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스터 선샤인>(24부작) 23부.  조선에 다시 돌아온 유진(이병헌)은 최포수 등 그간 작고한 이들의 무덤을 찾아 애도한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동행 은산(김갑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멀리 서해로 해가 지고 있었다. 무덤들을 배경으로 앉은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면서(음복) 나누는 대화다. 


유진: 전 여전히 조선의 주권이 어디에 있든 관심 없습니다.  그저 그 여인이, 제 은인들이 안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멀리 계속 가보는데 그 길이 자꾸 겹칩니다. 의병이랑.

은산: 비껴 가거라, 총 맞기 싫으면.

유진: 그랬어야 되는데 끝내 비껴가게 될 것 알면서도 온 생을 걸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나도 배멀미를 하는구나. (웃음) 그러니 잘 왔다고 해주십시오.

은산: (잠시) 잘 왔다, 이놈아.

유진: 죽지도 마시고요. 전 그것만 할 겁니다. 어차피 겹친 길.


#2. 잔잔한 물가(WATERSHIP DOWN)라는 점만 다를 뿐 <미스터 선샤인>(인용) 장면과 거의 유사한 앵글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애니메이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의 완결편인 4화(포위)의 마지막 장면. 앞일을 예지하는 능력을 가진 파이버(동생, 오른쪽)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헤이즐(형)이 나누는 대화이다.  '잘 자라고'는 곧 '잘 살았다고'가 된다. 


헤이즐슨 일이야., 흐레이루?

파이버별 일 아니야형이랑 잠깐 앉아 있고 싶었어대단한 길을 함께 걸어왔네정말 기뻤고 영광이자 특권이었어.

헤이즐:  관찮아, 파이버. 

파이버괜찮아. 잘 자라고 인사하러 왔어나의 리더이자 내 형내 친구, 굿 나잇~.


'흐라이루'는 작은 흐라이어'라는 뜻으로 토끼 파이버의 다른 이름이다.  원작인 책 속 '토끼어사전'에 따르면,  토끼는 넷까지 셀 수 있는데, 넷을 넘으면 무조건 흐라이어라고 한다.  '흐라이루'라는 이름으로 보아, 이 둘을 포함하여 한배(한 엄마)에서 태어난  형제들은 다섯 명이 넘었을 거라고 한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드라마)의 원작소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양장)는 아쉽게도 절판 상태. 언제이고 중고매장에 가면 구입 1순위 책이다. 


#3. 대체로 한 시즌이 8회분으로, 시즌1, 시즌2, 시즌3으로 이어 제작되는 서양 드라마와 달리, 어느덧 우리 드리마는 16회를 기본으로 완결되는 추세를 따르고 있다.  해서 16부작으로 아쉬운 드라마도 곧잘 등장하여 20부작으로 연장되기도 하는데 , K-드라마의 시대라고 해도, 16부작 정도의 이야기가 아닌데, 질질 끄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문에 24부작임에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미스터 선샤인>은 성공작이라 하겠다. 24부를 남겨놓고 있지만, 인용한 장면은 인용2의 두 주인공 토끼가 그간 이룬 성취를 회고하는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에 <미스터 선샤인>이 넷플릭스 서비스 덕분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애플TV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드라마 <파친코>의 선전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시대물로 두 드라마의 시간이 겹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주권이 어디에 있든 관심 없다.'는 유진의 태도에서, 소설 <파친코의 강렬한 첫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가 읽히기  때문이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단한 애국심이 있어, 참전하는 것은 아니다.  해질 무렵의 조선에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가온 현실에 응전하게 한다. 은산의 길과 유진의 길은 다른 듯하면서도 다르지 않았고, 그렇게 끝날 예정이다. 

'택지 개발로 위험해진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에 정착하기까지(1부), 이후에는 워터십 다운을 지켜내기 위한 무용담의 주인공 형제( 헤이즐과 파이버)가 나누는 대화,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과 오버랩이 된다. 



