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언젠가

이미 한참 전에 다 사라진 벚꽃이 너무 아쉬웠는데,

늦은 오후에 나가면서 보인 벚꽃이 저절로 눈에 담겼다.


예정에 없던 비가 좀 강하게 내렸고무슨 태풍 올 때처럼 바람이 불더니

말 그대로 비처럼 벚꽃이 막 휘날리면서 사라졌었는데,

이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살아남은 걸까.

다 사라진 벚꽃들을 따라갈 것만 같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 꿋꿋하게.


아직 봄이 다 가버린 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이럴 때 생각나는 소설의 한 문장처럼.

 

 


 






"레오무슨 일인가 일어났어요제 감정이 모니터를 벗어난 거예요전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이 어울리는 계절. 아직, 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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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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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슴속에는 포악한 어둠 한 점이 산다. 그 어둠은 유독 가깝고 연약한 존재를 향해 인륜이라는 올가미로 그들을 옥죄고 만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인륜은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 명백한 폭력이다. 천륜이라는 굴레를 짊어진 채 각자의 지옥을 버텨내고 있을 이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읽을 때면, 보통 소설 한 편 다 읽은 후 마지막에 만나는 게 작가의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 자체로 읽어가고, 마지막에 만나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에서 다 확인하지 못한 어떤 부분의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소설은 달랐다.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만나는 작가의 말에서, 이어서 만난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도시에서나 비슷하게 있기 마련인, 화려함 뒤의 초라한 그림자 같은 곳. 용궁장이 그랬다. 신도시 빌딩 숲의 깔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도심 한가운데 용궁장이 있다. 설마 이런 곳이 아직도 있을까 싶었겠지만, 우리 사는 모든 장면에 있을 법한 구도다. 그 용궁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투숙객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망한 투숙객 4명의 합동 장례식이 열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곡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이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떠나간 이를 애도하는 마음이 없던가. 아니면, 그 슬픔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켜 넘기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해졌다. (125페이지, 설계자의 고백)


누군가의 죽음이 남은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사연이 궁금할 수밖에. 떠난 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남겨진 이들에게 행복을 주었나.


다섯 명의 화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칠십여 년의 세월을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온 그녀가 부모의 죽음을 바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가족의 의미를 바랐을 뿐인데, ‘서로가 함께하는 세월을 쌓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 가족은 폭력과 갈취, 부모의 부양을 당연하게만 여기는가(피해자의 고백). 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인생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에게도 같을 거로 믿었다. 아니, 나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만큼, 그렇게 받아온 돈으로 살아온 만큼 다른 가족이 겪은 핍박과 고통은 생각한 적이 없다. 그동안 누리며 살아온 모든 것이 당연했으니까(가해자의 고백). 용궁장 투숙객 모두와 연결고리가 있는 그녀는 영원히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세상 구원을 바라는 이 약자들이, 피해자들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갈망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신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그 마음, 하지만 현실에서는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방식으로 이뤄내는 간절함을(설계자의 고백).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비뚤어진 방향으로 인생을 만들어가다가 결국 자신마저 무너뜨리는 삶.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찾다가 엉망이 된 인생인데, 또다시 구원자를 찾아 나선다. 결국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인생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생존자의 고백).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맞춰 살았다. 남들처럼 사는 게 부럽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형제들이 이해해줄 거로 여겼다. 함께 짊어져야 할 고통을 오롯이 혼자 받아내며 살아온 시간이 끝나자, 남은 건 복수의 다짐뿐이다(조력자의 고백).


