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타협을 위해서도 싸움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선행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핵심과 취약점들에 대한 인식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들은 생각보다 남자를 모른다. 그저 자기와 주변의 남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의 파편으로 하나의 상을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자로서의 자기 인식인 동시에 사회적 객관을위한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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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자주 드나들면 그냥 알게 된다. 어떤 의사(의료진)가 환자를 위하는 건지 저절로 보인다. 저자가 지금 이렇게, 마지막 구명 밧줄을 잡는 것처럼 계속 말하는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환자를 위해서다. 환자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사지를 넘지 않도록 붙잡으려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려고. 그게 전부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대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마라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골든아워1, 148~149페이지)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아덴만 작전이고, 저자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가 작년이다. 그사이 다른 매체를 통해 인터뷰나 강연을 잠깐씩 보긴 했지만,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훌륭한 의사라는 생각만으로 멈췄다. 북한군 병사를 치료하면서 그의 인터뷰를 몇 번 보고, 국회의원들에게 중증외상센터의 현실과 대책을 브리핑하는 걸 보면서 뭔가 달라질 거로 믿었다. 중증외상센터가 왜 필요하고 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지 일련의 사건들로 증명되었으니까. 알려진 것이 그 정도일 뿐,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나라의 병원에 그가 말하는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고 중증외상센터의 지원이 늘어나서, 병원까지 가지 못해 길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더는 없는 세상이 곧 올 거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 어느 날 CF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의아했다. 화면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가 왜 CF까지 등장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이름을 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오해를 했다. 나중에 그 CF를 찍어야 했던 배경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출동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정부 대신에,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해주는 통신사와 손잡고 찍은 광고. 그것도 갑자기 출동하게 된 현장을 화면에 담게 되었다는 후문에 한숨이 푹푹 나오더라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방송이나 다른 인터뷰에서 말하는 현장의 생생함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나 역시도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렇게 나대는 거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의 목숨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과 구조장비를 갖추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해주지 못하는 정부나 그런 생각조차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간절한 바람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당장 눈앞에 엄청난 돈을 물어다 줄 제도가 아니어서 아무도 어떤 기관도 쉽게 협조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가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게 참 오랜만이다. 끝이 없는 그의 노력이 시한부가 될까 봐 답답하고, 그런데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 감동해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그놈의 행정은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행정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급하지 않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골든아워에 도착해서 치료를 시작해야 환자가 살아날 기회는 늘어난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니. 미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에서도 정착되었다는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이 대한민국에서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그의 인터뷰를 한 번씩 볼 때마다 이 커다란 제도를 그 혼자서 이고지고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한 인터뷰일수록 그의 신념은 사그라진 것 같다. 다음이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일에 그는 더는 어떤 바람조차 갖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없는 중증외상센터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곳은 언제까지 운영이 될까, 그가 없는 그곳이 과연 존재할까, 그럼 우리가 목숨을 구할 기회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8년까지 그가 경험한 기록이다. 1권에서는 주로 그가 외상외과에 들어와서 부딪힌 의료 현실에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미국과 영국의 외상센터 연수로 그는 한국에서도 정착시킬 외상센터를 기대했겠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의 바람을 다 담지 못했다. 외상센터로 실려 오는 환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접 마주한 인간의 무력함을 토로한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한지 피력하지만, 그의 바람이나 노력만큼 따라주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어지는 2권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장의 모습이 담겼다. 그가 속한 병원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었지만 열악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외상센터를 제대로 갖출 시스템을 안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의 일들, 병원과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은 행정상의 일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아가야만 하는 그의 감정들. 거기에 그 혼자가 아니라 중증외상센터 팀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와 동급으로 들려온다. 틈나는 대로 헬기 출동 훈련을 하고 부족한 장비지만 정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를 구하러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응급 출동 현장의 이야기는 더 생생했다. 세월호 사고에도 갔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거기에서도 참 우리나라의 행정은 사람이 우선이 아닌 채로 굴러가더라. 더는 그곳에서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밤에 나는 헬기 소리를 소음이라고 민원을 넣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만약 그 소음(?)이 지금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오고 있는 소리가 되었을 때야 아무 말도 안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힘을 잃은 채로 중증외상센터를 떠나는 동료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읽고 있는 내 어깨도 축 처진다.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고 해도 그들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 중증외상센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끝날 것만 같아서 무섭다.