'읽기'보다도 '보기'가 익숙해진 때를 살아간다. 책의 길이 있고 드라마(영화)의 길이 있다. 하지만, 스티븐 킹으로 대표작가로 미국의 현대 작가들이 영상화를 전제로 작품을 썼다는 것과 헐리우드의 영광은 뗄 수 없는 상생, 하모니였다. 무슨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이 더불어 팔릴 수 있는 적기에, 독자들은 <파친코>(소설) 개정판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파친코> 개정판 출간 알림 신청을 하고 있다는 건 좀 그렇다. 1천원 적립(추첨), 안 되어도 상관없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도 신간을 구입할 수 있기를. 

자꾸만 작아지는 종이책 시장은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물의 '새롭게', '다시' 보기와  상호보완하면서 상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준비된 이들에게 온다.  

(소개한 드라마 컷은 핸폰 사진, 해당 화면을 직접 촬영했다. 상태가 좋지 않다. 그렇지만 한움큼 쥔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해질 무렵의 시간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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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는 각각 황소와 사람과 집을 만든 뒤 비난을 심사원으로 초청했다비난은 그들의 작품을 시샘하며 말했다먼저 황소가 어디를 떠받을지 볼 수 있도록 제우스가 뿔에다 눈을 달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했다프로메테우스 역시 사악한 자들이 숨지 못하고 저마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드러나도록 사람 마음을 밖에 매달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했다세 번째로 비난은악당이 이웃에 자리 잡고 살면 쉽게 이사 갈 수 있도록 아테나가 집에다 바퀴를 달았어야 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제우스는 그의 비방에 화가 나서 비난을 올륌포스에서 내쫓았다.

-<124.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와 비난> 전문,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정본 이솝우화』 145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우화의 '공식'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교훈)를 두 가지로 분리한다. 1)모든 것은 비난할 수 있다. 2)(말 그대로) 완벽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1)은 비난에게서 자유로운 타인은 없다. 곱씹을수록 무섭다. 그러니 신중하라. 2)는 그러므로 겸손하라, 한 발 물러서라. 그렇게 거리를 두고 사태(사건, 상황)를 바라보라.  비난의 대상(1))에서 벗어나기가 힘드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안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무지의 지)'고 역설하였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내 논리는 완벽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공략될 수 있는 성(城)이다-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산성(鐵甕山城)일 수 없다.  그렇게 말이든 행동이든 시작하는 것이 좋다, 라는 메시지다.  

'<...아테나와 비난>이다. 이처럼 '비난' 자체도 완벽할 수 없겠지만, 우화가 그럴듯이 비난은 단지 한 이름(단어, 개념)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비난'에게도 '인격'이 부여되어 있는데, 어린이일 때는 그렇게 여기지만 '머리가 굳어진' 어른들에게는 사라진 '인격'이 우화에는 있고, 있다고 여기기에 모든 우화는 어린이들이 주요 독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본문 속 '비난'이 견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제우스-황소]:  황소는 막무가내로 어디나 들이박아 과실치사(혹은 과실치상)를 하거나 무엇이든 파괴(핵무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항공사고 예방하려고 고층건물 일정한 높이에 부착하는 경고등처럼, 황소의 뿔에도 눈을 달았어야 한다.  자동차 후미 브레이크등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스스로 조심하고 한 발 물러서는 배려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사람] : 열 길 물속 알아도 한 길 사람속 모른다는데, 왜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느냐, 배려가 부족했다.  사랑은 하트(심장)이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해 상사병에 걸리고, 그로 인한 사건사고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것은 나는 이런 사람, 내 마음은 이래요, "누가 이 사람(나를) 모르시나요"처럼, SNS시대에는 심장(마음)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지적질 하는데 설득력 얻고 있다.  