가족인데, 부모인데, 마음껏 미워하기도 어렵게 만드는 저 이기적인 관계가 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서로에게 어느 정도 비슷한 마음의 크기가 오고 가야 맞는 거 아닐까 싶은데, 이 이기적인 관계는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때가 많다.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는 일도 흔하다. 인륜이니 천륜이니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만 유지되는 게 가족관계라면, 당장 끊어낸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는 게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소설 속 피해자 같은 사람들이 생겨난다. 지독하게 힘들고 이 관계를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질질 끌다가 인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늦는다. 아니,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잘못된 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주변의 간섭과 강요로 이게 맞는다고 여기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낸 믿음 때문에. 이게 한국의 문화인지, 그 가정이 가져온 오래된 방식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방식의 관계는, 틀린 거다.


다섯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고백을 듣고 있자면,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가, 답답해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시원하게 사이다 한잔 들이켜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들의 고백은 어느 한 사람의 지극의 개인적인 경험도 아니었고, 그 결과까지 오는 게 단순하지도 않았다. 이런 불행이 당연한 나의 운명처럼 여기며 살다가, 버티고 견디다가, 이건 아닌데 하는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복수심과 분노에 휩싸인다.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감정에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봐야 했다. 그렇게 각자의 간절함이 만든 결말들을 마주했을 때, 나 역시 독자로 그 결말을 다 읽어냈을 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거 뭔가 크게 터질 것 같은데 하는 순간을 마주하면서 느낀 답답함이 그때야 사라졌다.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은 집어치워라.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도 다시 꺼내지 마라. 이럴 때 쓰는 말이 오죽했으면이다.


사과 같은 소리 하네. 쓰레기 같은 놈……. 사정? 사정은 무슨, 변명이겠지! 장례식장에서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뭔지 알아? 잘 죽었네, 잘 갔네 하는 산 자를 위한 위로였어. 왠지 알아? 그만큼 당한 거야. 죽이고 싶을 만큼 말이야!” (79페이지, 가해자의 고백)


각자의 이야기 끝에서 들려오는 문장에 속이 편안해진다. 신이 들어주지 못한 기도의 응답이 다른 방식으로 들려왔다.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자기 길을 가는, 장례식장에서 자꾸만 튀어나오는 웃음에, 한때 자살하려던 이의 웃음 섞인 인사에,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염색하겠다는 내일의 계획에, 내 마음도 흐뭇해졌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지목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의 과정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친 많은 상황과 그 상황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기에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게 소설이 아니다. 누구네 집 현관문 안쪽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용궁장의고백 #조승리 #한국문학 #소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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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짓는 여자들 - 학교 급식 노동자들의 일과 삶
정다정 지음 / 산지니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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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밥 한 끼 차려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몇백인 분의 급식 준비를 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급식 노동자의 고됨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보지만, 나의 상상 그 이상일 거다. 열심히 사는 일, 노동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이미 알고 있기에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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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1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4-02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4-02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로고침 위픽
김효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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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마다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거 말고 지금 못마땅한 생을 원하는 대로 바꿀 방법을 모르겠다. 원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다 보면 달라지겠지, 기회를 잡으려고 애써봐야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용기를 갖게 하고 희망을 기다리는 말을 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사실 최선의 노력과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는데, 정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건 어디에, 누구한테 물어야 할까.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 운명이 있다는 걸, 이 순간에 믿게 된다. 세상이 그렇더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스무 살 이태이의 삶에 문제가 생겼다. 아니, 문제는 이태이가 태어난 순간 붙박이처럼 몸에 붙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두에서 태어난 이태이는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채로 성장했다. 구경도 해본 적 없는 빚이 그녀의 하루를 옭아매는 일상을 버티는 중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인생.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대로라면 세상 구경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로 어딘가로 팔려 갈 것 같다. 그때 눈앞에 버튼 하나가 보였다. ‘새로고침어떤 인생으로 만들어줄지 궁금하면서도, 그걸 고민한 겨를이 없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테니까. 눌렀다.



인생을 새로고침 하고 싶나요?

