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행복’이니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불완전성’이니 하는 말을 읊어대서 나에게 좀 꾸중을 들었다.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불행이나 고통, 고뇌, 불가항력적인 고난이나 재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논리의 선행조건으로 앞세운다는 것은 인간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치는 신앙의 고백이 아니다. 정치가는 자신의 개인적 신앙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종교적 간판을 탈색시키는 것이 정당하다. 정치가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추구해야 하고, 보편적 가치를 표방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가장 진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헌법, 제1조는 “프랑스는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삼자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공화국의 민주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을 동등하게 인정했는데, 그 양자에 앞서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바로 ‘비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근원적으로 탈각하는 성격을 민주의 근본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프랑스는 어떠한 신조든지 존중한다.” 민주사회에서는 특정한 신앙의 우선 순위가 있을 수 없다. 나는 정치인이 나와 같이 식사를 할 때 성호를 긋거나 기도를 하면 하류로 취급한다. 그는 정치의 기본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 김용옥 대담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종교를 쓰레기라고 여겨도 할 말이 없는 시대에 살지만, 종교는 넘사벽의 구조적 불의 앞에서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우리 사회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 김용민 트위터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신봉해 온 야훼입니다. 그런 야훼를 성서와 복음성가에서는 '사랑'이라는 무형의 가치와 동일시 합니다. '사랑'은 존재론적 신인 야훼 그 자체일까요?"    - 김용민 트위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요에서    - 최영철(시인)

 

하루 예닐곱 번 들어오는 버스에서 아저씨 혼자 내린다
어디 갔다 오는교 물으니 그냥 시내까지 갔다 왔단다
그냥 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까지 가 보는 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거 말고 먹은 거 소화시키는 거 말고
강물이 좀 불었나 건너마을 소들은 잘 있나 궁금한 거 말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주머니 손 찔러넣고 건들건들
한나절 더 걸리든 말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저씨는 그냥 나갔다 온 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그냥 집으로 가고
오랜만에 손님을 종점까지 태우고 온 버스는
쪼그리고 앉아 맛있게 담배 피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와 봤다는 듯
바퀴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빈차로 출발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끼를
일곱이나 낳은 발발이 암캐와
고향 같은 건 곧 까먹고 말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먼지를 덮어쓴 채 한참 

이 시의 묘미는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 라는 두 싯구의 대조에 있다. 앞만보고 분망히 살다보면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삶의 무상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마 낚시를 좋아하는건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설사 고기가 물지않아도, 출렁출렁 부딪치는 물살만 바라봐도 분망한 마음은 고요해지고 이내 평정심을 찾는다. 

 

그러나 내남할 것없이 무상성,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그냥 몸을 맡길수가 없는게 우리네 삶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처로 떠나보낸 아이'와 '발발이 암캐'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먼지' 뒤짚어쓴 채 살아내야 하는게 우리 삶의 모습이며 인간실존이다. 이유도 없이 그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도하든 안 하든 정치적이다. 일견 정치와 무관하게 보이는 문학, 음악 등 모든 예술활동도 궁극적으로는 정치로 수렴된다. 정치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나가야하는가를 말하는 바로미터이며, 종합적인 활동이자 제도 장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매체, 활동, 심지어 우리의 생각까지도 정치로부터 얼마나 멀고 가깝느냐 라는 정도의 문제이지 결국은 무관하지 않다. 

 

흔히 예술이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갇히면 창작활동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상력이 굴레에 갖힌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어떤 작품이 진지하게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노래했다면 과연 삶의 질곡, 삶의 복답다단한 문제들을 완벽하게 피해갈 수 있을까? 