 

외래 진료는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일 중 그나마 가장 부담이 적다. 이때 만나는 환자들은 생사를 오가는 긴 싸움을 끝내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환자가 부서지고 으깨진 몸으로 실려 왔을 때나,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수술방에서 그리고 죽음과 지난한 전투를 벌이는 중환자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연수받을 때 데이비드 호이트(David Hoyt) 교수는 외래 진료는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외래 진료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고, 내 지긋한 일상에서 실제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골든아워1, 19~20페이지)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표정이 없는 사람 같다. 이 사람이 지금 화가 났는지 슬픈지 아픈지 어떤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로봇인가? 그만큼 그에게서 표정은 물론이고 웃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이런, 그에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은 놀라움. TV에서 그의 병원 생활을 취재하는데, 중증외상센터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 받고 퇴원한 후에 외래 진료를 온 장면이 보였다.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면서 진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이제는 안 봐도 되겠다고, 잘 나았으니 더는 안 와도 된다고 말하며 환자와 웃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모습에 놀랐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한 기쁨도 있지만, 그가 이럴 때 웃는구나 싶은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받고 나가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에게는 이 일을 하는 목적이자 신념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사람을 살리는 그 자체가 그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유다. 우리가 그를 응원하는, 그에게 다가온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게 정부의 지원과 외상센터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다. 사람을 살리는 일, 예방 가능한 사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외상센터 안에는 환자를 끌고 CT를 찍으러 갈 사람도 부족했다. 외상외과 교수들은 다른 대학 병원이라면 수련의들이 할 일들을 직접 몸으로 감당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새벽 3시에 환자에게 소변줄을 꼽고, 똥으로 오염된 핏물을 온몸에 뒤집어쓰며 수술했다.

이런 현실과는 정반대로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 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증원은 없으면서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기상천외한 정책. 이것은 센터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나는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돌아가야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내 처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골든아워2, 290~2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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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쉽지 않다.

읽어보고 싶은데 읽어지지 않아서...

 

어떤 책은,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한 마디도 써지지 않아서 쉽지 않다.

그 좋은 느낌은 왜 써지지 않아서...

 

어떤 책은,

읽는 것도 어려워서 꾸역꾸역 겨우 읽어냈는데,

그렇게 어렵게 읽은 후에도 한 마디도 써지 않아서 쉽지 않다.

 

누가 읽으라고 강요한 건 아닌데,

그래서 읽는 것도, 읽은 느낌을 쓰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누가 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책은 꾸준히 사는데,

그건 쉬운 일이더라는... @@

 

 

 밤을 걷는 문장들 - 한귀은

 전작들 좋았는데,

 그래서 신간 출간 때마다 관심 두게 되는데,

 이번 책은 좀 서운한 느낌?

 아직은 읽고 있는 중이니,

 일단은 끝까지 읽어보기로...

 

 

 신비한 공룡 사전 - 박진영, 이준성

 말 그대로 사전이다. 온갖 공룡이... 와우~

 신기하긴 하다.

 흥미롭고 재밌기도 하다.

 아이들이 좋아할만 하다.

 

 

 한국, 남자 - 최태섭

 얼마전에 남자 사람과 <며느라기>를 같이 읽었는데,

 이 책도 참 흥미로울 것 같다.

 같이 읽어보자고 한번 더 권유하고 싶은 책이 될 것 같은.

 한국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응? 아닌가? 일단 끝까지 읽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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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8-12-0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인터넷으로 옷 고르는것보다 책 고르는것이 더 쉽더라구요. ㅎㅎ

구단씨 2018-12-11 14:40   좋아요 0 | URL
그렇다니까요. ㅎㅎㅎ
책 고르기 진짜 어려워요.

여긴 지금 눈이 펑펑 내립니다~!
추운 거 진짜 싫은데, 눈이 오니 참으로 겨울스럽긴 하네요. ^^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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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온다. 행복을 위해 선택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순간 말이다.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다른 길을 걷기로 하거나 하는 선택으로, 행복이 아닌 순간을 살아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순간. 정세랑의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 중 「이혼 세일」의 주인공 이재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 것 같다.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이혼 세일」중에서)

 

