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두렵다고 죽이지 않아. 생명을 구하려고 죽이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위쳐> 시즌2(2화 20분 즈음)에 나오는 대사다. 상황에 따라 ‘워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시즌1에 이어 시즌2에서도 동일 메시지의 대사가 등장한다. ‘위쳐’란 마법이 만든 (인간의) 돌연변이. 세 주인공 중 하나로 ‘위쳐계’를 대표하는 게롤트가 '의외성의 법칙'으로 운명 지어진 시릴라 공주(시리)와 드디어 만나, 공주를 지키기 위해 위쳐들의 안식처인 케어모헨(집)에 이르고 (제거 대상이자 수입원인) 괴물들을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다.
시리: 훈련도요?
게롤트: 훈련은.. 위험해
시리: 검은 깃털 달린 투구 쓴 사람도요.
게롤트: 그자를 죽이고 싶니?
시리: 네
게롤트: 왜?
시리: 증오하니까요.
게롤트: 중요한 얘기다. 우린 두렵다고 죽이지 않아. 생명을 구하려고 죽이지, 알겠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을 기반으로 한 '위쳐'. 드라마는 게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기에 갖은 괴물들이 등장하고, 기묘한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는 등 판타지적 볼거리가 화려하고, 영상미도 기대 이상이다. 폴란드의 경제학자이자 소설가인 안제이 사프콥스키는 이 소설 하나로 단숨에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아직 원작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한 상태인데, 그것이 소설이건 게임 시리즈이건 드라마이건 앞서 인용한 대목에 이 작품의 핵심 주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린 (너희 인간들처럼) 두렵다고 해서 그 두려운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생명을 지켜내는 최후 수단으로 '죽임'을 선택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떠올린 한 권의 책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퀴디데스 지음)이다. 인류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실제 전쟁을 기록한 역사,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후로도 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는지를 간파한 ‘정세 분석’은 이 책의 백미(白眉)이며, 훗날의 독자들에게(인류) ‘경고한 바’는 지금도 유효하다. 특히 해양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배경에서 살아가기에 이 전쟁은, 그리고 전쟁사는 전율로 다가온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양 고전들 대부분을 원전번역한 놀라운 성과를 남긴 천병희 선생에게 그나마 번역상을 드릴 수 있었던 ‘작품’으로, 이 책을 다룬 책(각종 ‘리뷰’를 포함)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라디오 인문 강연으로, 그 강연록을 반영한 강유원의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라티오, 2장, 2021년 11월)는 ‘전쟁사’를 읽기 전후에 살필 책으로 추천할 만 하다. 간명한 정리가 돋보인다.
두 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헬라스(그리스) 세계는 30년 평화조약을 맺어 전쟁 억지력을 유지하고 있다. 해양세력(해군)을 기반으로 한 아테네 중심의 아테나이 동맹과 육상세력(육군)이 주축인 라케다이몬이 중심인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팽팽한 긴장. 이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한 상태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이런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는 텍스트가 바로 전쟁사의 전반부이며, 곳곳에 같은 맥락의 진단이 등장한다. 정리하고 요약해서 소개하기가 힘들 만큼 텍스트 자체가 명료하다)
”그런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둘 다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적대감은 상승한다. 공포가 쉽게 적대감으로 번지는 것이다. 일종의 '덫'에 빠진 상태다. 이 덫에 걸리면 공포가 안보 불안을 불러오고 상대방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면서 급기야는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숙명론에 빠지기 쉽다.“(앞의 강유원의 책, 36-37면 요약)
상대방(세력)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가 되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처음엔 사소한 듯 보이는 분쟁이 불씨가 되어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에 빠진 것이다.
『예정된 전쟁』(세종서적, 2018.1.31.)은 '투키디데스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을 세력의 중심으로 대결하는) 국제정치판의 상태와 사태를 진단하였다.
치르고 난 이후 생각하면 인류사의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은 무척 원초적인데, 먹거리(경제) 문제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거친 산악지역이라 몇몇 특산(과일)물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식량(곡물)을 자급자족하기 힘든 아테나이 제국에게 제해권(制海權)은 생명줄이었다. 이 점을 간파하고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그리스의 영광을 이어가고자 한 정치지도자가 페리클레스다. 그가 죽은 다음 차세대 지도자로 등장한 클레온도 이 정책을 지지했으며, 알키비아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연설도 이 맥락에 닿아 있다. 농업생산이 나라 경제의 기반인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에게 제해권을 잡고 날로 페르시아 연안에까지 지중해 곳곳에 식민시를 세우며 팽창하는 아테나이 동맹은 불안감을 부추기고, 아테나이 동맹 입장에서도 그들의 근간인 육지에 잠재적인 적을 남겨둔 채 해외 진출에만 집중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아테나이의 영광은 제해권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제해권을 추구하면서 아테나이는 몰락했던 것이다“(앞의 강유원의 책, 43면)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는 없다. 이 전쟁은 결과로만 치면 펠로폰네소스 동맹(라케다이몬)의 승리로 끝나지만 결국 제3의 세력에 의해 두 제국이 주도하던 영광의 그리스의 시대는 몰락하게 된다.
두려움은 ’다름‘에서 싹트는데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서로 다름이 가진 강점으로 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생산하는 방식이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 다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비극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의 인용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다.
"인간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동물입니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방식이 인간 삶의 양식을 규정하죠. 양떼를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유목생활자는 한곳에 정착해 삶을 영위하는 농경생활자와 다른 방식으로 먹거리를 마련합니다. 그 과정에서 유목생활자와 농경생활자는 다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지요."(양문덕 지음, 『철학 놀이터』 63면, <먹거리 '찾기'에서 '생산'으로> 중)

드라마 <위쳐> 시즌2의 한 장면. 게롤트는 '의외성의 법칙'으로 운명 지어진 시릴라 공주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언제까지나 게롤트라는 보호와 보살핌에만 의존할 수 없다. 게롤트도 시릴라공주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위쳐들이 받는 훈련을 시키게 된다. 시리는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과거보다 성장해가고 또 자신을 둘러싼 비밀 역시 알아가고자 한다. <위쳐> 시즌2는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