[아테나-집] :  바퀴가 달린 집이  실현 되었지만,  층간 음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살기 위해 마련하고 살고 있는 집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느냐,  '캠핑카'나 '이동식 주택' 출현은 비난의 주장을 그저 비난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난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적인 존재가 창조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우스와 아테네는 12신클럽 멤버이고,  인간을 창조한 프로메테우스는 그들에게는 반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악의든 선의이든 요즘의 비난은 '댓글'에서 맹렬하게 활동 중이다.  그 방향이 좋은 쪽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 '비난'이 지금처럼 활성화된 적이 없다.  비난은 누가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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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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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그레이스』 첫 문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시즌1, 6화 완결)에는 원작소설이 있다.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 있다. 논픽션(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 그 임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지상정이라고 실제 역사는 매력 포인트,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선택에서,  이런 콘텐츠를 살피게 된다. 원작소설이  있나, 사실에 근거하였나. 탄탄한 스토리가 있다면  무작정 몰아보더라도,  발견 가능성이 높아  할애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것이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라면 금상첨화, 꽃 중의 꽃을 기대해도 좋다. 내게 소설  『그레이스』(Alias Grace), 드라마  <그레이스>(2017)가 그랬다. 드라마 전편을 시청하고 책을, 전자책을 구매했다.  <미리보기>의 소설 첫 문장에 꽂혔기 때문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최면시술의 결정적인 순간의 그 시그널처럼, 소설 첫문장이 중요하다는 건 새삼 강조할 필요 없다.  심리학자 등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중요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를 찾아가는 익숙한 장면, 때문에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다 드라마의 1/3 지점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백과도 같은 그레이스의 회고를 이끌어내고 그 기억을 따라가기에(시간 순) 드라마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레이스에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는,  키니어 나리 댁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풍경(드라마),  정원에 만개한 꽃이 장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그런데 '작약'은 소설 분문에 무려 열여덟 차례나 등장한다(전자책의 미덕). 권말 <옮긴이의 말>에도 한 차례 더 등장한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 한국어판은 두 권(그레이스1과 2),으로 출간(2012년)되었고,  드라마 오픈 시점의 개정판은 한 권으로 펴냈는데(2017년), 696쪽, 적지 않은 분량이다. 옮기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하였고 그 과정에서 옮긴이 나름의 '의견'이 없을 수 없는데, 이렇듯 자주 등장하는 작약에  대해 물음표 하나를 던질 뿐이다. 1843년  캐나다에서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미스터리 소설기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 그레이스 마크스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욕망을 파헤치는 심리 소설이다. 실화 바탕, 미스터리. 심리 소설이기 때문에 할 말은 있지만 말하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  소설 첫문장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13)

직유에 동원된 '뱀의 눈'이나 '공단(貢緞: 무문無文의 주자직물朱子織物)까지 언급할 시간은 없다. '헐거운 자갈을 뚦고  올라온' 작약에서 핀 꽃이 '산산이 땅으로 떨어지는' 낙하(落下) 혹은 낙화(洛花) 등 섬세한  묘사에는 소설의 주제와 연관된 뭔가가 있다. 뭔가 있지만 그 무엇을 무엇이라고 이름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문득 사라질 것 같은 뭔가가, 있다.  이쯤에서 저자(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화일을 잠시 엿본다. 

"1939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랐다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곤 했다이런 생활로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다.

하지만 독서에만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물과 생태에 대한 관찰력도 함께 갖추었다고 본다.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인 작약(芍藥; Peony root), 여러해살이풀로 5월이나 6월에 꽃이 피는데 색깔에 따라 홍작약과 백작약이 대표적이다. 이와  비슷한 때 잎이 나고 꽃을 피우는 사촌쯤 되는 식물이 있다. 모란(牡丹; Peony)이다.  역시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이다.  영어이름에서 보듯,  둘은 사촌 간인데 모란은 작약과 클라스가 다르다. 무엇보다 작약은 여라해살이 풀인데 모란은 낙엽 활엽 관목으로, 나무다.  모란은 잎이 지면 두툼한 가지들을 펼친 채 겨울을 난다. 봄이 오면 줄가에 새순이 돋아 자라고, 곧이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작약은 겨울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죽었다가)  자갈이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 틈새를 뚦고 새로운 줄기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 해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 

작약은 해마다 봄이 오면 오로지 땅 속 뿌리의 힘에만 의존하여 새싹을 틔우고 줄기를 형셩한다. 그래서 영어명에서 'Peony'에 'root'가 추가되는 것.  실제로 모란은 뿌리가 깊지 않아, 재배 시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이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재래종 모란의 실생묘나 작약을 대목으로, 9월에 접붙인다.  작약 대목은 활착률은 좋으나 수명이 짧고 모란 대목은 활착률을 나쁘나 수명이 길다.  야생의 고욤(산감나무)에 품종이 우월한 감나무 줄기를 접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질의 수확물(열매)을 위해 야생이 강한 종의 뿌리를 이용하는 것.  

