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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평점 :
인간의 가슴속에는 포악한 어둠 한 점이 산다. 그 어둠은 유독 가깝고 연약한 존재를 향해 ‘인륜’이라는 올가미로 그들을 옥죄고 만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인륜은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 명백한 폭력이다. 천륜이라는 굴레를 짊어진 채 각자의 지옥을 버텨내고 있을 이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읽을 때면, 보통 소설 한 편 다 읽은 후 마지막에 만나는 게 작가의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 자체로 읽어가고, 마지막에 만나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에서 다 확인하지 못한 어떤 부분의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소설은 달랐다.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만나는 작가의 말에서, 이어서 만난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도시에서나 비슷하게 있기 마련인, 화려함 뒤의 초라한 그림자 같은 곳. 용궁장이 그랬다. 신도시 빌딩 숲의 깔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도심 한가운데 용궁장이 있다. 설마 이런 곳이 아직도 있을까 싶었겠지만, 우리 사는 모든 장면에 있을 법한 구도다. 그 용궁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투숙객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망한 투숙객 4명의 합동 장례식이 열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곡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이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떠나간 이를 애도하는 마음이 없던가. 아니면, 그 슬픔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켜 넘기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해졌다. (125페이지, 설계자의 고백)
누군가의 죽음이 남은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사연이 궁금할 수밖에. 떠난 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남겨진 이들에게 행복을 주었나.
다섯 명의 화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칠십여 년의 세월을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온 그녀가 부모의 죽음을 바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가족의 의미를 바랐을 뿐인데, ‘서로’가 함께하는 세월을 쌓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 가족은 폭력과 갈취, 부모의 부양을 당연하게만 여기는가(「피해자의 고백」). 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인생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에게도 같을 거로 믿었다. 아니, 나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만큼, 그렇게 받아온 돈으로 살아온 만큼 다른 가족이 겪은 핍박과 고통은 생각한 적이 없다. 그동안 누리며 살아온 모든 것이 당연했으니까(「가해자의 고백」). 용궁장 투숙객 모두와 연결고리가 있는 그녀는 영원히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세상 구원을 바라는 이 약자들이, 피해자들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갈망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신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그 마음, 하지만 현실에서는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방식으로 이뤄내는 간절함을(「설계자의 고백」).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비뚤어진 방향으로 인생을 만들어가다가 결국 자신마저 무너뜨리는 삶.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찾다가 엉망이 된 인생인데, 또다시 구원자를 찾아 나선다. 결국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인생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생존자의 고백」).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맞춰 살았다. 남들처럼 사는 게 부럽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형제들이 이해해줄 거로 여겼다. 함께 짊어져야 할 고통을 오롯이 혼자 받아내며 살아온 시간이 끝나자, 남은 건 복수의 다짐뿐이다(「조력자의 고백」).
가족인데, 부모인데, 마음껏 미워하기도 어렵게 만드는 저 이기적인 관계가 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서로에게 어느 정도 비슷한 마음의 크기가 오고 가야 맞는 거 아닐까 싶은데, 이 이기적인 관계는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때가 많다.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는 일도 흔하다. 인륜이니 천륜이니 갖다 붙이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만 유지되는 게 가족관계라면, 당장 끊어낸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는 게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소설 속 피해자 같은 사람들이 생겨난다. 지독하게 힘들고 이 관계를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질질 끌다가 인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늦는다. 아니,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잘못된 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주변의 간섭과 강요로 이게 맞는다고 여기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낸 믿음 때문에. 이게 한국의 문화인지, 그 가정이 가져온 오래된 방식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방식의 관계는, 틀린 거다.
다섯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고백을 듣고 있자면,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가, 답답해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시원하게 사이다 한잔 들이켜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들의 고백은 어느 한 사람의 지극의 개인적인 경험도 아니었고, 그 결과까지 오는 게 단순하지도 않았다. 이런 불행이 당연한 나의 운명처럼 여기며 살다가, 버티고 견디다가, 이건 아닌데 하는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복수심과 분노에 휩싸인다.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감정에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봐야 했다. 그렇게 각자의 간절함이 만든 결말들을 마주했을 때, 나 역시 독자로 그 결말을 다 읽어냈을 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거 뭔가 크게 터질 것 같은데 하는 순간을 마주하면서 느낀 답답함이 그때야 사라졌다.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은 집어치워라.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도 다시 꺼내지 마라. 이럴 때 쓰는 말이 ‘오죽했으면’이다.
“사과 같은 소리 하네. 쓰레기 같은 놈……. 사정? 사정은 무슨, 변명이겠지! 장례식장에서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뭔지 알아? 잘 죽었네, 잘 갔네 하는 산 자를 위한 위로였어. 왠지 알아? 그만큼 당한 거야. 죽이고 싶을 만큼 말이야!” (79페이지, 가해자의 고백)
각자의 이야기 끝에서 들려오는 문장에 속이 편안해진다. 신이 들어주지 못한 기도의 응답이 다른 방식으로 들려왔다.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자기 길을 가는, 장례식장에서 자꾸만 튀어나오는 웃음에, 한때 자살하려던 이의 웃음 섞인 인사에,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염색하겠다는 내일의 계획에, 내 마음도 흐뭇해졌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지목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왜’의 과정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친 많은 상황과 그 상황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기에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게 소설이 아니다. 누구네 집 현관문 안쪽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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