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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영화화 한 로베로 베르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는 불신과 신앙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사제가 주인공이고, <무셰트><당나귀 발타자르>는 그리스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안드레이 류블료프><희생> <향수>에서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배경으로 그리스도적 주제를 영상화 했다면,브레송은 과장되지 않은 연기, 비장식적인 화면, 무겁고 느린 동작, 특이할 것 없는 일상 가운데서 주제를 구현한다. 그리고 주제 하나만으로 본다면, 브레송의 흑백화면은 지극히 타르코프스키적이다.
2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에서 신은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고, 절망 가운데서 신의 응답을 고대하지만 결국 무거운 침묵과 어두운 회의가 화면 가득하다. 이런 주제는 베르히만의 <제 7의 봉인>외에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반면에 브레송과 타르코프스키는 베르히만과 달리 신의 응답 대신 '자기 십자가' 를 강조한다. 따라서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브레송은 베르히만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셈이다. 탐색과 회의가 끝난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기 때문이다.
3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관념화된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묘사함으로써, 예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을 참된 신앙으로 이끌려는 소설인거다. 한때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금서 처분을 받았지만 카잔차키스는 결코 예수를 부인하거나 무신론을 피력하지 않았다.
소설 <최후의 유혹>은 <택시 드라이버>를 감독한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예수를 욕망과 구원에의 열망 사이에서 번뇌하는 인간을 그려낸 카찬차키스의 소설은, 스콜세지의 영화에서 적나라한 예수의 섹스 장면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바 있지만 가장 세속적인 공간에서 종교적 구원을 갈망해온 스콜세지의 내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영화는 타이틀 백을 통해, 소설의 한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시작된다.
"신에 도달하려 하는 인간적이고도 초인적인 면모.....그리스도의 이런 이중적인 본질이 내게는 항상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젊은 시절부터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영과 육의 끊임없는 투쟁이었으며 내 영혼은 그 두세력이 부딪치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다른 영화로는 <성난 황소><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등이 있는데,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일류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원작자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유명한 터이니, 분명 영화 역시 잘 만들어 졌을거라 짐작된다.
4
기독교 문학은 단순히 기독교를 옹호하고 전파하는게 아니라 '인간 탐구' 라는 점에서 <최후의 유혹>은 정확히 '기독교 문학'에 해당한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투쟁의 기록- 기독교적 범주- 을 넘어서서 인간 삶의 보편적 주제로 확산된다.
가령 누군가가 " 나는 그릇이 적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혹은 능력이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 그래도 좋으니 너의 한계를 넘어서라, 그리고 투쟁으로서 맞서라"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5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 있다. "탠대로 산다".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다가 간다라는 거다. 아마 자라면서 주위 어른들이 한 말을 기억한 것일텐데, 일종의 숙명관이거나 운명적인 삶의 태도이다.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주인공 엠마나 샤를르의 인생관은 숙명론적이다. 특히 엠마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고난을 얼마든지 타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자포자기 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압권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엠마가 자살한 후, 비통한 심정에 빠진 샤를르는 과연 누가 아내와 불륜관계를 맺었는지 알고자 한다. 우연히 로돌프가 그 주인공임을 안 샤를르는 어느날 루돌프와 대면하게 된다.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로돌프가 엠마의 죽음에 대해 연민의 태도를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 운명탓이지요"
인간역사의 대부분은, 특히 문명의 발전은 역경과 맞서 투쟁한 결과물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든 한 소시민의 개인사이든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이가 낭만적인 가치관, 이상주의적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정도 자라는과정의 환경에 기인한 탓이거나 유적적, 성격적 요소가 크다. 그리고 이런것들을 달리 표현하면 운명관, 숙명관이다.
6
소설을 영화화할 경우, 우리는 본능적으로 원작과 비교한다. 원작의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감독은 어떻게 원작을 재해석했을까. 원작을 그대로 옮겼을까. 아니면 전혀 다르게 해석했을까. 어떤 장면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을까. 등등 감상자들의 궁금증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영화와 소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영화는 영상이미지로 표현되고, 문학은 언어로 표현된다는 상식적인 차이말고도, 다음의 몇 가지 사실 때문이다.
첫째, 영화는 연출자에 의해 해석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미 출발부터 원작과 차이가 있다. 둘째, 언어예술인 문학을 영상으로 백프로 드러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작을 본의아니게 왜곡, 생략, 압축할 수밖에 없다. 셋째, 제한된 상영시간으로 인해 문학작품의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내용, 화자의 독백, 사상 등을 영상으로 옮기가 쉽지 않다.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의 가장 큰 특징은 연극적 구성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현실에서 보는 사실적인 모습이기 보다 연극적 과장된 몸짓으로 나타난다. 가령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의 업무 장면에서 사무직원 무리가 동일한 동작으로 일어섰단 앉았다 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오블론스키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업무, 분주한 업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이것은 사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연극적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조 라이트의 영화는 스펙타클한 장면이 특징인데 <안나 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다. 제정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댄스파티, 오페라 극장 등은 규모면에서 방대하고 호화롭기까지하다. 하지만 역시 원작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영화의 대부분을 안나 카레니나와 블론스키에게 맞추다보니 레빈과 키티 커플의 비중이 가볍게 다뤄졌다.
또한 톨스토이의 분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레빈의 당대 제정 러시아에 대한 견해, 비전, 비판 등이 배제되었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의 불륜이 가장 큰 사건이자, 소설의 중심 스토리지만 작가가 바라본 당대 사회의 혼란된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그런데 영화는 안나의 비극적인 사랑에만 촛점을 맞추다 보니 원작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게된다.
7.
요즘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읽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현재 2부(문학동네판 1권 305쪽)를 읽고있는데, 스토리가 정말 재밌군요. 브론스키와 안나의 사랑은, 글구 이들의 불륜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레빈과 키티는 과연 부부가 될 수 있을런지....뭐랄까, 흥미만점의 연애소설을 읽는 기분? 읽기 전엔 분량이 많아 좀 지루하지 않을까, 스토리 중간에서 헤매지는 않을까 염려했더랬습니다만 천만의 말씀이네요. 워낙 재밌어서 분량 줄어드는게 아까울 지경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만으로도 빠듯하지싶은데, 자세히 이해하고픈 욕심에 몇 가지 책을 곁들여 읽고 있습니다. 이인호 교수의 <러시아 지성사연구>, 민족주의 연구의 대가인 한스 콘의 <현대 러시아 그 갈등의 역사>, 랴자노프스키의 <러시아의 역사>, 게오르기 프리들렌제르의 <러시아 리얼리즘론> 등인데, 우선은 작품 배경인 19세기 러시아 정치, 역사 및 지성사를 알기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주류인 리얼리즘, 즉 뿌쉬킨 이후 러시아 리얼리즘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알아보고싶어서입니다.
물론 위 책 전체를 통독하려는건 아니고, 참고할 부분만 드문드문 읽고 있죠. <안나 카레니나>를 모두 읽고나면 조지 스타이너의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두 작가의 특징을 섬세하게 서술한 스타이너의 책은 톨스토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죠. 아~ 한 편의 소설이 이토록 생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니, 다람쥐 챗바퀴마냥 반복되는 일상에 이토록 팽팽한 긴장감을 줄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