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 2020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우리피데스 비극들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전에 읽던 전집을 펼치니 밑줄과 메모 등이 거슬린다. 딱히 정답은 없는데, 책을 읽는 동안 스치는 생각들을 해당 페이지 해당 지점에 메모하는 습관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와 새롭게 만나야 하는데 기존의 생각/느낌이 프레임으로 다가오는 것. 큰 맘을 먹고, 개정판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전2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19편의 작품들을 마음이 가는 대로 골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어 군데 오자는 아니고 탈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다듬는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구나, 반가웠다. 이것이 개정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가독성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어 (10년 만에) 개정판을 만든다." 옮긴이가 '펴내며'에서 언급한 부분을 가볍게 보고 지나친 것. 우아해보이는 백조의 고단한 물갈퀴질을 떠올렸다. 무엇인 바뀌었는지,  가볍게 생각한 내가 문제였다. 살핀다. 글자 크기(급수)는 조금 키웠고, 그리드(글자가 배열되는 사각형) 크기는 그대로인 듯한데, 자간과 행간이 조정되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하드커버 전집을 구입하는데 가격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고충은 상당하다. 재고를 무시하고 새로 만들 수도 없고, 재고가 소진되는 시점에 개정판을 만들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한다는 얘기다.(때가 때인지라. 구입 6개월 만에 미루고 미루다 완독한『조국의 시간』에는 인명 하나를 인쇄하여 붙인 곳이 있다. 또 무슨 흠을 잡을까, 싶어 고민한 흔적인가, 문득 씁슬해지는 것이었다.) 

원전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천병희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오점이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번역은 원죄처럼  그런 한계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1판과 2판 전집을 일일이 대조할 수는 없다. 해서 나는 에우리페데스를 읽는 동안 별표 몇 개로 체크해놓은 부분만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왜 촉발되었으며 어떻게 소멸되었는지, 과감한 선택과 그 선택에 집중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이처럼 주제가 '분노'라서 이 전쟁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조차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리스 비극들은 좀 더 섬세한 터치로 이야기(일리아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이후 이야기를 무대에서 들려준다. 멸망한 트로이아의 왕비 헤카베는 오뒷세우스의 하인으로 살아가야 할 처참한 운명 앞에 서 있다. 그런 그녀에게는 딸(캇산드라, 아가멤논의 첩이 될)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딸은 폴뤽세네는 전사한 아킬레우스 무덤에서 제물로 바쳐지며, 이웃나라로 대피시겼던 어린 왕자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등 2차, 3차 가해 앞에 오열한다. 이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아래 인용 부분은 그 '순간'을 짚어낸다. 

비극 「헤카베」코러스는 포로가 된 트로이아 여인들이다.「헤카베」의 두 번째 정립가(오르케스트라에 위치한 코로스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부르는 노래. 선행 에피소드에 대한 성찰이나 감정을 표현. 나중에는 선행 에피소드와 무관한 막간가(幕間歌)로 변질된다) 세 단락 중 전반 두 단락이다. 왼쪽은 개정판(2판), 오른쪽은 1판의 해당 부분이다. 


「헤카베」 629~646행(제1판과 제2판 비교, 원전번역 제1판 1쇄 발행, 2009년 5월 10일)  


헤카베」 (2판 1,  2020.2.10.)

헤카베」 (1판 5,  2018.2.10.)

[코로스 좌]

나는 이미 불상사를 당하도록,

고통을 당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네.

알렉산드로스1)가 이데산에서,

바다의 심연 위를 지나 황금빛

찬란한 헬리오스2)가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의 침상으로 갈 배를

건조하려고 전나무를 베던 순간.

 

[코로스 우]

고생이그리고 고생보다 더 나쁜

강압이 나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네.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시모에이스3)  강 유역에

만인 공통의 파멸이타인들에 의한

고통이 덮쳤네이데산에서

목자4)가 신들의 세 따님 사이에서

시비를 가릴 때5)

[코로스 좌]

나는 이미 불상사를 당하도록,

고통을 당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네.

알렉산드로스가 이데 산에서,

바다의 심연 위를 지나 황금빛

찬란한 헬리오스가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의 침상으로 갈 배를

건조하려고 전나무를 베던 순간.

 

[코로스 우]

고생이그리고 고생보다 더 나쁜

강압이 나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네.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시모에이스 강 유역에

만인 공통의 파멸이타인들에 의한

고통이 덮쳤다네이데 산에서

목자가 신들의 세 따님 사이의

시비를 가릴 때.

1)과 4)파리스의 다른 이름.   2)태양신.   3)트로이아 옆을 흐르는 스카만드로스 강의 지류.   5)‘파리스의 판정을 말함(줄임).

주(註)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지정했다. 희랍어에 정통하고 우리말에도 능숙해야 좋은 번역인지를 관찰자 시점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다만, '이데 산->이데산'으로 바꾸는 것이야, 편집규범에 따르면 되는 것이지만, '사이의'->'사이에서'로 수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선택의 무게 중심이 달라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는, 것인가, '해주는' 것인가? 그 '순간'(위) 그 '때'(아래)의 주체가 파리스인가, 아닌가의 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국내 연극 무대에서 원전 번역 그대로 상연된 일이 있다. 특정 부분만을 선택하여, 무작위로 개정판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실험 결과이지만, 책은 움직이는 비석(碑石)과도 같은 것이라, 독자들이 알아주면 감사한 일이지만, 보다 완전해지는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생략한 '파리스의 선택' 주5)는 이런 것이다. 

"이른바 ‘파리스의 판정’을 말한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부모인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결혼식을 올릴 때 신들 중 하객으로 초대 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앙심을 품고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문구가 적힌 사과를 던진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서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제우스의 주선으로 당시 트로이아 근처의 이데산에서 목동으로 생활하던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가서 판정받게 된다. 헤라는 아시아를 통치할 권력을, 아테네는 전쟁에서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절세미인을 약속하는데, 파리스는 이 경연에서 아프로디테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 그 대가로 파리스는 헬레네를 아내로 삼게 되지만 함께 경연에 참가한 헤라와 아테네가 트로이아를 집요하게 미워하면서 결국 트로이아는 멸망한다. 특히 헤라는 트로이아가 멸망한 뒤에도 아이네이아스가 이끄는 트로이아의 유민들이 세운 로마를 미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