의 모순에서 생겨난다.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려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개별자가 비극적 주체로서 파멸하고 몰락할 때 발생하는 고통이 비극적 고통의 핵심이다.

 

개인이 당파성 속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성의 지평에서 사유하고자 할 때 개인 내의 개별성과 보편성은 충돌을 일으킨다. 정신은 삶의 계기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정신(보편성)은 이론적 자연에서는 질서와 합법칙성을 추구하고, 실천적 삶에서는 총체적 삶의 의미를 파악하여 의미의 지평을 확보하고 개방하고자 한다.

 

피타고라스가 좁은 의미의 사물 인식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한 것에서 이미 확인되듯, 철학은 시원에서부터 정치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신화를 버리고 physis, 즉 자족적인 자연의 총체성을 정립해가는 과정이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신은 계속 외연을 넓혀 우리의 삶이 정신의 빛 아래로 들어올 수 있게 한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자를 소통의 빛 아래로 불러들임, 그것이 곧 로고스(합리성)이다. 그런데도 그리스인들에겐 어떤 비합리성, 초월, 형이상학적 지평이 끝끝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일컬어졌다. 비극은 이렇듯 합리성의 이상과 운명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장파는 "비극은 합리적 이성이 확고한 뿌리를 내린 데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반은 맞다. 종교적 정신에 함몰되어 있을 때 비극은 가능하지 않다. 『욥기』의 숭고함은 인간의 비극적 현실이 종교의 절대적 지평이 아니라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의미의 지평 속에서 정당화되기를 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비극적 긴장의 핵심이다. 필연성, 합리성 속에 머무를 때 비극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단 한번도 합리성이 초월적인 신비를 지양하였던 적이 없다. 그리스인의 합리성은 항상 신화/종교/운명에 발목 잡혀 있었다. 나아가 정신이 완벽히 세속화되어버리면, 완벽히 계몽화된 후엔 비극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합법칙적인 세계에서, 예컨대 스피노자적 세계에선 비극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 연쇄에 따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비극은,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여변에서, "왜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절박한 물음에서 탄생한다. 비극은 현실에 대한 깊은 불만족, 그 경계에서 생긴다. 그것은 능동적인 현실 초월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에 관한 한, 순종적이면서도 동시에 합리성의 척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극한까지 추구하려 했다.

 

주체는 이런 방식으로 폴리스의 주인이 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합리성을 끝까지 추구했기에 역설적으로 이들은 합리성의 한계를 자각할 수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의 지평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은 주체성(정신)의 한계로 남았고 그 경계선의 흔들림에서 비극적 정신이 싹텄다.

 

호메로스식 운명관은 변경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운명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정신적인 숭고함을 보이는 것, 즉 운명=죽음을 뛰어넘는 용기를 얻고 영원한 가치에 참여하는 것(;도덕적 초월)이 호메로스 이래 그리스인의 유구한 정신 태도였다.그런데 기원전 5세기로 내려오면 이러한 사고 방식이 그 자체로선 통용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 넘고 운명을 이기는 것은 개인적 태도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폴리스 전체로 보면 보편적 정당성을 얻기 어려웠다. 즉 dike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내 한 몸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숭고함은, 공공적 이성의 입장에서 볼 땐 폴리스 전체에 불의가 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dike를 합산한다고 해서 인륜적 사회 전체의 dike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에 맞닥뜨렸을 때 비극 작가들은 신화/운명의 정당성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비극적 질문이 싹튼다.

 

고통스런 사건들의 원인과 의미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극 작가들은 철학자들이 넘어가지 못한 합리성의 여변에서 그 해답을 추구하였다. 그들에게 비극적 운명의 출발은 휘브리스 hybris였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비극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휘브리스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하여 배운다는 식의 정당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성은 결국 정신이 이 모든 것을 자기 속에 떠 안아야 했기에 발생하였다. 그 정점이 소포클레스였다.