지금 바로! 이 세상 아! ! ! 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꿀 의향이 있다면

이 버튼을 누르세요! (13페이지)


누구라도 누르지 않았을까? 눈앞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뭐라도 누르고 볼 일이다. 지금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지금 생이 끝난다고 해도 하나도 아쉬운 것 없는 시간을 살아왔는데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아쉬운 것 없는 인생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누른 새로고침버튼이 이태이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을까. 재밌는 건, 이태이뿐만 아니라 그 시각, 각각 다른 장소에서 새로고침버튼을 누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다.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 있던 유은희, 불법에 눈감아주던 부패 형사 표진노. 운명의 버튼을 누른 이들이 맞이하게 된 또 다른 운명. 이태이는 낯선 남자의 몸속에 들어와 살인 용의자가 되어 있었고, 유은희는 남편 표진노의 몸으로 깨어났다. 부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용의자를 쫓던 형사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유은희는 이태이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한다.


몸이 바뀌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 이태이와 유은희. 태어났으니까 살아왔다. 환경이 이랬으니까 하루하루 버티는 거 말고는 인생의 목표도 없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싶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뭔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더라도 그 방법을 몰라서 금방 또 잊으면서 살아왔을지도.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는 게 운명이라고 받아들였고, 한 번만 일어나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여자의 몸은 침대에 묶어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그렇게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살아갔겠지. 그런데 뜬금없이 새로고침이라니. 이거 뭐, 진짜 뭐가, , 바뀌려나?


바뀌었으면 좋겠다, 제발. 반으로 쪼개진 젓가락 하나의 틈만큼이라도 길이 벌어졌으면, 그렇게 작은 틈 하나가 점점 더 인생의 다른 궤적을 그리며 뻗어가기를. 그래야 이 소설이 의미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최악을 경험한 이들의 앞날이 새로고침버튼을 누르기 전과 같다면, 그러면 안 되잖아.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각자 바라는 인생을 향해 가는 길을 열어준다면, 아니, 내가 바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것만이라도 찾게 된다면 오늘의 삶이 꽉 찰 것 같은데.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상상한 새로고침버튼의 효과는, 새로 태어난 삶이었다. 이번 생은 완전히 끝나버리고, 다음 생이 새롭게 시작하면서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지난 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 그게 아니라면 새로고쳐지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태이의 스무 해 생을 듣고 있자면, 애써 버리고 싶은 삶이었으니까. 일부러라도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주인공들이 누른 새로고침버튼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랜덤으로 누군가와 인생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 그렇구나. 그럼 나는 누구의 인생으로 바뀌고 싶은 건가 잠깐 생각해봤는데, 또 잘못 읽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인생과 바꾸고 싶은지 아닌지였지, 그 대상을 지정할 수 없는 거였다. 말 그대로 아무나, 랜덤. 하아. 그래도 눌러야겠지?


나의 예상과 다른 전개였지만, 싫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타인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나와 다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보면서 겪는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어떻게 변화하게 해줄지 기대되기도 해서다. 나의 오늘이 그랬다.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낌새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데, 결국 듣고야 말았다. , 금방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모른 척할 일도 아니었을 뿐 나의 선택지는 없었다. 오후 내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이었는데, 빚쟁이에 쫓겨 팔려 갈 운명의 스무 살 청춘도, 억울하고 분해도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네. 시간은 흐를 거고, 이 상황도 이대로 머물러 있지만은 않겠지 싶은 바람만이 남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상황은 새로고침 되어 또 흘러가고 있을 테니까. .



#새로고침 #김효인 #위즈덤하우스 #위픽 #소설 #한국소설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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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봄이 오고 있나 보다. 제법 포근하다고 여겼던 2월에 갑자기 눈이 내리던 날, 아직 봄이 멀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종일 내린 비로 이제 겨울이 끝난 것 같다. 어제보다 기온은 살짝 내려갔지만, 그냥 딱 요즘 느꼈던 봄의 기운이 흐린 날인 오늘 더 느껴지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찾아올 봄이라면, 좀 즐겁게 가볍게 웃으면서 맞이하고 싶어서. 그래서, 어제는 햇살이 좋아서 나갔다. 어디서든 햇살을 등에 받으며 앉아 있고 싶었다. 알라딘 보관함을 뒤져서 책도 샀고, 도서관에 신청한 책도 찾으러 갔다. 집 근처 새로 생긴 카페에도 갔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수다도 떨었다. 웃긴 건, 그렇게 책도 사고 책도 빌려오고 했는데, 올해 초와는 다른 이유로 책을 못 읽었다는 거다.