 

설사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해도 삶의 곡절들을 완벽하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예술작품을 창작했다고 자부해도 예술작품이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려한다면 필연적으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제도, 구조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절해고도 무인도나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공간이라면 모를까 혼자만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인간관계를 이루는 한 사회적 제도를 외면 할 수 없고, 최종적으로 정치와 무관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이번엔 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대표적으로 예수의 삶을 보면 일견 정치와 무관한 인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삶 자체가 그랬으니까. 반면에 역사적으로 당시 로마 제국주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식민통치에 맞서 폭력 혹은 비폭력적으로 항거를 했는데, 전자의 경우는 유다가 대표적이다. 

 

행동파이면서 과격한 유다를 비롯 이들은 예수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적극적인 투쟁을 요구했지만 예수는 동포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일관되게 사랑, 평화, 비폭력을 주장했다. 바로 이런 예수의 행동을 두고 우리는 그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여기는거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가 외치는 '사랑'은 가진자, 권력자 편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자, 피지배자 편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늘 가진자, 힘 있는자, 권력자들에겐 거침없이 질타를 날렸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겐 베품과 사랑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실제 사랑이 요체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사랑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해방, 평등의 구현되어야 한다. 다만 예수는 직접적으로 거론을 안 했달뿐이지 그는 사랑의 구현을 위해 억압하는자, 권력자에 대해 끊임없이 평화적으로 항거했고, 비폭력적이지만 무언의 외침을 했다. 바로 이게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절대 정치와 무관해!" 라고 하는 사람조차 사실은 은연중 자신의 정치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외견상 비정치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방관한다든가 정치를 외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고전을 읽든 현대문학을 읽든 하다못해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든 나는 모든것의 배후에 깔려있는 정치적인 문제에 늘 관심을 갖는다. 내게 독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발딛고 사는 오늘의 문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가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지 독서행위 그 자체만의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허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독서 행위의 일차적 목적은 즐거움에 있고, 일종의 즐김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의미를 따지거나 헤아려보기 위해서다. 평생의 독서경험에 비춰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전을 비롯한 최상의 작품들은 가장 재밌고 즐거우며 정치적 의미를 깊이 내장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6 원주박경리문학제 박경리문학상 수상 작가인 케냐 출신의 응구기 와 티옹오가 20일 오전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을 보니 케냐 출신의 소설가 응구기 와 티옹오가  2016년 제 6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원래 티옹오는 하루키와 함께 2016년 노벨문학상 유력한 수상 후보였다. 나는 내심 그가 수상하기를 기대했는데 밥 딜런이 받자 여간 서운한게 아니었다. 여하튼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하게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고, 비록 두 상의 성격이 다르겠지만 내 보기에 이번만큼은 노벨상보다 박경리문학상쪽이 작가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2016년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는 노벨상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결정되었다) 

 

우리에게 제 3세계 문학, 특히 아프리카 소설은 그리 많이 소개된 편이 아니다. 그나마 '창작과 비평사'의 노력 덕분으로 몇몇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창작과비평사'의 제 3세계총서 중 한 권으로 응구기 와 티옹오의 소설 <피의 꽃잎, 1983>(김종철 역, 창작과비평사 전 2권)이 출간되어 진즉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였다. 이 소설은 후에 민음사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다음은 한겨레신문에서 옮긴 응구기 와 티옹오의 프로필이다.

 

응구기 와 티옹오는 1938년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와 영국에서 대학을 마쳤다. 그가 태어날 당시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마우마우 독립전쟁은 청년기 그의 삶과 초기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62년 희곡 <검은 은둔자>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첫 소설 <울지 마, 아이야>(1964)를 비롯해 <한 톨의 밀알>(1967), <피의 꽃잎들>(1977) 등 같은 작품들에서 식민의 유산과 그에 대한 환멸을 그리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1977년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그는 자신의 부족 언어인 기쿠유어로 된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를 감옥 화장지에 썼는데, 이 작품은 김지하의 담시 ‘오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 그는 기쿠유어로 글을 먼저 쓰고 스스로 영어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1982년 영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1989년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지금은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 영문학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한겨레신문 2016. 10.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