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독회는 칸트의 종교론을 주제로 실시할 예정입니다. 텍스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맨 뒷 쪽에 수록된 신옥희 교수의 글 <칸트의 근본 악과 신>과 O. W. 되에링 저 <칸트철학입문>(김용정 옮김, 서광사) 중 제 6장 <칸트와 종교> 부분을 중심으로 칸트의 종교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칸트의 이성에 기반을 둔 종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실천이성비판에서 거론된 선악의 개념, 도덕의 개념을 어느정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칸트의 도덕론의 기본 취지를 좀 알아볼까요?

 

칸트는 실존철학자들처럼 인간의 의지를 자율적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자율적인 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지켜야 할 규칙을 자신이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칸트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보편적 도덕 법칙인 정언명령을 따라야 하고, 우리는 이런 정언명령에 스스로 종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정언명령이란 조건부적 명령인 가언명령과 달리 무제약적인 명령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행위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하라” 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어떠한 행위 규칙을 세울 경우, 그것이 타인들 모두가 따라도 된다고 생각된다면, 모두가  그 규칙에 따른 행위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틀어 내가 “길을 가다 주운 지갑은 내가 가진다.” 라는 행위 규칙을 세웠다면, 이는 결국 설사 자기 자신이 길을 가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을 경우 그 지갑을 남이 가져가도 욕하지 않겠다는 결정과 같은 것이지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설사 자기가 길을 가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그 지갑을 남이 주워 가진다고 해도 욕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심이 설 때에야, 길을 가다 주운 지갑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정언명령을 말하면서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 규칙을 세운다면 저절로 도덕적인 행의 규칙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요. 남들 모두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행위만을 한다면 그 행위가 비도덕적일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남들이 모두 타인을 죽여도 된다거나 물건을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쯤해서 종교론을 살펴 보지요.

 

칸트는 종교를 신의 명령으로서의 우리의 의무의 인식이라 해석합니다. 이성이 자신에게 그것을 명령하기 때문에 정언명령에 따르는 경우, 그것은 순수하게 도덕적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정언명령의 요구를 자신의 이성의 소리에 있어서 - 주목하세요! 이 말이 핵심이니까요. 신의 명령조차 이성의 소리에 있어서라는 바로 이 말! - 신의 명령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정언명령의 요구를 충족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종교적 행위가 된다고 합니다. 어때요, 이해가 되는가요? 좀 어렵다면 다시말해 볼게요.

 

칸트에 따르면, 도덕은 근원적인 것이며 종교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도덕적 인간만이 실제로 종교적 인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종교성이 발견되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에 대응하여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덕은 우리에게 도덕률을 부여합니다. 동시에 종교는 도덕률이 신에 의해 우리의 이성 속에 놓여진 것으로 해석되고요.

 

이런 식의 종교해석에 의해 우리의 내부에 있는 도덕률은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도덕률은 신의 의지의 존엄과 더불어 우리에게 접근해와서 그것에 의해 반항적 충동을 쉽사리 극복하게 되지요. 그러나 유의할 것은 종교적 동기에 의해 이끌려진 인간도 결국 도덕률을 위해서만 행위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적 원천의 표상은 종교적 동기에 이끌려진 인간에게 대해 도덕률을 보다 더 존경할 만한 것, 보다 더 철저한 것으로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고요.

 

뭐 이정도만으로 칸트의 종교론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결국 이신론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칸트의 종교론은 하고많은 이신론으로 매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칸트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알았다면 개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싶군요. 이른바 성령이니 삼위일체니 하는 식의 계시신앙에 대해 일체 거부감을 지녔으니까요. 자, 칸트의 종교론을 좀더 자세히 알고싶으면 내일 저녁 서재에서 뵙도록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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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하고 참가한 스터디 모임에서 어느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를 보세요. <터미네이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을 말하고 있거든요. 바로 지구의 종말인 거죠. 그렇습니다. 혹 시간이 되면 꼭 이 영화들을 보세요. 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엄숙한, 이런 무서운 광경을! "

신앙은 그토록 진지하게 수행하는 세상의 모든 지적노력을 한순간에 유희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대체 신앙 앞에서 무슨 토론이 가능할 것이며 지적 탐색이 이뤄지겠는가. 

 

기이한 것은 한 인간에게 신앙과 인문적 지식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도그마적 신앙에 따른 모순성은 일면 아마추어리즘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결국 내가 모든 형태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일순간에 판단정지케 하는 그 단순성, 맹목성 때문이다.

 

과장한다면, 절대적 믿음(신앙)에 의해 무오류, 무조건적인 안락을 기대하는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생활인의 아마추어리즘과 흡사하다. 일체의 회의가 배제된 일상의 쾌락! 상식, 관습, 안락, 보편적 평균성을 강요하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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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앙, 혹은 신학과 신앙은 서로 놓인 자리가 다르다. 개인적 결단과 실존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은 신 앞에서 절대적인 믿음이 선행되는데 반해, 종교나 신학은 신앙이 배태된 근원과 배경, 역사, 형성과정, 원리, 방법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는 학문적 방법론, 학자의 가치관, 혹은 세계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즉 동일한 종교나 신을 탐구하더라도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거다.

한편으로 절대적 믿음, 개인적 실존이 수반되는 신앙은 개인의 결단과 믿음만이 요구되기 때문에 피차의 견해가 충돌하고 교환되는 토론은 불가능하다. 이에반해 종교나 신학은 얼마든지 토론이 가능하고, 때로 나와 다른 상대의 주장과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한 종교, 신학적 테제를 두고도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실한 믿음, 신앙만있으면 되지 신학이니 종교학이 왜 필요할까싶지만, 신학이 배재된 신앙은 맹목적이거나 도그마, 혹은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교조적이거나 맹목적 신앙이 저지른 폐해를 우리는 무수히 보았다. 따라서 신앙이 올바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종교학, 신학이 튼실히 뿌리 내려야 하고, 가능하면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신학에 관심을 둔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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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호 뒤에 특정 단어를 쓰면 그 단어에 대한 게시글을 모아 분류해서 볼 수 있는 SNS 기능.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블로그와 같은 온라인 게시글 끝에 일종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인데, 해시태그 운동은 # 기호 뒤에 사회적 메시지를 적어 해당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현상.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1018100208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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