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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호기심을 무한정 갖고자해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제한적이니 효율성을 따져봐야한다. 가령 어떤것을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할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등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열정이 하늘을 찌를듯해도 이 나이까지 철학, 역사, 문학으로 마구 퍼져가는건 한계가 있다. 문학의 경우조차 고전부터 현대, 또 외국문학이라면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 등 그 대상을 어데까지 국한할 것인지 정해야한다. 그렇잖아도 아마추어는 피상적이고 얕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정도 한계치를 정하지 않으면 괜한 땀과 시간만 낭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구잡이 맘 내키는대로 할 수 없잖겠는가?
고려 대상의 첫 번째 조건은 우선 '현재'다. 우리시대의 당면한 문제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어떤 문제, 나아가 우리에게 어떤 문제인가. 또 문제가 설정되었다면 그것의 해결은 당장 눈앞에서 이뤄질 수 있고, 몇 달, 때로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또 하나는 균형감각. 그러기 위해서는 한 손에 신문을, 다른 손에 예술을 들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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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문제들은 사전에 조짐이 나타나고 예견되지만, 때로 돌발적일 수도 있다.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예멘난민' 이 대표적이다. 왜 개인은 이타적인데, 집단은 그렇지 못할까. 바로 제주도와 예멘난민의 갈등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문제랄 수 있는데, 그래서 이기적 성향의 집단문제를 집중 파헤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를 먼저 훑어보고 있다.
오늘 감상한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황새의 정지된 비상>도 다름 아닌 '난민'이 주제다. 공교롭게도 우연히 본 영화인데, 난민 문제를 이렇게 절절하고 심도있게 다뤘을 줄이야! 신문, 책과 영화를 몇 번 더 읽고 보다보면 문제 해결의 단서가 나올것이다.
4그리스 태생인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1991년작 <황새의 정지된 비상>은 경계선을 두고 떠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난민들을 다룬 영화다. 배경은 허가를 기다리는 난민들이 모여있는 그리스 국경지대 마을. 이 마을의 별칭은 ‘대기실’인데,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이 허가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마을에 난민을 취재하고 있는 한 저널리스트(아디노도로스 프라우살리스)가 찾아온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움직인다. 국적과 민족은 물론이고 나이, 성별, 종교까지 모두 다양한 이들이 대기실까지 밀려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 죽음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지난 삶의 모든 것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안정적인 삶과 재산뿐만 아니라 떠나온 그 곳에 대한 감정과 기억들까지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안전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어두운 밤 도망치는 그들을 비추는 달이 없어지기를 바랄 정도로 절박하다. 생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가로막고 심지어 위협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이라는 경계선이다.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불법이 되고, 그들은 난민이 된다.
취재를 돕는 장교는 저널리스트를 국경으로 데리고 간다. 국경에 서서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며 여기서 한 발짝을 내디디면 그는 외지에 있게 되고, 경계를 넘은 사람이 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다리를 들고 균형을 잡기 위해 양 팔을 드는 모습은 마치 황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모습 같다. 하지만 황새는 자유롭게 날아갈 수 없다. 국경은 이들에게 함부로 넘을 수도 또 계속 남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죽음의 경계선이다. 바로 뒤에서 죽음이 몰려오기에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움직일 수도 없다. 경계를 두고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그들은 좌표를 잃어버린 채 고립된 대기실에서 부유한다.
그들 중 어느 누가 국경을 긋는 것에 동의한 적 있을까.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선이 그어지고 선을 기준으로 국적뿐만 아니라 삶 또한 규정된다. 국경은 단순히 국가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은 자신은 배신자가 아니라며 자해를 하는 쿠르드인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 시위하는 쿠르드인을 함께 보여준다. 쿠르드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그들에게 민족은 또 다른 국경이다. 민족, 종교, 성별과 같은 사회적, 개인적 기준들은 이처럼 하나의 경계선이 된다.
이러한 기준들은 너무나도 쉽게 개인 또는 집단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규정한다. 이러한 기준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는 기제로서 적용되어 그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편히 쉴 수 있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자신의 삶을 걸고 무수히 많은 국경을 넘어야만 한다. 요즘 국민적 이슈가된 제주도와 예멘 난민 갈등 문제를 푸는데 참고될 영화. (* 영화 스토리는 난민인권센터 홈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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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재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걸까. 왜 돈을 태산처럼 쌓으려는걸까. 나폴레옹은 수십만 대군이 죽어가는데도 왜 전쟁을 정당화 했을까. 왜 무한정 영토를 확장하려할까. 단순한 의문들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게한다. 병행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도 함께 읽는다. 그동안 번역은 '열린책판' 한 가지였는데, 최근 '문학동네'에서 새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각각 한 세트 3권씩 장편 분량이라 독파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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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활동을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하기위해서는 샘솟는 열정과 함께 현실적인 환경이 중요하다. 그동안 트럼펫 연습, 영화감상은 옥상 컨테이너를 이용하다 두 달 전부터 서재가 있는 큰방으로 옮기고 서가 한 켠에 프로젝터와 스크린까지 구비했다. 이제 손만 뻗으면 독서, 음악, 영화감상, 트럼펫 연습 모두를 아무때나 한 공간에서 할 수 있다. 낙원이 별건가, 여기가 바로 우주이고 천국이니 여기서 이대로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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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를 보노라면 고대 그리스 인, 아니 인류의 위대함에 절로 찬탄이 나온다. 한데 어째서 현대 그리스는 그리도 별볼일 없는 국가로 전락됐는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썩어도 준치'라던가. 그리스가 바로 그렇다. '썩어도 그리스!' 비록 위대함과 명성은 예전과 비할바 못되지만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덕분에 영화와 현대문학 하나만큼은 어데 내놔도 손색이 없게됐다. 일당백! 현대 그리스는 이 둘만으로도 세계 영화사와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작가를 보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