이재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친구들은 이재의 갑작스러운 이혼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이재가 주최한 이혼 세일에 무엇을 사서 가지고 올지 기대가 크다. 학창시절부터 이재는 특이하게 매력적인 아이였다. 처음에는 잘 몰랐어도 한 학기만 지나면 이재는 학교의 남학생 절반이 좋아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재의 외모는 평범했는데, 무엇이 이재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걸까?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별것 아닌 옷도 이재가 입으면 예뻤다. 그녀가 가진 찻잔 하나마저도 기품 있어 보였다. 친구들은 그런 이재의 인생이 부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동안 이재의 주위로 사람이 끓고 이재가 가진 것들이 우아해 보이고 이재가 매력적으로 보였던 건 단지 그녀의 운이었을까?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친구들은 이재와 교류했고, 이재와 가까이 지냈으며, 이재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아름답고 맛있는 것들로 행복했다. 그런 이재가 이혼을 하다니. 놀랄 수밖에. 더 놀라운 것은 이재가 이혼 세일을 한다는 거다. 이혼을 결정한 이재가 결혼생활 동안 사용하던 많은 물건을 판매한다고 했다. 그 소식에 친구들은 이재의 집에 모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 친구는 적금까지 깨고서라도 이재의 물건들을 살 거라고 했다. 여기까지 들으니 나도 이재가 궁금해진다. 이재는 누구인가, 이재는 어떤 사람인가...

 

처음 이 제목을 듣고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이혼 세일이 펼쳐질 거라는 전개에 놀라면서도 흥미로웠다.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순간을 정리하는데, 보통은 마음으로만 정리하면 끝나는 거 아닐까 싶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물건까지 정리한다는 설정이 기가 막혔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런 깔끔한 정리가 이재의 다음 행보를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여러 인생의 순간이 있다면, 그 인생의 하나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런 방식의 정리가 참 괜찮은 방법이구나 싶은 앎의 순간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친구가 이재의 집에 모여 이혼 세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까지의 심리가 담백하고 솔직하게 그려진 소설이다. 누구는 이재를 질투하고, 누구는 이재의 매력을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이재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이재는 누군가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킨 거다. 이재의 손맛을 따라갈 수 없어서 계속 노력하는 친구만 봐도 그렇다. 그 친구는 앞으로 이재가 없는 상황을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수시로 이재에게 부탁했던 밑반찬은 어디서 공수해오나? 이재의 손맛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데 그 입맛에 길든 입은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그녀들이 부러워했던 이재의 결혼이 끝났을 때, 모두가 궁금했던 그 이혼 사유를 듣는다. 운이 좋았지만... 이제는 이혼의 이유를 말하면서 그녀가 운이 좋았다고 한다. 그게 운이 좋은 것이었나? 이재의 할 말은 더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더 듣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남들은 모르는 그녀의 인생이 궁금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녀에게는 온통 부러운 것들뿐인데, 그녀의 이혼으로 이제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게 될 것인지도 궁금했다. 이재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 속에 감춰진 진심들은 더 남아있을 것만 같다. '어디서나 위험한' 여자의 인생에서 조금 비켜 간 이재의 미래를 위해 친구들이 고사를 지내준 것이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결말처럼 들려서 아프기도 했다. 그리고 다짐하듯 이어지는, 이재가 놓치지 않고 달려와서 전해주었던 장아찌 누름돌. 삶의 맛을 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간절하게 전해지던 장아찌 누름돌이, 이제는 그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이에게 전해졌다. 장아찌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이재의 손맛도 아니고, 무의 종류도 아니고, 간장 때문도 아닌, 누름돌 때문이었다는 걸. 이럴 수가! 정말 찾아야 할 것을 든제야 찾은 느낌이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이재의 매력이나 생활, 인생은 결코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만들 때, 그 맛을 가장 중요하게 결정짓는 게 무엇인지 바로 알고 살아가게 될 때, 그때 가장 완벽한 맛을 낸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 인생의 안전도,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운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음을...

 

이혼 세일은 무사히 끝났다. 너무 저렴한 가격으로 이재는 자신의 생활공간에 있던 많은 물건을 정리했다. 이재는 남김없이 떠나고 싶어서 좋았고, 친구들은 부러워하던 이재의 모습을 하나 가져온 것 같아서 좋았다. 이재의 손이 닿았던 많은 물건으로 그녀들은 또 다른 흔적으로 이재를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이재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치 그렇게 길었던 여행의 공백은 없었던 것처럼 마주하겠지. 인생의 큰 구멍 하나를 메우고 밟으면서 단단하게 다지는, 짧지만 시원한 느낌에 삶의 두려움 하나 지우고 건너가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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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난 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가 왕이 되는 거로 생각하면 단순한데, 뭐든 그 순서와 절차가 자연스럽지 못함을 발견할 때는 복잡해진다. 그럴 때마다 의심하고 불합리한 뭔가를 찾아내고 싶어질 테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왕의 독살을 의심해본 적도 있을 테지만, 아무도 그 독살에 대해 입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으로만 만났던 조선왕의 순서별 이름만 외우려고 노력했지 그 기간과 왕권 교체 순간의 내밀한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흘려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조선왕의 독살은 그래서 더 궁금하고 흥미롭다.

