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고침 ㅣ 위픽
김효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마다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거 말고 지금 못마땅한 생을 원하는 대로 바꿀 방법을 모르겠다. 원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다 보면 달라지겠지, 기회를 잡으려고 애써봐야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용기를 갖게 하고 희망을 기다리는 말을 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사실 최선의 노력과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는데, 정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건 어디에, 누구한테 물어야 할까.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 운명이 있다는 걸, 이 순간에 믿게 된다. 세상이 그렇더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스무 살 이태이의 삶에 문제가 생겼다. 아니, 문제는 이태이가 태어난 순간 붙박이처럼 몸에 붙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두에서 태어난 이태이는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채로 성장했다. 구경도 해본 적 없는 빚이 그녀의 하루를 옭아매는 일상을 버티는 중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인생.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대로라면 세상 구경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로 어딘가로 팔려 갈 것 같다. 그때 눈앞에 버튼 하나가 보였다. ‘새로고침’ 어떤 인생으로 만들어줄지 궁금하면서도, 그걸 고민한 겨를이 없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테니까. 눌렀다.

인생을 새로고침 하고 싶나요?
지금 바로! 이 세상 아! 무! 나! 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꿀 의향이 있다면
이 버튼을 누르세요! (13페이지)
누구라도 누르지 않았을까? 눈앞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뭐라도 누르고 볼 일이다. 지금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지금 생이 끝난다고 해도 하나도 아쉬운 것 없는 시간을 살아왔는데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아쉬운 것 없는 인생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누른 ‘새로고침’ 버튼이 이태이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을까. 재밌는 건, 이태이뿐만 아니라 그 시각, 각각 다른 장소에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다.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 있던 유은희, 불법에 눈감아주던 부패 형사 표진노. 운명의 버튼을 누른 이들이 맞이하게 된 또 다른 운명. 이태이는 낯선 남자의 몸속에 들어와 살인 용의자가 되어 있었고, 유은희는 남편 표진노의 몸으로 깨어났다. 부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용의자를 쫓던 형사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유은희는 이태이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한다.
몸이 바뀌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 이태이와 유은희. 태어났으니까 살아왔다. 환경이 이랬으니까 하루하루 버티는 거 말고는 인생의 목표도 없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싶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뭔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더라도 그 방법을 몰라서 금방 또 잊으면서 살아왔을지도.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는 게 운명이라고 받아들였고, 한 번만 일어나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여자의 몸은 침대에 묶어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그렇게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살아갔겠지. 그런데 뜬금없이 ‘새로고침’이라니. 이거 뭐, 진짜 뭐가, 막, 바뀌려나?
바뀌었으면 좋겠다, 제발. 반으로 쪼개진 젓가락 하나의 틈만큼이라도 길이 벌어졌으면, 그렇게 작은 틈 하나가 점점 더 인생의 다른 궤적을 그리며 뻗어가기를. 그래야 이 소설이 의미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최악을 경험한 이들의 앞날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기 전과 같다면, 그러면 안 되잖아.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각자 바라는 인생을 향해 가는 길을 열어준다면, 아니, 내가 바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것만이라도 찾게 된다면 오늘의 삶이 꽉 찰 것 같은데….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상상한 ‘새로고침’ 버튼의 효과는, 새로 태어난 삶이었다. 이번 생은 완전히 끝나버리고, 다음 생이 새롭게 시작하면서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지난 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 그게 아니라면 ‘새로’ 고쳐지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태이의 스무 해 생을 듣고 있자면, 애써 버리고 싶은 삶이었으니까. 일부러라도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주인공들이 누른 ‘새로고침’ 버튼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랜덤으로 누군가와 인생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나는 누구의 인생으로 바뀌고 싶은 건가 잠깐 생각해봤는데, 또 잘못 읽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인생과 바꾸고 싶은지 아닌지였지, 그 대상을 지정할 수 없는 거였다. 말 그대로 아무나, 랜덤. 하아. 그래도 눌러야겠지?
나의 예상과 다른 전개였지만, 싫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타인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나와 다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보면서 겪는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어떻게 변화하게 해줄지 기대되기도 해서다. 나의 오늘이 그랬다. 뭔가 불안함이 스멀스멀. 낌새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데, 결국 듣고야 말았다. 뭐, 금방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모른 척할 일도 아니었을 뿐 나의 선택지는 없었다. 오후 내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이었는데, 빚쟁이에 쫓겨 팔려 갈 운명의 스무 살 청춘도, 억울하고 분해도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네. 시간은 흐를 거고, 이 상황도 이대로 머물러 있지만은 않겠지 싶은 바람만이 남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상황은 새로고침 되어 또 흘러가고 있을 테니까. 휴.
#새로고침 #김효인 #위즈덤하우스 #위픽 #소설 #한국소설 #문학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