들 다 화려한 꽃을 피우고, 뿌리를 약재로 쓰지만,  작약이  약용(藥用)이라면, 모란은  뿌리를 약재로 쓸 뿐 아니라 크고 화려한 꽃으로 유명하여, 화단이나 정원에 관상(觀想)용으로 재배하였다. 해서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고 화중지왕(花中之王)’ 혹은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향이란 뜻의 국색천향(國色天香)’ 등으로 불렸다.  꽃말에서도 모란은 '부귀왕자의 품격'인데 작약은 '수줍음'이다.  제대로 자란 모란은 상당히 큰 키를 자랑하며 봄이 오기 전부터 지난 해 꽃을 떠올리면서 기다리게 만든다. 그런데, 작약은 말라비틀어진 줄기마저 제거했다면 어디 심었는지, 어디에서 줄기가 솟구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해마다 낯설게 등장하기에 정작 본인은 늘 수줍어할 수밖에. 화단이란 공간에서 모란이 정규직이라면 작약은 비정규직쯤에 해당한다.  

자기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하녀이건만 선임이라는 이유로,  토머스 키니어 씨의 하녀 낸시는 안방마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나리의 정부이기도 하다. 키니어의 집에 도착한 그레이스의 눈에 낸시의 위치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같은 을이면서 갑질을 서슴지 않는 낸시, 이어지는 작약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렇다. 


"저는 작약을 곁눈질해요이상한 일이거든요지금은 4월이고작약은 4월에 꽃을 피우지 않아요그런데 제 바로 앞쪽 길가에 세 송이가 자라고 있지 뭐예요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한 송이를 건드려 봐요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나는데알고 보니 조화예요." 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 13

모란과 작약은 5~6월에 꽃이 피지만, 모란이 조금 앞서 개화기를 4~5월로 보기도 한다. 물론, 작가는 작약을 언급할 뿐 모란을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나리 댁에서 발견한 작약꽃 세 송이는 곧 조화(造花)로 판명되지만, 그해 4월 열여섯 살 손여 그레이스가 문득 마주친 작약꽃, 철 이른 작약꽃은 그녀의 눈에 실제의 모란꽃으로 다가왔으리라, 낸시의 존재감은 그랬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에서 모란은 부귀와 더불어 장수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회갑(요즘은 가족 행사지만)이나 칠순 등 장수를 기념하고 기원하는 행사(상차림)에는 주인공 뒷면에 모란병풍을 세웠다. 근래에 말이 많지만 홍도, 목포, 영산포(나주) 등 홍어가 특산물인 전라도 서남권에서는 피로연에 홍어가 없으면 잔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모란병풍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그런 역할을 했다. 이처럼 대접을 받는 모란의 영광 뒤에는 비교대상으로 작약이 있지 않을까?  그레이스는 첫직장은 친절한 부자인 파킨슨 저택이다. 여기에서 동료이면서 절친, 사수이며 한 침대를 쓰던 메리를 만나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만, 메리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레이스의 이직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요절한 메리의 장례식 풍경이다. 


"애그니스가 장례를 도와주었어요우리는 마님의 허락 아래 정원에서 딴 꽃을 관에 넣었어요. 6월이라 줄기가 긴 장미와 작약이 만발했는데하얀 꽃만 골라서 땄죠저는 시신 위로 꽃잎도 흩뿌리고 제가 만들어 준 바늘 쌈지도 관에 넣었어요빨간색이라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으니 몰래 넣었죠그런 다음 메리를 기억할 수 있게 뒷머리를 한 움큼 잘라서 실로 묶었어요."__7부 <지그재그 울타리> 169

이번에는 백작약이 등장한다. 안데르센의 단편 <빨간 구두>에서처럼 장례나 예배에서 빨간 색은 금기라, 작약도 흰 꽃잎만을 골라서 딴다.  홍작약, 백작약이지만 그래도 작약꽃은 빨간 색일 때 작약답다.  이제 이 소설에서 '작약'의 생태는 본래 의도했던 바, 외연을 확장한다.  