새해가 시작하면서 바빴던 일은 조금 정리되는 듯했는데, 지금은 다른 것에 빠져있느라 책이 손에서 멀어진다. 봄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드라마를 정주행하느라 말이다. 드라마 <봄밤>이 좋아서, 정해인 배우가 인생 캐릭터를 만났구나 싶어서, 현실을 살아내는 시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처음 방영 당시에는 미처 닿지 못했던 감정들이 다시 볼 때마다 하나씩 튀어나온다.











습관처럼, 익숙하니까 이어오던 연애의 마무리는 꼭 결혼이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다. 10년을 만나고도 헤어지는 친구 커플을 보고,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해서 이어가는 마음을 잘 알지 못해서 그들을 이해하는 걸 멈췄었는데, 드라마 <봄밤> 속 정인(한지민)과 기석(김준한)4년의 결말을 보면서, 그 익숙함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이해하게 됐다. 앞으로 이들의 만남은 또 어떤 방향을 향할지 궁금증이 생길 무렵, 정인은 다른 사람과 우리가 시작된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는데, 정인이 자신의 변한 마음을 진즉에 인정하고 기석과 헤어졌다면, 그 후에 지호(정해인)을 만났다면 그 타이밍은 자연스러웠을까. 헤어지자는 정인의 말에 기석 또한 깔끔한 대답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는 하는데, 이들의 갈등은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방점이 찍힌 것 같다. 연인의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가 연인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기 때문에. 농락당한 기분? 그래서 기석은 그의 말처럼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한풀이정도는 해야 이 배신감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 듯하다.


한편으로는 미혼부로 살면서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남자에게 찾아온 낯선 감정, 그의 표현대로라면 다시 없을 줄 알았던 감정에 취해애인이 있는 여자를 바라보게 되는 일이, 이성과 반대로 움직이는 마음 때문에 힘든 상황이 내내 시선을 붙잡는다. 같이 일하는 선배가 우리 지호는 꽃길만 걸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그 애틋함이 그대로 느껴져서다.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사회의 시선이 어땠을지 상상이 돼서 말이다. 그런 남자가 다시 없을 줄 알았던 감정을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또 어땠을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응원하면서 보게 되는 커플이었다. 이미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인 척하면서 만나왔던 대상을 정리하는 여자도 힘들었을 거고, 자신의 상황을 알면서도 사랑 하나만 보고 쫓아오는 여자를 놓을 수도 없고 지켜내고 싶은 남자의 견딤도 그대로 보인다. 재인(주민경, 이정인의 동생)의 말처럼, ‘사랑을 어떻게 막니?’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튀어나오는 것처럼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다. 특히 봄에 더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난 주말,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남편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해줬더니 싫다고 하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회만 같이 보자고 했다. 정해인 배우의 인생 캐릭터라고, 같이 공감 한 번만 해달라면서 딱 한 번을 강조했다. 무슨 고문당하는 것처럼 옆에 앉아서 1회를 보더니, 이틀 동안 정주행하더라. 다 보고 난 후 남편의 그 표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굉장히 복잡한 듯한, 괜히 안심하는 듯한,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방법을 배운 듯한.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보고 두 사람의 사랑도 그렇지만, 한 번씩 툭 치고 들어오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에 무너져내리곤 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서로가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연인, 가족, 친구로 맺어지는 관계들, 나누는 마음들, 지켜내야 할 책임들. , 그런 여러 가지. 말랑말랑하고 설레면서 보기 시작했던 드라마가, 보면서 무거워졌고, 뭔가 분명하게 정해진 삶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삶의 변수들을 어떻게 맞고 고민하고 부딪히며 살아가는지 보게 한다.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아온 감정들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좋았던 드라마.