 

요약하면 개별적인 정신이 보편성에로 확장해 가면서 절대적인 총체성 앞에서 일으키는 내적 분열이 그리스 비극의 참된 숭고함을 만들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이현우(서평가)

 

프랑스의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이루, 2013)가 출간됐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가 부제. 사실 이런 주제나 제목의 책이 없었던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용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추천사를 청탁받고 처음 원고를 읽을 때 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참신했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적은 추천사가 이렇다.

 

 

걸어 다니는 모든 인류가 책을 읽는 건 아니며 책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모든 책과 책에 대한 기억 또한 소멸할 것이다. 책을 읽는 인간에게 ‘왜 책을 읽는가’는 책의 탄생과 소멸 사이를 지탱하는 물음일 따름이다. 샤를 단치는 우리에게 독서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않는다. 독서는 다만 ‘죽음과 벌이는 결연한 결투’일 뿐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패배할 테지만, 우리는 결연히 책을 읽어나갈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분류하자면 샤를 단치는 '아주 사적인 독서가'다. 독서를 권유하지도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독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할 뿐이다. 물론 독서는 대단히 이기적인 행위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그래도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쿨하게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비열한 인간은 라신을 읽는다 해도 비열한 인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교양이 없다면 교양을 두른 비열한 인간으로 바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선한 사람이 나쁜 책을 읽는다 해서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독서의 나쁜 영향은 그것이 주는 좋은 영향력만큼이나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고전 번역에 관한 한 천병희의 작업은 가히 독보적이다. 평생을 오로지 원전 번역에만 매달려온 그의 공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번역 보다 짜깁기 논문 한 편을 위에 두는 우리의 번역 풍토에선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고전학자로서 그의 연구성과는 어떨까.   

 

그 역시 학자니만큼 오래 전에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라는 연구서를 내긴 했지만 구색을 갖춘정도지 엄밀히 말해 학문적 성과물로는 별로다. 어느덧 그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이 30여권에 이른다. 이만하면 학자로서 자기 할일 충분히 다 한거고 이제 연구는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도 무방할 것 같다.  

 

영문학자이면서 그리스 고전을 연구한 임철규의<그리스 비극>(한길사)은 제반 연구성과를 인용, 비교, 정리, 소개하고 있지만 실증적인 작업에 그칠뿐, 주체적인 해석이나 견해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각종 연구 성과물의 모듬이라고할까. 하지만 우리가 천병희의 역할에 만족해야했듯이 임철규에게도 더 이상 바라서는 안 될 것 같다. 불모지에서 이만한 지적 성과물을 비교, 소개한것만해도 어데인가.   

 

다음은 중견학자이자 정암학당 멤버인 강대진. 그린비 출판사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로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라는 두툼한 해설집을 냈고, <비극의 비밀>(문학동네)이라는 제목으로 그리스 비극 해설집도 출간한바 있다. 하지만 세 권 모두 원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매 장면마다 자세하게 해설을 붙인 가이드북이다. 초보적인 독자, 청소년용으로 적당한 이런 해설서를 두고 무슨 학문적 성과니 주체적 해석이니 하는 말을 할 수는 없겠다.

 

섭섭한 일이지만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주체적인 해석이 곁들인 국내연구서는 아직 없다고보면 된다. 다만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김상봉의 작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그리스 비극의 편지> <나르시스의 꿈>(한길사)에 서술된 단편적인 견해, 디지털강좌 '아트앤스터디'에 개설된 <그리스 비극론>강좌가  그것인데 일단 그리스 비극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끌어들인건 호감이 간다. 어쨌거나 난삽한 학문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인건 지식인에게든 일반 독자에게든 실천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다만 줏대있어보이는 그의 견해가 학문적 성과로서 어떤지, 어느정도 보편성과 객관성을 아우른 해석인지 나로서는 아직 판단할 능력이 없기에 다만 견강부회적 해석이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