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무신론자로 자처하지만 나는 30대 후반까지만해도 열렬한 크리스천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군산복음교회는 교인수가 300명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교회였지만 교회 크기에 비해 목사님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분이었다. 조용술 목사. 이 분은 내가 교회에 다니던 80년대초에 KNCC 회장을 역임하셨고, 1990년에는 범민족대회 공동본부장으로 베를린에서 북쪽 대표들을 만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노구를 이끌고 민주·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목사님은 KNCC 내에서도 작은 복음교단 소속이었지만 애큐메니칼운동과 독재정권에 투쟁하는 기독교연합운동을 이끌었고, 생애 마지막에는 민간통일운동 지도부로 일하신 훌륭한 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좋은 교회에서 좋은 목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목사님은 군산의 한 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나중에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도시 교회 분위기는 한가하니 어슷비슷한데, 교회 주변이 가난한 달동네다보니 교인들은 평범한 소시민이거나 빈곤층들이 대부분이고, 노인, 부녀자들도 많았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흔한 교회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것은 목사님의 설교였다.

 

설교는 시국과 관련한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대부분이었고, 평신도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은 철학자, 신학자, 혹은 문학작품들이 종종 언급되었다. 가령 키에르케고르, 폴 틸리히라든가, 하비 콕스, 칼 바르트를 비롯해서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그밖에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을 설교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요즘 교회들의 흔한 단골메뉴인 축복, 성령의 은사, 믿음천국 불신지옥, 십일조, 헌금, 순종, 전도 따위의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보다는 오히려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 남북분단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자주 언급되었고, 구약성경의 인용구는 비민주적 체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마치 시국강연이나 교양강연을 연상케했다나는 매주 듣는 목사님의 설교가 워낙 익숙해선지 원래 목사님들은 다 저렇게 설교하는 것으로만 알았고, 다른 교회들 역시 항상 이런 식의 설교를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돌이켜보면 과연 당시 교인들이 목사님의 수준높은 설교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싶은데, 기이하게도 교인들의 정치관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대부분 사회 비판적이었다. 물론 그들이 카뮈나 칼 바르트를 알았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최소한 기복적, 성령은사 일변도 신앙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장로, 집사, 주일학교 교사할것없이 목사님의 영향탓인지 신앙과 인문학적 지식 수준이 상당했다. 더불어 청년층, 주일학교 고교생들은 인문적 교양을 덤으로 갖추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요즘 교회 설교는 한결같이 축복, 성령의 은사, 믿음천국 불신지옥, 십일조, 헌금, 순종, 전도 등의 단어가 대부분이고, 신학적인 문제, 정치, 사회 비판적 문제들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설교가 중학생 수준이나 알아들을정도의 유치하고 저급한 단어들이 주종을 이룬다. 심지어 개그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만담가 목회자가 인기 스타마냥 시도때도 없이 TV에 등장하고,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수준을 어떻게 알고 있기에 저 따위로 설교를 해대는지 화가 다 날정도다. 대체 왜 교회는 이렇게 변했을까. 왜 이렇게 저급한 수준으로 타락했을까.

 

나는 현재 한국의 교회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교회가 더 이상 선교나 성장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목사의 설교를 무조건 추종한나머지 비판이 사라지고, 순종으로 일관하는 교회 현실과  인문학 수준이 교인들만도 못한 목회자가 수두룩한 것도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순진하고 어리석은 교인들도 문제지만 당장 목회자가 변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영영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글은 시간주간지 '한겨레 21'(1194호)에 게재된 서울 후암동 중앙루터교회 말테 리노 목사와 루터학자인 최주훈 목사와의 대담 중 일부인데 평소 내 생각과 같은 내용이 많아 옮긴다. 