뒤늦게 OST를 사려다가 절판 소식에 절망, 중고로 사야겠다 마음먹고 뒤져보니 후덜덜한 중고 가격에 또 한번 놀라고, 대본집을 보고 싶어서 찾아보니 역시 절판, 대본집도 중고 가격이 정상 가격을 뛰어넘는구나 싶어서 아쉽네. 어쩔 수 없이 음반 대신 휴대폰에 음악을 담고, 도서관에 딱 한 세트 비치된 대본집을 찾아봤다. 대본집 읽다 보니, 저절로 소환되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이다. 소설의 흐름이, 상황이 긴장되면서 막 심장이 뛰잖아. 마치, 처음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사실 이 책은 몇 번을 읽고 다시 읽을 일 없을 것 같아서 중고로 팔았다가, 다시 샀다. 애매하더라도 마음에 있는 책은 정리하면 안 된다는 걸 이때 알았지. 생각난 김에 엊그제 만난 지인에게도 선물했다. 원래 책 선물 잘 안 하는데, 그 지인은 책도 안 읽는 사람인데, 얼마 전에 약속 장소를 도서관으로 정했다가(나를 데리러 오는 상황이라), 어쩌다 보니 같이 도서관 서가를 돌게 됐다. 내가 메모해 간 책을 찾고 있는데, 뜬금없이 자기도 한 권 추천해 달라고 하더라. , 나는 이 말이, 책 추천이 정말 무서운데, 고민 끝에 무난하게 페이지가 넘어가겠구나 싶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골라줬다. 안 읽고 시간만 보내다가 반납할 줄 알았는데, 거의 2주 넘게 가지고 다니면서 끝까지 읽어내더라. 이런 책이라면 자기도 책을 계속 읽을 수 있겠다면서. 그 말이 생각나서 고민 살짝 하고 선물했지.


계절을 느끼고, 감정을 터트리게 하는 노래, 드라마, 영화, . 천천히 떠올려 보면 참 많지만, 그때마다 다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한 번씩 눈 마주치고 지나가고 싶어지는 계절이 봄이 아닐까. 작년에 책장 정리하면서 오래전에 즐겼던 로맨스 소설도 다 정리해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이런 기분에 책장에서 꺼낼 만한 책이 거의 없는데,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역시 명불허전인가 싶기도 하다. 스테디셀러로 남은 두 책이 아직 내 책장에도 있다는 거. ^^










#봄밤 #새벽세시바람이부나요 #사서함110호의우편물 #로맨스 #드라마

#설렘 #봄 #봄바람 #벚꽃 #사랑



여담이지만, 최근에 본 영화 <만약에 우리> 역시 너무 좋았는데, 보는 내내 후회라는 단어가 계속 떠올라서, 이 영화는 설레는, 뭔가 시작하고 싶은 간질간질한 봄이 아니라, 서늘해지는 계절에 만나면 더 어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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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3-06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드라마 봄밤 좋게 봤답니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노래도 좋죠 오랜만에 들어야겠어요 3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구단씨 2026-03-06 22:01   좋아요 1 | URL
정말, 미치게 좋아하는 드라마에요. ^^
거기에 노래까지 진짜... ㅠㅠ
당분간 이 드라마와 노래에 좀 더 빠져서 지내보려고요.
며칠 쌀쌀할 것 같아요.
감기 조심하시고, 봄의 시작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

서곡 2026-03-06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이 드라마부터 보고 그 다음에 밥잘사주는예쁜누나도 보게 되었죠 밥누나도 재미있지만 봄밤 참 먹먹하고 애틋한 드라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