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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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일이 있어서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지냈다.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틈틈이 문자를 확인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언어가 없었다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으로 당연하게 누릴 자유를 억압당하고, 하루에 쓸 수 있는 말을 100단어로 제한당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 속 여성들의 삶이 마치 언젠가 다른 세대가 겪었던 모습인 것만 같다. 어쩌면 어느 날의 우리가 당하게 될 현실 속 불평등과 불합리 같다. 읽는 내내 손목이 꽉 조일만큼 답답한 가슴의 매클렐런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은 이렇다. 우리는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책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글자가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의 책을 복사한 오래된 원고부터 친구가 장난삼아 결혼 선물로 준 빨간 체크무늬 표지의 낡은 요리책까지, 소니아가 손댈 수 없는 수납장에 갇혀 있다. 분명 내 책들이지만, 나 역시 그 책에 손댈 수 없었다. 패트릭은 마치 운동 기구처럼 수납장 열쇠 외에도 각종 열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들고 다녔다. (31페이지)

 

여자들은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매클렐런은 결혼한 지 17년 되었고,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남편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다. 누가 봐도 다정한 가족들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저녁 식사 자리의 화기애애함이 넘쳐흐른다. 조금 이상한 것 하나만 빼고는. 식탁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뿐이다. 매클렐런과 딸 소니아는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다. 하루에 정해진 100단어가 초과하는 순간, 손목에 달린 카운터에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더 올라갈 때마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높아진다.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생기고, 심한 경우 기절까지 한다. 그 공포를 아는 매클렐런은 카운터의 숫자가 100에 가까워져 왔다는 걸 알고 말을 아낀다. 딸 소니아는 카운터의 기능과 역할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 말을 안 할수록 좋다는 것. 그러니 매클렐런 집의 저녁 식탁 분위기가 어떤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아들 셋과 남편의 목소리는 자유롭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한다.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하루 사용할 단어의 차감에 대해 두려움이 없이 말이다.

 

나라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정의했다. 하나님 아래 남성, 남성 아래 여성. 순수한 인간이란, 순수한 여성이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에 몰두해야 하며, 나쁜 말을 쓰지 않고, 사회에 나오지 않으며, 개인적인 교류나 의사를 나누는 것은 차단해야 한다. 오직 가정 안에서,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좋은 거다. 나라는 '순수운동'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남편에게 귀속했다. 남편은 국가가 마련해주는 일을 하고 돈을 번다. 국가는 남성의 모든 것을 관리할 자격을 가졌다. 그리고 국가는 남성이 관리하는 여성의 권리도 가졌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최소한의 생리현상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은 침묵을 지키고 복종하는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집안의 가장인 남편에게 물어본다. 신이 정해준 남성의 지도력에 여성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39페이지)

 

이런 생활을 한 번이라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나라가 될 거라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여성에게 하루 단어 100개만 허락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하루만 해도, 아니, 1분 사이에 내가 한 말은 100단어가 넘고도 남는다. 무엇이 여성의 말에 제한을 걸게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지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 근거가 성경이 된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 하나로 태어난 것을 강조하면서, 남성의 세상 안에서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 그들의 후손을 번식하거나 일상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애를 낳는 도구로만 존재 이유를 주었는데, 그놈의 성경이란 참...)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매클렐런의 친구이자 페미니스트인 재키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함, 잘못된 정치를 향한 쓴소리,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정책과 국가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저 정도가 뭐 어쨌다고, 아니면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거나. 재키는 후자였다. 그러다가 실종됐다. 아마 국가의 정책에 반항하고 사람들(여성들)을 선동하는 그녀를 제거해야만 했겠지. 그럼 매클렐런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처음에는 재키의 행동과 말이 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재키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활동이 점점 지쳐갈 무렵, 남편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집회 참석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든 여성의 손목에는 카운터가 채워졌고, 하루 100단어의 카운터가 자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일하던 여성들의 자리는 사라졌고, 여성들의 돈은 남편의 계좌로 이체된다. 여성의 여권은 소멸하였고, 외국으로 여행도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어느 날, 미국의 모습이다.