 

 1

교회가 너무 크거나 작을 때, 문제가 생긴다. 명성교회처럼 너무 크면 욕심이 생기는반면 너무 작아서 목사 월급을 제대로 못 주는 교회도 많다. 그런 교회의 목사들이 은퇴 뒤 생계를 위해 교회 부동산을 매각하는 일도 벌어진다. 작은 교회들이 협력해야 한다. 교회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2

교회 내부에서도 안과 바깥을 나누는 안팎 사상이 심하다. 경계선을 그어두고 안과 바깥을 나누는 교파주의 도그마에 빠져 있다. 우리 교회만 교회이고, 경계선 바깥의 다른 교회는 비판한다. 이제 선교의 시대, 교회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새 시대를 끌어갈 새 개념이 코이노니아(일치, 공동체라는 뜻으로 도그마의 반대 개념)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이야기하면 진리와 가까워질 수 없다. 견해가 다른 쪽과도 대화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3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묻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다. 목사가 이야기하면 다 먹혀들었다. 이제는 묻는 시대다. 교인들이 목사보다 더 똑똑하다. 목사도 교인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교인 각자가 질문하고 옳은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설교 내용도 문제다. 순종하라는 메시지가 너무 많다.

 

 4

일반 대학을 졸업한 뒤 신학대학원 3년 만에 목사가 되는 지금의 교육제도가 엉터리 목사를 양산한다. 지식 수준 높은 교인들이 이제는 스스로 성서를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한다. 상호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 시대다. 목사의 역할은 위에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간에 일치(코이노니아)를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학 말고도 인문학 등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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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부를 열심히 할것. 가령 이미 출간된 시인들의 최근 시집을 비롯 시작법, 시 이론서, 시 평론을 집중해서 읽을것. 특히 우리고장 출신 시인들의 시집, 시, 동인지들을 꼼꼼히 읽은 후 시평 습작을 한다.  비록 시를 쓰지는 않지만 시인 중심인 '석조' 동인 활동을 좀더 적극적으로 하고, 동인들의 시를 자주 읽는다. 나아가 매월 열리는 동인모임에 시평 한 편씩 제출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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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나르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영화화 한 로베로 베르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는 불신과 신앙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사제가 주인공이고, <무셰트><당나귀 발타자르>는 그리스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안드레이 류블료프><희생> <향수>에서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배경으로 그리스도적 주제를 영상화 했다면,브레송은 과장되지 않은 연기, 비장식적인 화면, 무겁고 느린 동작, 특이할 것 없는 일상 가운데서 주제를 구현한다. 그리고 주제 하나만으로 본다면, 브레송의 흑백화면은 지극히 타르코프스키적이다.

2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에서 신은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고, 절망 가운데서 신의 응답을 고대하지만 결국 무거운 침묵과 어두운 회의가 화면 가득하다. 이런 주제는 베르히만의 <제 7의 봉인>외에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반면에 브레송과 타르코프스키는 베르히만과 달리 신의 응답 대신 '자기 십자가' 를 강조한다. 따라서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브레송은 베르히만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셈이다. 탐색과 회의가 끝난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기 때문이다.

 

3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관념화된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묘사함으로써, 예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을 참된 신앙으로 이끌려는 소설인거다. 한때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금서 처분을 받았지만 카잔차키스는 결코 예수를 부인하거나 무신론을 피력하지 않았다.

 

소설 <최후의 유혹>은 <택시 드라이버>를 감독한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예수를 욕망과 구원에의 열망 사이에서 번뇌하는 인간을 그려낸 카찬차키스의 소설은, 스콜세지의 영화에서 적나라한 예수의 섹스 장면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바 있지만 가장 세속적인 공간에서 종교적 구원을 갈망해온 스콜세지의 내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영화는 타이틀 백을 통해, 소설의 한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시작된다.

 

"신에 도달하려 하는 인간적이고도 초인적인 면모.....그리스도의 이런 이중적인 본질이 내게는 항상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젊은 시절부터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영과 육의 끊임없는 투쟁이었으며 내 영혼은 그 두세력이 부딪치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다른 영화로는 <성난 황소><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등이 있는데,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일류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원작자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유명한 터이니, 분명 영화 역시 잘 만들어 졌을거라 짐작된다.

 

4

기독교 문학은 단순히 기독교를 옹호하고 전파하는게 아니라 '인간 탐구' 라는 점에서 <최후의 유혹>은 정확히 '기독교 문학'에 해당한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투쟁의 기록- 기독교적 범주- 을 넘어서서 인간 삶의 보편적 주제로 확산된다.

