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웃자고 한 소리가 실없이 던진 농담이 아닐 때가 있다. 웃음을 함유한 말(풍자)이 가진 힘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칼럼으로 문명비판을 신랄하게 하였는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초판 1995, 개정증보판 1990)이 대표적이다. 책은 에코의 『연어와 함께 여행하는 법』의 증보판인데, 마지막 옮긴이(이세욱) 글에서 흥미로운 발견이 있다. 에코는 자기 글이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들을 "매스미디어의 <계시>에 힘입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 있는 사람들"로 여겼다는 것. 나라 안팎에서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이 즈음, 에코가 살아있다면 어떤 일침을 가할까, <계시>마저 사라진 언론에 대하여!
기호학자이자 작가,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리스 비극의 미학을 입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후속편이, 곧 희극을 다룬 『시학2』가 세상에 나왔으나 극소수만 공유하고 있다, 금서를 숨기려는 세력과 발굴하려는 이들 사이의 갈등과 ‘전쟁’이 소설 『장미의 이름』 설정이다. 전문분야인 기호학과도 연관이 깊지만, 그가 장서(藏書)들 틈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소설을 흥미롭게 읽는 또 하나의 관점이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에 수록된 컬럼들. ‘책과 원고를 활용하기’, ‘서재에 장서가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 ‘공공도서관의 체계를 세우는 방법(1981)’ 등에서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곳곳에는 에코표 웃음 코드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시종일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꼭지만 고르라, 곤란한 주문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한 꼭지만 고르라면 <연극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아는 방법>(1988)이다. 에코는 세상에 없는 책을 다룬 책(『장미의 이름』 )을 썼다. 이 에피소드에는 문제작 『시학』(아리스토텔레스)이 극찬한(꽃 중의 꽃) 비극 <오이디푸스 왕> 관련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에코의 미국) 유학 시절, 필자(A)는 기숙사 문 닫는 시간(자정) 때문에 숱한 연극들을 처음부터 보면서도 딱 10분이 모자라 끝부분을 보지 못하였다.(A는 오이디푸스가 그 끔찍한 비밀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친구(B)를 만난다. 그도 학생이고 검표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B는 지각하는 관객들 때문에 극의 초반 10분쯤을 보지 못했다). 먼 훗날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대화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A(에코): 이제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얘기 좀 해봐
B(검표원 알바): 간단해 어머니는 목을 매고 그는 스스로 자기 눈을 멀게 하지
A: 안됐군. 하지만 결국 그건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거야.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했잖아.
B: 맞아 그런데 그는 어째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 그 점이 늘 궁금하더라고…….
A: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역병이 돌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왕이었고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B: 그런데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맞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A: 당연히 전혀 몰랐지! 그게 바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지.
B: 프로이드의 환자 얘기 같아. 자네가 오이디푸스라도 그들의 얘기를 곧이듣지 않을 거야.
천병희 옮김 <오이디푸스 왕>은 국내 공연에서 원전번역 텍스트가 그대로 대사로 사용, 공연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위 인용 부분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처럼, 이제 막 연극이 끝난(암전) 무대에서 (미리 녹음된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자네가 오이디푸스라도 그들 얘기를 곧이듣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