 

매클렐런이 목소리를 내고 해동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딸 소니아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사랑 로렌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세상, 불륜이나 동성애를 저지른 이들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형벌의 끔찍함을 알아서다. 무엇보다, 말을 배우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면서 성장해야 할 딸 소니아의 미래가 절망적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소니아는 지금보다 더 억압받는 세상에서, 마치 그런 세상이 당연한 듯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신경과 언어를 연구하는 그녀의 과거 능력이 다시 필요해진 정부가 일시적으로 그녀의 카운터를 해제해주었지만, 그녀는 안다. 이 실험이 끝나면 다시 그녀는 카운터 속에 단어가 갇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끔찍하게도 이 실험의 목적이 그녀가 생각했던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 더는 참지 못했다. 지금도 부당한 세상, 여성이란 존재에게 생명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낙원을 이제는 끝내야만 했다.

 

목소리를 뺏긴 것뿐이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소리를 뺏기니 모든 것을 뺏긴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예 사라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앞서 만난 같은 주제의 소설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것만 찾아보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굳이 또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읽다 보니 조금씩 보이는 건, 매클렐런이 지난 이야기를 현재 안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재키의 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리를 주장하고 외쳤다. 틀린 것을 수정하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모이고, 나아가고, 소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삶을 조금씩 파먹으며 묻으려고 하는 국가의 의도를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싸우다가 목소리를 잃고 삶을 잃었겠지.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재키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 소설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유,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향한 경고,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 재키가 매클렐런에게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은 아마 이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로렌조가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가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었던 그때부터였다. (348페이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한구석도 닮아 있어서 겁이 나는 이야기다. 여성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어린 남자애들까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다. 국가가 보장한 미래를 꿈꾸며 따르지만, 국가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세상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보장한 미래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이 억압하고 차별하려는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왜 여성을 사회에서 밀어내면서 순수 운운하며 존재하지 않는 인간 취급을 하는지. 어쩌면 그건 여성이나, 여성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말하는 대로 세뇌되어가는 남자들이 적응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자니까, 여자는' 이런 이유로 거부당하는 일상의 면면에 경종을 울린다. 가상의 세상을 말하고 있지만, 가상의 공간에서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두렵고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다. 인간이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를 한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로 대신 전한다. 손목에 채워진 카운터의 빈자리, 전기 충격으로 검게 타버린 늘어진 그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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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ooster 2020-03-0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3-16 20:57   좋아요 1 | URL
이 책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이 훨씬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

2020-03-0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비로드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2
최예지 지음, 살구 그림 / 폴앤니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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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투쟁의 길을 걷기도 한다. 하지만 투쟁이든 아니든, 답을 찾든 못 찾든, 그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곧 다시 답을 찾으러 떠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순간의 답에 만족하면서 또 오늘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저자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에서, 또 한 번 그 세상 속 우리의 모습을 본다. ‘왜?’라고 묻고 싶은 순간에서 파생한 또 다른 감정을 만난다. 때로는 답을 찾는 것보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는 순간을 만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너는 이게 재밌니, 언젠가 영이 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키는 대로 죽죽 그어놓은 길 위를 너는 그냥 달리기만 할 뿐인데, 했다. 영에게 되묻고 싶었다. 너는 그게 재밌니, 이탈하는 게, 이탈을 감수하는 게, 포장도 안 된 허공 위를 덜컹거리며 쏘다닐 뿐인 네 인생이. 나는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너는 자꾸 바깥으로, 바깥으로 가겠지.

갑자기 영이 내게 말을 건다.

정말로 갈 수 있을 것 같니?

안쪽으로? (70~71페이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결국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애비로드」의 화자는 미혼부인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다. 미혼부와 사생아 사이에서 채워질 엄마의 존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확실히 모른다는 엄마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엄마가 누구인지 묻는 딸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엄마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내 씨인 건 확실하다고. 엉뚱한 그 대답에 웃음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아버지 말이 틀린 것도 아니더라. 정확히 알 수 없는 엄마의 존재를 애써 확인하려는 것보다, 확실한 것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나라도 옆에 있는 존재를 더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쁘지 않으니까. 다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관해 알아가는 미세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이었다. 세상의 많은 미혼모 사이에 있을 미혼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세상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이 더 많은 곳이니까.

