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적 호기심을 무한정 갖고자해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제한적이니 효율성을 따져봐야한다. 가령 어떤것을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할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등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열정이 하늘을 찌를듯해도 이 나이까지 철학, 역사, 문학으로 마구 퍼져가는건 한계가 있다. 문학의 경우조차 고전부터 현대, 또 외국문학이라면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 등 그 대상을 어데까지 국한할 것인지 정해야한다. 그렇잖아도 아마추어는 피상적이고 얕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정도 한계치를 정하지 않으면 괜한 땀과 시간만 낭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구잡이 맘 내키는대로 할 수 없잖겠는가? 

2
고려 대상의 첫 번째 조건은 우선 '현재'다. 우리시대의 당면한 문제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어떤 문제, 나아가 우리에게 어떤 문제인가. 또 문제가 설정되었다면 그것의 해결은 당장 눈앞에서 이뤄질 수 있고, 몇 달, 때로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또 하나는 균형감각. 그러기 위해서는 한 손에 신문을, 다른 손에 예술을 들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 

3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전에 조짐이 나타나고 예견되지만, 때로 돌발적일 수도 있다.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예멘난민' 이 대표적이다. 왜 개인은 이타적인데, 집단은 그렇지 못할까. 바로 제주도와 예멘난민의 갈등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문제랄 수 있는데, 그래서 이기적 성향의 집단문제를 집중 파헤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를 먼저 훑어보고 있다. 


오늘 감상한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황새의 정지된 비상>도 다름 아닌 '난민'이 주제다. 공교롭게도 우연히 본 영화인데, 난민 문제를 이렇게 절절하고 심도있게 다뤘을 줄이야! 신문, 책과 영화를 몇 번 더  읽고 보다보면 문제 해결의 단서가 나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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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태생인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1991년작  <황새의 정지된 비상>은 경계선을 두고 떠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난민들을 다룬 영화다. 배경은 허가를 기다리는 난민들이 모여있는 그리스 국경지대 마을. 이 마을의 별칭은 대기실’인데,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이 허가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마을에 난민을 취재하고 있는 한 저널리스트(아디노도로스 프라우살리스)가 찾아온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움직인다. 국적과 민족은 물론이고 나이, 성별, 종교까지 모두 다양한 이들이 대기실까지 밀려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 죽음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지난 삶의 모든 것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안정적인 삶과 재산뿐만 아니라 떠나온 그 곳에 대한 감정과 기억들까지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안전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어두운 밤 도망치는 그들을 비추는 달이 없어지기를 바랄 정도로 절박하다. 생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가로막고 심지어 위협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이라는 경계선이다.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불법이 되고, 그들은 난민이 된다.


취재를 돕는 장교는 저널리스트를 국경으로 데리고 간다. 국경에 서서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며 여기서 한 발짝을 내디디면 그는 외지에 있게 되고, 경계를 넘은 사람이 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다리를 들고 균형을 잡기 위해 양 팔을 드는 모습은 마치 황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모습 같다. 하지만 황새는 자유롭게 날아갈 수 없다. 국경은 이들에게 함부로 넘을 수도 또 계속 남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죽음의 경계선이다. 바로 뒤에서 죽음이 몰려오기에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움직일 수도 없다. 경계를 두고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그들은 좌표를 잃어버린 채 고립된 대기실에서 부유한다.


그들 중 어느 누가 국경을 긋는 것에 동의한 적 있을까.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선이 그어지고 선을 기준으로 국적뿐만 아니라 삶 또한 규정된다. 국경은 단순히 국가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은 자신은 배신자가 아니라며 자해를 하는 쿠르드인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 시위하는 쿠르드인을 함께 보여준다. 쿠르드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그들에게 민족은 또 다른 국경이다. 민족, 종교, 성별과 같은 사회적, 개인적 기준들은 이처럼 하나의 경계선이 된다.

 

이러한 기준들은 너무나도 쉽게 개인 또는 집단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규정한다. 이러한 기준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는 기제로서 적용되어 그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편히 쉴 수 있는 에 도착하기까지 자신의 삶을 걸고 무수히 많은 국경을 넘어야만 한다. 요즘 국민적 이슈가된 제주도와 예멘 난민 갈등 문제를 푸는데 참고될 영화. (* 영화 스토리는 난민인권센터 홈페이지에서 인용) 


5

왜 독재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걸까. 왜 돈을 태산처럼 쌓으려는걸까. 나폴레옹은 수십만 대군이 죽어가는데도 왜 전쟁을 정당화 했을까. 왜 무한정 영토를 확장하려할까. 단순한 의문들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게한다. 병행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도 함께 읽는다. 그동안 번역은 '열린책판' 한 가지였는데, 최근 '문학동네'에서 새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각각 한 세트 3권씩 장편 분량이라 독파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 같다. 