 "꽃이 아니면 좋겠는데……하지만 지금이 그 빨간 꽃이 자랄 철이다공단처럼 반짝이는물감을 뿌린 것 같은 빨간 작약그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텅 빈 공간과 침묵이다나는 나한테 뭐든 말 좀 해 봐 하고 속삭인다공단 같은 빨간 꽃잎을 떨어뜨리며 침묵 속에 느릿느릿 꽃을 가꾸기보다는 대화를 하는 게 낫다." __9부 <하트와 모래주머니> 215

꽃필 무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작약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 텅빈 공간과 침묵이다.  석방 이후 그레이스의 실제  삶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30년 넘는 수감 생활을 포함하지만 그래도 '작약'보다는 '모란'처럼 오래, 예기치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았다.  드라마에서도 나름 안정을 찾은 그레이스의 이후 생활상이 소개된다.  소설은 그 즈음을 이렇게 다룬다.  여기, 이제 '그녀의' 그림 같은 정원(풍경)에도 작약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열여섯이 안 된 나이로 나리 댁의 기다란 앞길을 처음 걸어 올라갔던 날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네요그때도 6월이었는데저는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 내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어요늦은 오후이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림 같아요. (중략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는 작약도 한창인데분홍색과 하얀색 변종이고 꽃잎이 아주 빽빽해요제가 심은 게 아니라 품종은 모르겠어요그 향기를 맡으면 키니어 나리가 면도할 때 썼던 비누가 생각나요. __15부 <천국의 나무>에서(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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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5-3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타님의 작약 과 꽃에 관한 설명을 읽으니
그레이스를 다시 읽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Meta4 2022-05-30 22:16   좋아요 0 | URL
모란은 제 설정이긴 하지만, 닮은 듯 닮지 않은 생태를 지녔지요. 두 번째 시녀 생황을 위해 그 집을 찾아가면서, 그레이스는 ‘메리처럼 살지는 않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있는 듯. 감사합니다.
 
게르마니아
타키투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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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가 살던 시대는 많이 알려졌지만막상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이 역사가는 라틴어로 말이 없다(tacitus)란 뜻의 이름에 걸맞게자신에 대한 말을 극도로 아꼈다.” _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그는 하버드대학교 고전학 교수로가장 위험한 책』 에서 타키투스를 정식으로 소개하는데, 그 첫대목이다. '가장 위험한 책'이란기원후 98년에 집필된 게르마니아』로, 부제는 '로마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 ‘제목도 서문도 없이 갑작스럽고 아이러니한 결말만 있는 30페이지(양피지)도 안 되는 소책자에서 작가는 숨을 수밖에 없다그러나 다른 방대작 분량의 저작에서도 작가는 자기 노출를 삼간다. 해서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 꼭지들의 글머리를 쓰듯 크레브스도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드라마 <바바리안>을 타키투스 활동 당시 지도와 함께 소개했다. 타키투스가 왜 자기 얘기를 극도로 삼갔을까하는 물음에서 글을 이어간다. 디테일한 보고서라기보다는로마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 게르만족에 대한 소논문 게르마니아를 왜 썼는지집필 동기를 엿보기 위해서다분량이 짧더라고 꼭 언급했어야 할 굵직한 사건이 있는데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일까? 

굵직한 사건이란 제국 로마가 게르마니아 완전정복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기원후 9년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다. 드라마 <바바리안>은 이 전투를 재조명한다게르마니아 후손들이 그들의 언어(독일어)로 독일 민족 영웅 아르미니우스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은 역사드라마다집필 이후의 역사 곳곳에서 그랬듯 게르마니아』는 이 드라마의  캐릭터세트(배경및 의상(분장등을 재현하는데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타키투스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스치는 정도로 (로마사의 일부로만) 언급할 뿐이다.  

