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기로 실존주의 계열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고있다. 사실 실존주의는 철학보다 문학 쪽으로 접근하는 게 효율적인데, 실존적 인식은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실감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어제까지 멀쩡하던 이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 며칠 못산다든가,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해맨다고 해보자.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길경우, 아무리 이해해보려고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생이 합리적으로 설명 되지 않는다.

세상은 결코 어떤 질서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그동안 굳게 의지했던 신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게 된다. 철석같이 굳게 믿었던 것들이 단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너무 황당해서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상태, 이게 바로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부조리'(absurd)다. 

좀 진지하게 세상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무의미함과 부조리하다는 인식은 통과의례처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나는 20대초반무렵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간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의 문학작품을 비롯해서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셰스토프의 사상으로 뻗어나간다.  이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에게 설득당하면 필경 교회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대개는 니체를 기웃거리거나 마지막 관문인 하이데거에 도착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은 워낙 난해해서 중도 포기하고 대충 마무리한다. 그러다 점점 나이들면 세상살이에 푹 빠져 실존이고 부조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뒷전으로 팽개친다. 우선 눈앞의 먹고사는 일이 급급해서다. 

요즘 사르트르의 <구토>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주자격인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있다. - '존재의 우연성'을 깨닫는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과 세상의 부조리함에 눈을 뜨는<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쌍생아거나 사촌쯤된다 - 인생을 부정의 시각으로 본 <이방인>과 에세이<시지프 신화>를 먼저 읽고, 반대로 인생을 긍정한 <페스트>와 에세이<반항하는 인간> 등을 차례로 읽을 예정이다. 

어제 우연히 알았는데, 카뮈의 단편 <손님>을 영화화 한 다비드 욀오팡 감독의 <신의 이름으로>는 실존주의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 같다. 더 시간이 난다면 사르트르 철학을 전공한 변광배 교수의 저서, 이제는 고인이 된 박이문 교수의<문학과 철학>등 입문자들에게 사르트르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 몇몇 글도 함께 읽어보려 한다.

한가지 아쉬운건 <실존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조가경 박사의 저서는 워낙 한자가 많아 서재에 그냥 모셔둘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고 했다. 같은 의미에서 만약 검토되지 않은 종교를 믿는다면 우상이거나 미신일 확률이 다분하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라면 자신의 신앙이 보다 확고하기 위해서라도 실존주의의 세례를 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선다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겠지만 그렇지않고 습관적으로 그저 믿삽네다~ 만 연발하면 필경 현대판 부뚜막 신을 믿는거나 다를바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실존주의와 실존철학을 알아보려고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스케치만 하고 말았다. 물론 주요한 개념이나 핵심 요지는 알고 있지만 디테일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방인>의 뫼르소나 <구토>의 로캉탱,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제대로 이해한것은 아마 40무렵쯤이 아니었을까싶다. 어느덧 60중반 나이인 지금, 새삼 실존주의 문학을 읽으려는건 세상에 대한 실존적 고뇌거나 지적 욕구라기보다 마치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는 기분내지는 문학작품을 즐기려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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