6
지적 활동을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하기위해서는 샘솟는 열정과 함께 현실적인 환경이 중요하다. 그동안 트럼펫 연습, 영화감상은 옥상 컨테이너를 이용하다 두 달 전부터 서재가 있는 큰방으로 옮기고 서가 한 켠에 프로젝터와 스크린까지 구비했다. 이제 손만 뻗으면 독서, 음악, 영화감상, 트럼펫 연습 모두를 아무때나 한 공간에서 할 수 있다. 낙원이 별건가, 여기가 바로 우주이고 천국이니 여기서 이대로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7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를 보노라면 고대 그리스 인, 아니 인류의 위대함에 절로 찬탄이 나온다. 한데 어째서 현대 그리스는 그리도 별볼일 없는 국가로 전락됐는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썩어도 준치'라던가. 그리스가 바로 그렇다. '썩어도 그리스!' 비록 위대함과 명성은 예전과 비할바 못되지만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덕분에 영화와 현대문학 하나만큼은 어데 내놔도 손색이 없게됐다. 일당백! 현대 그리스는 이 둘만으로도 세계 영화사와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작가를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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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oent 2019-12-2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오는 1월 말 개봉하는 영화 <카잔자키스>도 추천드립니다~
 

1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온갖 의미로 풍성하고 유쾌하지 않다면 과연 내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물며 이미 지난 일들이야. 설사 과거가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점철되었거나 혹은 말못할 고통이었을지라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깨끗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수 없는게 우리네 삶이니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야 더욱 말할 필요 없겠다. 하여 지금 이 순간, 현재만이 전부일뿐.

2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구루'라 일컫고 아토스 산의 승려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하는 문제라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그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화살처럼 창공에서 힘을 얻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마치 모든 것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이라는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며 아침마다 새로와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장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 모든 울타리를 때려부수려고 조르바의 나이먹은 마음에서 회생의 힘을 분출해야 하던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뱃속보다도 더 깊고깊은 샘에서 쏟아져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3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그제와는 더욱 다르고, 내일과도 다르다. 수많은 날들 가운데 오늘은 유일하게 한 번뿐이다. 따라서 비록 어제 일을 되풀이하더라도 최소한이나마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순간 창조적으로 살아갈것. 오늘을 새롭게 창조할 것.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할것.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호기심, 강한 열망을 오롯이 간직해야 한다. 

4
죽는 순간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 재밌게 잘 살았다. 하고싶은것 다 해봤고 열심히 살았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자, 이제 휴식을 취할 시간이다. 하던 일 모두 미루고 긴 잠에 빠져들어야겠다.

5
<그리스인 조르바>의 핵심 주제인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비로 이것이다. 예를들어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이고,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

갈탄광 사업이 거덜 난 날,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 조르바는 바닷가에서 춤을 추었고, 책상물림인 '나' 즉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다. 이것을 두고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 ‘거룩하게 만들기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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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가 조르바한테서 배운 인생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르바주의(Zorbatism)’ 또는 ‘조르바 정신(Zorbahood)’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조르바주의나 조르바 정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실존주의와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화자는 조르바 학교에서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를 배운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니체나 베르그송한테서 배운 바 적지 않지만,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세례를 한차례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실존주의는 먹물 냄새 풍기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구체적인 삶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문학과 자주 손을 잡는다. 사르트르나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흔히 문학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주장과 태도를 표현하려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면 호메로스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주인공 돈키호테나 산초 판사 말고도 알베르 카뮈가 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그림자가 자주 어른거린다.

한마디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유럽의 가치관과 신념을 반성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이 작품이 많은 독자에게 그토록 신성한 충격을 주는 까닭은 작가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대안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알렉시스 조르바는 작가가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자유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조르바 학교’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조금씩 터득해 간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민음사판 해설에서 일부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모순적 열정이 만개한 작품이다. 1917년 만나 한동안 같이 생활했던 실존 인물 조르바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썼다.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배 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었다.”