그런데 독문학자로, 독일 유학 시절 오늘날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번역에서 독보적인 성을 쌓게 되는( 이 책을 최초로 원전번역한) 천병희 선생은, 주석과 옮긴이 서문 등에서  타키투스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  분량이 짧은 책이기도 하지만 옮긴이 주석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소개한 한 권의 두툼한 책이 책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60장 중 27(장례)까지게르마니족의 기원과 거주지(1~5), 각종 제도(6~15), 사생활(16~27)까지는 흥미롭게 읽힌다(1부). 2부라고 할 수 있는, 28~46장까지, 게르마니아로 부를 수 있는 부족들을 소개하는데내가 왜 이런 것까지 읽어야 하지,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데, 6부작 <바바리안>을 보고 나니 이 뒷부분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아르마니우스(아리)는  자신의 양부(養父)가 이끄는 로마군 17,18,19군단을 격파하기 위해 맨 처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케루스키족의 족장이 된다.  그리고 투스넬다와 결혼하는데 정치적인 선택이다투스넬다(드라마의 설정으로 본다)는 경쟁 관계의 부족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며, 아리와의 결혼도 그 연장선에 있다. 결정적인 순간동맹이 무너지려 하자 핏빛 희생을 하며 예언을 동원하는 등 위험을 무릅쓴다.  


드라마 <바바리안>에  언급되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 적극 참여한 주요 부족들은 다음과 같다

캇티족(83~86), 부룩테리족(88~89), 카우키족(92~93), 케루스키족(94~95), 킴브리족(96~99)

마르시족도 등장하지만, 별도(장)로 다루고 않는다.(2장 2절, 라인강의 지류인 루어 강과 리페 강 사이에 살던 게르만족, 주석, 지도 참고). 괄호 안은 게르마니아에서 소개되는 부족들의 해당 지면이다그런데 전투는 기원후 9년에 진행되었고타키투스는 98년경에 집필하였다. 소개한 지도상의 해당 부족들의 위치나 점유지가 드라마 속(실제 역사)의 그것과 다름을 알 수 있다어쨌든 해당 부족들은 언급한 대목들을 살펴보자. 그 부족들의 특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을 발췌했다.


*캇티족(30-31):두 장을 할애한다. “게르마니족치고는 판단력과 수완이 뛰어나 지도자들을 선출해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가 하면(83),“행운은 믿을 것이 못 되고믿을 것은 자신들의 용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83) ‘다른 게르마니족은 전투하러 갈지 몰라도갓티족은 전쟁하러 간다.“(84), ”청년이 되자마자 모발과 수염을 길게 기르며용기에 바친다고 서약한 이런 옷을 적을 죽일 때까지 얼굴에서 벗지 않는다.“(85)


*부룩테리족(33):동쪽의 토이토부르크 숲 쪽에서 라인강으로 흘러드는 리페 강 계곡에 살았다. 기원후 9년 바루스가 지휘하던 로마군이 전멸하다시피 했을 때 아르미니우스에게 협력했으며, 기원후 70년 바타이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연루되었다.(88면, 절멸된 부족, 옮긴이 주석으로 대체). 


*카우키족(35):게르마니아는 북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데(유틀란트 반도), 그 초입에 산다한쪽 끝이 캇티족 나라에까지 뻗어있다그토록 광대한 지역을 이들은 단순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채우고 있다(인구가 많다). 탐욕과 권력욕을 멀리하고 저들끼리 조용히 사는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으며이웃 부족들의 재물을 강탈하지도 않는다(그러나 필요할 때는 적극 참전한다).(92~93)


*케루스티족(36): 카우키족과 캇티족과 이웃이다. ”오랜 동안 지나친 평화를 누린 탓에 나약해졌다.“(94, 사실은 내분으로 약해져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옮긴이 주석에 따르면타키투스는 여기서 이 부족이 주축이 되어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족장 아르미니우스의 지휘 아래 로마군에 크게 승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기원후 90년경 캇티족에게 제압되어 왕이 추출되고 영토의 일부를 내준독립은 유지했지만 명망은 크게 줄어든,  케루스족의 근 황만을  (조롱하듯언급한다역사적인 전투를 이끈 지휘자가 이들 부족의 족장이었음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마니우스는 족장인 아버지가 로마와 공물을 부치는 조건으로 휴전하면서 보내야 했던 두 아들(인질) 중 하나다. 뒷통수를 맞은 로마 입장에서는 껄끄로운 존재이다. 