 

세상의 불합리에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공과 영의 생존법」의 공은 영의 사망 소식에 둘 사이의 일을 기억해낸다. 근무지에서 성희롱을 일삼는 대상을 함부로 신고하지도 공을 대신해서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영이 대신 나선다. 하지만 그 일을 공은 영이 죽은 후에 알게 된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겪어야 할 또 다른 피해가 그 목소리의 힘을 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의 두 존재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한 사람은 대학가에서 다단계로 화장품을 팔려고 하고, 한 사람은 꾸미고 가꿔야만 하는 여성의 역할을 버려야 한다고 투쟁한다. 대립하듯 역할이 다른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때도 지금도 두 사람은 다른 성향의 태도로 살아간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숨죽인 채로 세상에 스며들거나 여전히 불합리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거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틀린 인생은 아닐 테다. 하지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더는 그 불합리한 세상에 스며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에 바뀔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또 언젠가 그 변화를 바라면서 투쟁하고 목소리를 낸다.

 

묘하고 애매한 사이에서 분명한 관계의 이름을 찾지 못한 「넌 항상 바깥에 있고」에서는 그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 여운에 뭔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드라이브, 드라이브」는 정리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헤어졌지만 제대로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그 흔적을 하나 끌어와서 미련을 끊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기대한다. 동생의 ‘같은 자전거가 아니’라는 말은, 새것으로 예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때 묻은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새것과 친해지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게 인간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누구든 무엇이든, 관계를 맺고 적응해가는 게 순리 같다. 「딸과 여신과 아이돌의 역사」와 「당신을 위한 스물한 번」은 묘하게 대조적이다. 가까이하려고 했더니 너무 가까워진 선에 부담과 짜증이 일어나기도 하고, 가까이 있을 때는 경쟁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거리가 생기니 발견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안 되기도 한다.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의외로 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나아갈 수 있음에 긍정의 힘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행복일지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즐거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고 있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이니까. 그러면서도 조금씩 옆을, 뒤를 보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애쓴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이 말한 것처럼, 내가 바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세상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누군가 외치고 투쟁하면서 노력하는 삶은 그런 것일 테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소박하게 변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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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산타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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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오피아 구지 모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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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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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벌기도 하고, 집안의 살림과 육아를 담당하기도 하고, 성장하는 나이에서 당연하게 학교 공부에 열중하기도 하고. 더 다양한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움직이고 있다.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하고 그런 걸 계산하기 전에, 그저 지금 자기 앞에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성장하던 시기에는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규정처럼 정해진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면서 가정의 소득을 책임지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돌봤다. 혹시 일을 하던 여성이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임신을 하고 나면 출산 후에는 전업주부로 살아가기 일쑤였다. 직장에서는 복직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일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육아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텐데.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육아는 여성이 직장에 돌아가지 못할 큰 이유가 된다. 지금보다 더 예전에는,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의 삶이 보편적이었던 때다. 지금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 일하는 여성을 보는 건 어려웠다. 이 소설 속의 도시코 역시 그런 삶이었다.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살림과 육아의 시간이 계속되었고, 이제는 정년퇴직한 남편 쇼지까지 집에 있다.

 

쇼지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일해 왔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정년퇴직한 자신이 가족들에게 존중받는 게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집에서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사상(?)으로 성장했던 사람이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성장했고 자기도 일을 마치고 퇴직했으니 시간도 생겼고, 아내와 둘이서 여행도 다녀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자기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딸 유리에 말로는, 엄마는 '후겐병'에 걸렸다고 했다. 후겐병이란, '남편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병'이라는 신조어란다. 하하하. 우리말로 하면 '남편 때문에 생기는 화병' 정도 되려나? 서로 같이 하나의 가정을 잘 꾸려가고자 만난 인연일 텐데, 배우자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기는 건 무슨 경우인가.