조르바에 대한 서술에는 젊은 시절 그가 광포하게 빠져들었던 니체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그는 니체를 처음 읽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처음에 그는 나를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의 격렬함과 자부심에 비틀거렸고, 위기에 도취했으며, 마치 굶주린 맹수와 어지러운 난초들이 가득 찬 시끄러운 밀림으로 들어가듯, 두려움과 열망을 느끼며 그의 작품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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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감독의 전 작품을 감상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가장 끌리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른바 '광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에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에릭 로메로, 홍상수와 이창동은 바로 그런 감독들이다. 특히 홍상수의 경우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최근작인 <클레어의 카메라>까지 22편의 작품을 모두 감상했으니 국내외를 통털어도 유례없는 일이다.

 

며칠 간격으로 홍상수의 <클레어의 카메라>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감상했다.  다른 국내영화와 달리 홍상수는 대체로 반복 감상하는 편인데, 우선 한 번 감상으로 이해가 쉽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한편으로 그의 영화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 보다 더 사실 같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서 그렇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는 어떤 일이 비현실적일 때 영화 같다거나 소설 같다고 한다. 은연중 관객이나 독자들은화나 소설 속 세계가 허구이기 때문에 현실과는 다른 극적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들은 실제 보다 더 실제 같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렇다보니 관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이 오히려 더 낯설게 보이고, 나아가  그의 영화를 어렵게하는 것 같다.

 

가령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한 장면을 보자. 어느 모텔에 들른 유부녀에게 함께 온 소설가는 이렇게 말한다. " 다른데 보다 2만원이 싼데 참 아늑하지?"  여기에서 아마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 커튼 색, 방 안 분위기가 참 아늑하지?" 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2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만희(김민희)가 클레어(이자벨 위페르)에게 "당신은 왜 사진을 찍나요?" 라고 묻자 클레어는 "세상을 변화시킬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힌 사람은 그 전 사람과 다른 사람이 돼요" 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천히 다시 쳐다본다는 것은 피사체, 즉 현실 속의 대상물 혹은 사건에 대해 새롭게 의미부여하거나 해석하는 행위이고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 예술- 작가가 해석한 의미, 혹은 사건의 진실 - 은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이미 카메라에 찍힌 사람은 현실에서의 그 사람이 아닌 작가의 관점과 의미부여를 통해 새롭게 탄생했기 때문에 찍히기 전과 후는 서로 다른거다.

 

이 영화에서 클레어의 카메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려는 홍상수 감독의 카메라, 즉 영화를 뜻하지만, 이 점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비록 자연 속 말 없는 피사체일지라도 카메라로 포착하는 순간 원래의 피사체가 아니라 새로운 진실로 거듭나며, 이때 카메라는 진실을 발견하는 매체이자 도구이다.

 

3

두 감독 모두 영화형식이 워낙 독창적인데다 세상을 읽는 방식, 가치관, 영화미학 등 하나하나가 현저히 대조적이어서 똑같은 식재료를 사용하지만 막상 조리방법이 전혀 다른 조리사들의 창조적인 음식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한 쪽이 일상을 섬세하게 낱낱이 밝히려드는 현미경이라면 다른 한 쪽은 사회 전체를 멀리 조망하는 망원경’?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카메라는 편견없이 진실을 밝히거나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 혹은 방법을 뜻하는 일종의 메타포로 사용되고,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 태우기>을 버무린 <버닝> 역시 비유적, 은유적, 상징적 장치가 자주 등장한다.

 

알다시피 홍상수 감독이야 이른바 일상 속의 낯선 리얼리즘, 느슨한 플롯이 전매특허인데 비해 이창동 감독은 명확한 플롯, 스토리 위주의 리얼리즘이다. 하지만 <버닝>의 플롯은 한결 느슨하다. 아마 이런 점들이 두 작품 모두 관객들에게 작품의 이해를 어렵게 하지 않았을까싶고, 대체로 영화에서 비유와 상징, 메타포의 채택은 열린 해석, 열린 결말을 유도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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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카메라>도 그렇지만 <버닝>역시 한 번 감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두 작품 모두 두 번씩 감상했는데, 내킨김에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도 읽어봤다이쯤되면 뭔가 멋진 글이 써지지 않을까 궁리해봤지만 머릿속에 이미지 파편들만 난무하고, 이런저런 글감은 떠오르는데 막상 써지질 않는다. 꿩 대신 닭이라던가? 본격적인 글은 담으로 미루고, 우선 웹서핑하다 발견한 글 두 개와 이창독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기교적인 인생'을 살아가지만 결코 파멸하지는 않습니다. 어쩜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 하루키 식의 기교적인 인생을 꿈꾸며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먹고 살만한 직업, 몸매를 가꾸는 운동, 탄탄한 몸을 감싸는 세련된 옷, 이름과 재료만으로도 폼나는 요리, 재즈와 클래식...감미로운 외로움은 덤이구요. 이창동의 신작 <버닝>은 실재와 실재하는 않는 것, 혹은 추측의 애매성을 전면에 건 영화라고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하루키적 세계관을 불태워 버리는 이창동의 과격함으로 감상했습니다."