*킴브리족(Cimbri): 다른 부족보다 소개가 길다.(드라마에서는 시캄브리(Sicambri)족) 명성이 자자하던 부족은 지금은 작은 부족이란다. 기원전 113년 유틀란트반도에서 일어난 이 부족(민족)끊임없이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치명상을 입혔다타키투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슬쩍, 아우구스투스 황제1)에게서도 바루스2)와 함께 그가 이끌던 3개 군단을 빼앗아갔다.“(98)라고로마군 2만여 명이 전사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언급한다타키투스가 이 전투를 언급한 유일한 대목이다.


*1)아우구스투스 황제로마 초대황제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

*2)바루스(Varus). 아그립파의 사위로 기원전 13년 집정관을 지냄. 그가 이끌던 제17·18·19군단은 기원후 9년 현지인 출신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케루스키족 아리미니우스의 함정에 빠져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전멸하고 바루스는 자살한다최근의 발굴 결과 전투가 벌어진 곳은 오스나브뤼크 시 근처의 늪지대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이 전투로 로마군은 라인 강과 엘베강 사이의 점령지를 포기하고 라인 강 서쪽으로 물러났다.


타키투스는 왜 킴브리족을 소개에(케루스티족과는 달리)그들로부터 입은 로마의 손실을 가감없이 언급하는가? 기원후 39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큘라일명 작은 장화‘)가 이들을 크게 위협했다. 하지만 실제 싸우지도 않고 전투에서 이긴 것처럼 켈트족을 게르만족 포로처럼 끌면서 개선식을 했다. 로마사의 해프닝(笑劇)이었다. 기원전 83년에도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황제도 캇티족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승리했다고 개선식을 올렸다. 로마 입장에서는 치욕, 제국 역사에 울린 경종이었다. (게르마니아 )집필 시점에 가까운 역사라서 언급한 것일까로마와의 국경에 있는 캇티족은 당시 케루스티족을 사실상 지배하는 등 건재한 시력이었다. 또한 (당시는) 북쪽 변방에 있지만 킴브리족은 그들을 늘 위협하는 상수(常數)로 여겼음을 읽을 수 있다.


타키투스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논문을 썼는지의도는 확실하지 않다집필 당시 새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라인 강 국경 근처에 머물렀다(제위 기간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내는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리면..). 그에게 로마에 가장 위협적인 야만족은 게르만족이라는 사실을 알리고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논문을 썼으리라. 설득력이 있다도미티아누스는 로마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로마를 공포 정국으로 몰고 갔다. 96년 그가 암살당하자 로마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타키투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언론의 자유를 되찾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하필 게르만 민족의 기원과 관습"을 쓴 이유는? ”게다가 그 근처에 가 보지도 못했을“(가장 위험한 책) 타키투스가 말이다일리아스』 2권의 함선 목록처럼 게르마니아』 2부의 부족들 소개도 지루하게 느낄 수 있지만거듭 읽는 동안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함께 보는 동안 숨은그림찾기처럼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 아래는 현대 독일과 그 주변  지도.  위의 지도(스캔)는 아래  지도와 유사하게 트리밍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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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4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4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장과 집 거리가 가까운 구 씨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다. 서울이 계란(鷄卵)의 노른자라면 서울을 감싼 경기도는 흰자에 속한다, 그 비유 참신하였다. 이방인 구 씨를 품고 있는 염씨네_세 자녀는 경기도 끝자락 어디쯤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가 활동은 꿈, 결혼 적령기 넘기고 연애마저 자유롭지 않은 것도 주변에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재택근무인 구 씨는 남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대부분의 여가에 술을 사러 오가거나, 마시거나, 취해 있다. 좋게 말하면 애주가나 술꾼, 정확히 술중독이다. 변방에 살기(때문에)에 빠듯한 일상을 반복하는 세 자녀의 눈에 직장과 집이 너무 가까워 (덕분에) 술이나 마시는 구 씨의 대비되는 일상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전철역 부근의 편의점에서 소주 한두 병 혹은 두세 병이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가로등1이 내뿜는 빛이 끝나는 지점과 가로등2가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지점 사이를 지나는 구 씨. 소주병이 달그락거리는 음향 효과. 집으로 가는 대체로 어두운 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길에서 막내딸 미정은 구 씨를 발견한다.