 

아니, 별거 아니다. 여기에 와서 도시코가 한 일이라고 해봤자 렌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밥을 먹이고, 입가를 닦아 주고…… 그 정도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이미 점심 식사는 끝났다. 저녁밥은 마이가 돌아와서 먹일 테니까 딱히 할 일은 없다. (140~141페이지)

 

문제는, 상대방의 진심을 읽지 못한 데서 시작한다. 쇼지는 아내 도시코의 그동안 삶이 편했을 거로 여겼다. 일도 안 하는 전업주부가 뭐가 지친다고, 종일 집에서 애들과 노는 인생 부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처음 쇼지의 생각과 말에 설명하고 반박하던 도시코도 어느 순간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마 처음에는 쇼지도 자기 말이 맞으니까 아내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여겼겠지. 하지만 뒤늦게야 알게 된다. 아내가 자기와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자기가 옳아서가 아니라 자기를 포기해서 그랬다는 것을. 더는 설명도 이해를 구하는 일도 필요 없는 상대라는 것을. 딸마저 자기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전업주부의 삶을 우습게 여긴다. 그런 쇼지에게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아들 가즈히로 부부가 맞벌이하게 되어서 손주들을 돌봐주어야 했다. 거절하고 아내에게 떠넘기려고 했으나, 아내도 거절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를 돌보는 게 뭐 어렵냐고 무시했던 그가 손주들을 어떻게 돌볼지 기대가 커진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아내와 여자들이 팔자 편하게 아이들과 집에서 뒹굴 거리는 인생이라고 여겼던 그가 겪을 일이 눈에 선하다. 육아와 가사가 여자만의 일이라고, 아이는 엄마가 돌보는 게 맞는다고 여긴 그가 여자의 그 일을 하고 있다. 얼마나 편할까. 손주들과 뒹굴뒹굴하면서 며느리가 올 때까지 한 시간만 있으면 되는데, 이보다 편하고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평생을 회사에서 일하고 퇴직한 남자의 모습은, 비단 이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모습이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여자가 벌면 얼마나 버느냐고, 집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식사를 차려주고 집안의 모든 일을 하는 게 여자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일들. 낯설지 않다. 그 방식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아이를 돌보는 게 부부이자 부모의 역할이다. 다만 그 책임을 다하는 게 각자가 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거다. 전업주부를 원하는 이는 그렇게 하면 되고, 출산 후 업무로 복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그 복직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강요된 선택을 하곤 했다는 게 많은 여성이 하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쇼지가 생각하는, 여성은 가정에서 가족들을 돌보고 살림을 도맡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일상이라고 어떤 삶인지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게 보고 자란 삶의 방식을 자기 세대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면 살아왔으니, 반세기를 건너온 현재의 세상을 그가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명의 손주와 고군분투하는 쇼지를 보면 고소하다. 그래, 당신 한번 겪어보시지. 애들과 노는 일상이 얼마나 편한 거냐고 말하던 당신, 그대로 한번 편하다는 걸 느껴보란 말이다. 막상 아내의 도움 없이 손주들을 돌보고,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친구의 푸념을 듣던 쇼지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기와 똑같은 사고방식에 휘둘리는 아들을 개조하지 않으면, 노년에는 자기와 같은 인생을 맞이할 거라고 걱정하면서 말이다. 자기 옆에만 오면 아내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집안에 같이 있으면서도 각방을 쓰고 식사도 같이 안 하는, 집에 있는 남편을 피해 다른 곳으로 나가버리는 아내가, 아버지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무시하는 딸의 말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알아버렸으니까. 구시대적 가부장제를 온몸에 장착하고 살아온 그가 지금 세상에 얼마나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깨달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설거지를 해도 밥을 먹고 나면 또다시 설거지거리가 나온다.

청소를 해도 다음 날이 되면 희미하게 먼지가 쌓인다.

빨래를 해도 다음 날에는 엄청난 양의 빨래가 생긴다.

이 무의미한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청결한 생활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318페이지)

 

이 소설은 제목처럼 정년 아저씨 개조 계획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고 아내는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역할 분담이 분명하게 있었다. 각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말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나 세상의 방식이 그랬을 것이다. 인제 와서 그 방식에 원망해도 소용없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2020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다만, 전업주부의 삶이 어떤 건지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책임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쇼지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아들에게 닥친 위기를 읽어낸 순간,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을 무시한 시간을 안타까워할 테니까. 세상이 얼마나 변해왔고,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게 얼마나 잘못되었던 건지 깨닫기 시작할 테니까. 밖에서 돈을 버는 일도 힘들지만, 육아와 가사노동 역시 그에 비할 바 없이 힘들고 중요한 일이라는 이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쇼지는 아들 가즈히로를 개조하고, 주변에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던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듯하다. 자기 세대와는 바뀐 현실에 적응하고, 좀 더 나은 세상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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