 

위 글은 영화 <버닝>을 분석했다기 보다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와 하루키의 소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버닝>을 말하면서 정작 타켓이 하루키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하루키 소설을 분석한 것이라면 공감하지만 <버닝>이라면 그렇지 않다. 다만 이 글이 눈길을 끄는 것은 막상 <버닝>을 비껴간 내용이지만 '비닐 태우기'가 아닌 하루키 소설을 불태운  이창동의 <버닝> 이라는 식의 재밌는 견해 때문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기이하리만큼 외톨이다. 타인과 외부 세계는 그에게 기척과 암시로서만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 역시 <밀양>이나 <>에서와 달리, 절망의 현상을 해부할 뿐 이 절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기를 삼간다. <버닝>의 지옥은 희망의 부재 자체보다 절망과 질투를 곧게 발설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종수는 현재 내가 뭘 하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느끼는 한국 젊은 남자들의 거울이고, 해미는 그가 남성으로서 품은 선망과 열패감을 직시하도록 벤 앞에 데려다주는 장치다."   

 

-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갖고 있는 미스터리한 부분을 영화적인 미스터리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적으로 우리 세상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겠다 싶었다.

 

소설에는 주인공들이 대마초를 피우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한 때 연극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에서는 종수가 아버지를 떠올리는 장면으로 바꿨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하루키가 쓴 <헛간을 태우다> 라는 제목은 그 보다 앞선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제목 <Barn Burning>에서 갖고 왔다.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는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그 아버지가 분노에 휩싸여 남의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가 소설에 나온다. 나는 바로 그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을 표현하는 데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다. 각각의 이유가 있다. 종교와 국적,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분노하는 세상이다. 그 중 특히 젊은이들이 마음에 품은 분노는 더 하다. 그런 분노 속에 현실에서는 무력감을 갖고 있다. 문제는 젊은이들은 이런 분노를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분노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거다. 요즘 세계의 문제가 바로 분노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데 있다. 세상은 점점 세련되게 변하고, 편리해지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다는 감정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닐하우스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한, 농사짓는 농촌에서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공간이다. 어린 나이에 종수가 바라본 비닐하우스는 마치 자기 자신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을 거다. 포르쉐는 비닐하우스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에 있는 설정이다. 바라고 원하지만 종수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그 어떤 것. 서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동네(극 중 서울 반포 서래마을)에 살고 있는, 게츠비처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 두 개의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는 자신의 공간이고 포르쉐는 분노의 상징일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인 코드는 물론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있다. 예술과 문화, 문학과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코드도 숨겨져 있다. 그걸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순하게 영화적으로만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도 단순하게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단순한 영화적 방식으로 느끼고 받아주길 바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남자의 대결로 보인다. 무력한 젊은이(종수)와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그러면서도 세련된 정체불명의 사나이(·스티븐연). 어쩌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두 인물간의 대결로도 보인다. 둘 사이에 놓인 여자는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를 혼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여자로 봤다. 저녁노을이라는, 그야말로 자연의 신비 앞에서 혼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 영화에 나온 그레이트 헝거처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이미지로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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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르방 교칙본 1권만 연습하다 오늘부터 2권 프레이징의 기법 편 <150곡의 클래식과 파퓰러 멜로디>을 시작했습니다. 150곡 모두 두 소절에서 네 소절정도의 짧은 소품들인데, 나름 연습방법에 변화를 시도해보는 셈이죠. 오늘은 우선 <Robin Adir> <Loving, I think of thee>두 곡을 해보니 생각보다 꽤 재밌군요. <연습일기>에서 말한대로 연습도 무조건 재밌게 하려고 말이죠. ^^ 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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