 

우리 역사에서 이어져 온 각 나라의 왕조가 보통 200~300년을 이어온 것에 비하면 조선이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긴 세월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 긴 세월 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혹시 조선의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게 했던 것은 왕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조선의 왕권은 절대 권력이라고 하는 중국 왕권과 이름뿐이었던 일본 왕권의 중간쯤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의 신하는 왕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당파를 위해 존재하는 당원으로서의 신하였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자신이 소속된 당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동이 올바른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애쓰는 왕의 신하 된 도리를 다하는 것 다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의 신하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크게는 당파를 위해 작게는 개인의 안위와 권력을 위해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자기 당파의 이익과 존재를 위협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그 왕의 재위 기간을 단축하게 할 방법을 연구했겠지. 혹은 허수아비 왕을 세울 방법을 찾았거나. 그런 순간에 필요했던 게, 아무도 모르게 왕을 끌어내리는 독살이라는 확실한 방법을 이용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조선의 왕은 4명 중 한 명이 독살당했다고 한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피를 봐야 했다는 건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왕족이 되고, 언젠가 왕이 되는 이가 있을 테다. 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을 생각하면 그 권력을 모른 척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왕의 자리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항상 목숨을 위협받는 자리였을 거로 추측한다. 보이지 않는 적(?)이 너무 많아서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싶다. 그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위험도 불사할 수 있다는 걸,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알게 된다. 철저한 보안, 왕의 잠자리를 옆에서 지키고 대변까지 확인할 정도의 호위를 하는 곳이 궁궐이다. 그런 곳에서 독살할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완전한 곳은 아니었으리라. 한두 번도 아니고, 조선의 왕 여러 명이 그렇게 죽어갔다는 건 궁궐은 왕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려는 자의 싸움터일 뿐이다.

 

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고, 개정판이 출간되었을 때 읽고, 이번 특별판이 세 번째다. 한 권으로 출간되었던 책이 개정판을 거치면서 두 권으로 늘어난 이유는 독살 의혹을 하게 된 조선왕의 숫자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에 근거하여 시작된 글은 문종의 독살설을 의심하면서 두 권 분량으로 늘어났다. 그러니 조선왕의 독살설은 조선 후기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이 책에 기록된, 독살된 조선왕은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중, 현종, 경종, 정조, 효명세자, 고종까지, 오랜 세월 조선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독살된 왕도 많았다는 비례적인 숫자다. 자연사라고 믿어왔던 문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의심, 단종과 예종의 의문사까지 이어진다.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말에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복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연산군은 자기가 처벌한 사대부들의 재산을 빼앗고 독식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바꿔놓은 기록의 분위기가 연산군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몫한 건 아니었을까. 인조반정으로 소현세자가 사라지고,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 역시 의문사로 사라졌다. 북벌을 꿈꾸었다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어의가 침을 잘못 놓아 죽었다니...

 

개인적으로 죽음이 아쉬웠던 왕이 정조다. 개혁 군주라고 불리던 그가 조금만 더 조선을 이끌었다면, 저자의 말처럼 정조가 아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조가 꿈꾸었던 개혁이 좀 더 활발하게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때 정조가 계속 조선을 이끌며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어떤 결과를 얻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항상 놓칠 수 없는 부분은 '만약'이라는 가정일 것이기에 말이다. 만약에 그때 정조가 조금 더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았더라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운명도 다른 모습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지나온 역사에 만약은 없다. 지나간 역사가 더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 존재하는 이유다. '만약'이 없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지나왔기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권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성 없는 역사에는 미래가 없으며, 미래가 없는 역사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고. 의심의 부분을 드러내놓고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지나간 조선의 역사 속에서 조선왕 독살설이 들추어내는 게 무엇인지, 그것들을 보고 확인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남겨진 자의 역사가 아니라 그 순간을 보면서 찾아내야 할 것들을 들려주며 역사에 필요한 것은 반성이라고 말한다. 반성과 함께하는 역사만이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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