 

가령 누군가가 " 나는 그릇이 적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혹은 능력이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 그래도 좋으니 너의 한계를 넘어서라, 그리고 투쟁으로서 맞서라"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5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 있다.  "탠대로 산다".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다가 간다라는 거다. 아마 자라면서 주위 어른들이 한 말을 기억한 것일텐데, 일종의 숙명관이거나 운명적인 삶의 태도이다.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주인공 엠마나 샤를르의 인생관은 숙명론적이다. 특히 엠마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난을 얼마든지 타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자포자기 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압권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엠마가 자살한 후, 비통한 심정에 빠진 샤를르는 과연 누가 아내와 불륜관계를 맺었는지 알고자 한다. 우연히 로돌프가 그 주인공임을 안 샤를르는 어느날 루돌프와 대면하게 된다.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로돌프가 엠마의 죽음에 대해 연민의 태도를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 운명탓이지요"

 

인간역사의 대부분은, 특히 문명의 발전은 역경과 맞서 투쟁한 결과물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든 한 소시민의 개인사이든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이가 낭만적인 가치관, 이상주의적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정도 자라는과정의 환경에 기인한 탓이거나 유적적, 성격적 요소가 크다. 그리고 이런것들을 달리 표현하면 운명관, 숙명관이다.

 

6

소설을 영화화할 경우, 우리는 본능적으로 원작과 비교한다. 원작의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감독은 어떻게 원작을 재해석했을까. 원작을 그대로 옮겼을까. 아니면 전혀 다르게 해석했을까. 어떤 장면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을까. 등등 감상자들의 궁금증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영화와 소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영화는 영상이미지로 표현되고, 문학은 언어로 표현된다는 상식적인 차이말고도, 다음의 몇 가지 사실 때문이다.

 

첫째, 영화는 연출자에 의해 해석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미 출발부터 원작과 차이가 있다. 둘째, 언어예술인 문학을 영상으로 백프로 드러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작을 본의아니게 왜곡, 생략, 압축할 수밖에 없다. 셋째, 제한된 상영시간으로 인해 문학작품의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내용, 화자의 독백, 사상 등을 영상으로 옮기가 쉽지 않다.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의 가장 큰 특징은 연극적 구성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현실에서 보는 사실적인 모습이기 보다 연극적 과장된 몸짓으로 나타난다. 가령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의 업무 장면에서 사무직원 무리가 동일한 동작으로 일어섰단 앉았다 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오블론스키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업무, 분주한 업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이것은 사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연극적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조 라이트의 영화는 스펙타클한 장면이 특징인데 <안나 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다. 제정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댄스파티, 오페라 극장 등은 규모면에서 방대하고 호화롭기까지하다. 하지만 역시 원작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영화의 대부분을 안나 카레니나와 블론스키에게 맞추다보니 레빈과 키티 커플의 비중이 가볍게 다뤄졌다.

 

또한 톨스토이의 분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레빈의 당대 제정 러시아에 대한 견해, 비전, 비판 등이 배제되었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의 불륜이 가장 큰 사건이자, 소설의 중심 스토리지만 작가가 바라본 당대 사회의 혼란된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그런데 영화는 안나의 비극적인 사랑에만 촛점을 맞추다 보니 원작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게된다.

 

7.

요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읽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현재 2부(문학동네판 1권 305쪽)를 읽고있는데, 스토리가 정말 재밌군요. 브론스키와 안나의 사랑은, 글구 이들의 불륜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레빈과 키티는 과연 부부가 될 수 있을런지....뭐랄까, 흥미만점의 연애소설을 읽는 기분? 읽기 전엔 분량이 많아 좀 지루하지 않을까, 스토리 중간에서 헤매지는 않을까 염려했더랬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이네요. 워낙 재밌어서 분량 줄어드는게 아까울 지경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만으로도 빠듯하지싶은데, 자세히 이해하고픈 욕심에 몇 가지 책을 곁들여 읽고 있습니다. 이인호 교수의 <러시아 지성사연구>, 민족주의 연구의 대가인 한스 콘의 <현대 러시아 그 갈등의 역사>, 랴자노프스키의 <러시아의 역사>, 게오르기 프리들렌제르의 <러시아 리얼리즘론> 등인데, 우선은 작품 배경인 19세기 러시아 정치, 역사 및 지성사를 알기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주류인 리얼리즘, 즉 뿌쉬킨 이후 러시아 리얼리즘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알아보고싶어서입니다.