염씨 부부를 포함하여 세 자녀까지 염씨네 일가와 구 씨가 하는 일의 공통점은 기다림이다. 그들은 무엇, 지금과 다른 어느 때의 무엇을 기다린다. 때로 그 무엇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단지 어떤, 특정할 수 있는 사람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소주 한두 병을 마시고 떨어지면 다시 24시간 편의점으로 한두 병의 소주를 사러 가는 구 씨(할인마트에 가서 한 박스를 사오세요 제발). 생존을 위해, 자기 계발 차원에서 시간 관리를 하는 이들에게 그는 0점짜리다.

미정은 지금과 다른 뭔가를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으며,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못마땅하여 기다리지 않기 위하여 도발적인말과 행동을 한다. 구 씨는 다른 듯 닮았다. 빈방에 그간 마신 소주병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그가 뭔가를 기다린다는 건 누구나 짐작하지만, 그는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술병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운 풍경에 집착한다. 기다림의 징표다.

염씨네 큰딸 기정은 리서치 회사의 중견간부다. 상사인 남자는 바람둥이인데 그 상대들이 하필 회사 여직원들이다. 좋지 않다. 그는 대상에게 로또복권을 선물하면서 작업을 시작한다. 로또는 토요일에 추첨인데 금요일 퇴근 무렵, 불금’의 시작 시점도 아니고 꼭 월요일에 대상(여인)에게 로또 복권을 선물한다. 여행의 참맛은  출발을 기다리는 시간에 있다. 두근거림. 늘 실망했으므로, 그 메커니즘 알기에, 로또 복권 구매는 부질없고 이성은 허락하지 않는다. (생략) 그런데 내게  금전적인 데미지는 없고 뭔가를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런 모티브를 제공하는 사람, 이제 그를 기다린다그는 이제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된다. 주식이든 비트코인이든 NFT이든, 기다림에 기댈 수 있는 뭔 그런 것. 이것들도 일종의 기다림의 대상이다.,

뭔가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뭔가를 걸고 싶은데 걸만한 것이 마땅치 않다. 기다리고 싶은데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어 열심히 역경 넘어 서 달린다. <달려라 메로스>처럼, 누군가 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1이 있을까?


<기다린다는 것에 대한 책들>

그러니까 달리는 것이다. 믿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 늦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목숨도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엄청나게 큰 무언가를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따라 와라! 피로스트라토스.”(234피로스트라토스는 왕의 인질이 되어 메로스를 기다리는 석공의 제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마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아정말 못 참겠어.)__1막에서, 에스트라공의 대사

블라디미르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엘라스트공 그건 그렇지.

블라디미르 아니면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사이 우린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야(134)





기다림이 가디림이라는 보증이 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오로지 그냥 기다린다. 그런 두 사람의 부랑자를 그려낸 희곡이 있다. 바로 사무엘 베케트(1906~1989)고도를 기다리며(1953년 초연).(171)

어떤 의미에서 달려라 메로스는 기다리게 하는 쪽의 괴로움을 그린 작품이다.(60(실제로) 다자이 오사무가 했던 것으로 보이는 말, ‘기다리는 쪽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쪽이 괴로울까?’라는 말도 세상이라는 우화 속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62기다리는 쪽은 그저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붕괴, 즉 자괴(自壞). 그런데 기다리게 하는 쪽은 기다리는 사람의 신뢰를 시련에 빠뜨린다.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동안 줄곧 타자를 해칠 가능성을 안고 있다.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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