 

물론 위 책 전체를 통독하려는건 아니고, 참고할 부분만 드문드문 읽고 있죠. <안나 카레니나>를 모두 읽고나면 조지 스타이너의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두 작가의 특징을 섬세하게 서술한 스타이너의 책은 톨스토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죠.  아~ 한 편의 소설이 이토록 생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니, 다람쥐 챗바퀴마냥 반복되는 일상에 이토록 팽팽한 긴장감을 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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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길문고에 들러 최근 출간된 프루스트 안내서를 한 권 구입했다. 앙투완 콩파뇽,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 8명이 공저로 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2017, 책세상, 길혜연 옮김). 보다시피 여러 명의 프루프트 연구가들이 주제별로 쓴 공동 저술인데,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 일반 독자를 위한 일종의 프루스트 안내서이다. 잠깐 주제를 소개하면 시간, 등장인물, 프루스트와 사교계, 사랑, 상상의 세계 등등이다.

나는 수년전부터 프루스트를 읽고자했지만 몇 번이나 도중에서 포기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도 왜 그에게 미련이 남을까.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내 자신도 궁금하다. 신비감? 난해성? 불후의 고전? 하지만 딱 맞는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 그냥 나도 모르게 끌린다고나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설서, 안내서 등을 여전히 구입하는 것은 언젠가 기필코 읽어내리라는 희망감때문일 것이다.

글쎄, 그게 언제일지, 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전인가 아닌가조차 극과 극으로 찬반이 나뉘는 실정에서 과연 이 책을 읽어야만하는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미련이 완전히 없어질때까지 책 구입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하긴 누가 알겠는가. 이번 책을 통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독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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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세상, 인생길, 오늘, 여전히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나를 누가 구해줄 수 있나? 잠시 마르셀 프루스트에게서 작은 위로를 구해본다.

2
어떤 기회에 우연히, 아주 우연히 작은 행복이 내게 닥아왔을때 느낄법한 심정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귀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 우네 인생길은 행복보다 슬픔과 연민스러움, 노고가 더 많다. 그런 삶을 프루스트는 원래 그랬던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떤 대상에 대한 기억은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모든것이 기억되고 회상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대부분 이미 죽어버린 것이므로. 그와달리 내가 잘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 그것만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억해서 오늘의 시간에 되살려 놓을때 그것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현실이 되고, 순간의 실존에 이르게된다.

3
글쓰기의 원리란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리기, 그래서 그것들을 오롯이 현실에 불러들인다. 바로 그 순간 과거는 오늘 되살아난다. 그래서 푸코는 말했다. "우리는 죽어간다. 남아 있는 것은 글쓰기의 모험뿐"이라고.

4
이 세상에서 나는 사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속한다. 어떻게? 이 세상은 내 몸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죽으면 그 순간 나는 무가 되므로 세상 역시 무가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승이 나보다 더 영속 할 수 있을까보냐?" 라는 문장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허무의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가 죽은 후에도 자연은 그대로 존재하고 세상은 변함없이 게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자연과 세상은 나라는 존재와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므로 내가 살아서 평소 인식하던 자연과 세상이 아니다. 오로지 내가 살아 있을때만 관련짓는 것이므로. 따라서 현재의 세상은 내가 유일하게 살아있을때만 존재하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순간만이 나에게는 전부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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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여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를 관찰할 충분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곁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의 부재와, 그녀를 다시 만나지못할 위험이 그녀에게 매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같은 여인의 매력은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숨어버림으로써 극대화된다. 또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은 한결같이 까다로운 여인들, 다시 말해 곧바로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곧바로 알 수 없는 여인들이다. 우리와 그녀들 사이의 거리는 넘을 수 없을만큼 크며, 그리하여 그녀들의 삶은 미지의 것으로 둘러싸인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매력은 화자에게 거리를 두고서만 나타나며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 이성복 <프르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6
프루스트 경우 '정신'이 시간의 저장소였다면 영화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함께 저장되는 곳이다. 영상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투영한다. 그것은 경이요 아름다움이고 슬픔이다. 그 미적 공간 속에서 나는 삶을 바라보거나 때로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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