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휴대폰의 진화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통화만 하던 전화가 영상 통화가 되고, 손안의 작은 휴대폰 하나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스마트한 세상을 만든 많은 순간이 룬샷이 아니었을까 싶다. 낯설고 생소한 그 단어, 룬샷(Loonshots)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발상으로 여겼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기에 생긴 말이다. 신조어이지만 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어이면서, 우리 미래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승리의 바탕이 될 것이다.

 

효율과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게 기존 이론이라면, 룬샷은 쓸모없는 발상으로 여기던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중점에 두고 발전시키며 성장을 이끄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사에 한 획은 그은 많은 일이 이 방식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심장질환 사망률을 감소시킨 건, 미생물학자인 엔도 아키라가 청록색 곰팡이에서 발견한 약물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작용 때문에 일본에서 외면받았던 약물이 제약회사 머크가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출시했다. 머크가 돈을 벌게 된 건 당연했다. 누군가는 미친 아이디어라고, 위험하다고 치료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던 게 누군가는 성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도대체 그 미친 아이디어를 본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룬샷의 가장 쉬운 설명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들려주는 노키아의 예다. 무선 전화 시장을 개척한 노키아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 몇몇이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를 만들었을 때, 기업의 지도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깔끔히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가 뭐였냐고? 인터넷이 가능하고 커다란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온라인 앱스토어가 함께하는 휴대폰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휴대폰 말이다. 눈앞에서 성공과 돈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아이고, 사촌이 좋은 땅을 헐값에 산 것보다 더 배가 아프다. 그 땅을 내가 팔았으니...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같은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 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267페이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발상의 전환과 가능성을 믿는 것. 성공한 룬샷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런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지금 눈앞의 것만 보고 투자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략적인 상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룬샷의 성공 사례와 특징을 살펴보면 많은 이론이 바탕에 있고, 발견과 노력, '상전이(모든 것이 변화하는 순간)'에 있다. 모든 상전이는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보통은 두 가지 형태의 인센티브가 생기는데, 대략 '판돈'과 '지위' 정도가 된다. 이 상전이의 원리는 더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구조의 변화로 조직을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안정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익숙한 패턴만 바라보던 것이 좋은 것만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이디어는 넘쳐야 한다. 그 아이디어를 찾는 눈을 길러야 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의 길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룬샷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결과가 아닌 앞으로 마주할 결과를 더 집중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버니바 부시의 레이더는 전쟁 영웅이 아니었나 싶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심장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며 약을 만든 엔도 아키라 박사는 오늘날 심혈관질환 환자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터. 디지털카메라의 발상이 의미 없다고 여겼던 폴라로이드 사의 몰락 역시 당장의 현상만 봤기 때문일 것이다. 룬샷을 무시해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도 위험하다.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발견되고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룬샷과 프랜차이즈(룬샷으로 탄생한 제품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는 서로가 필요하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계속되는 발전과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룬샷 역시 제품형 룬샷과 전략형 룬샷의 균형에 귀를 기울인다. 기본적인 제품의 안정성과 기술 개발의 가능성에 '미친 아이디어'가 함께했을 때 룬샷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고 자본의 안정성을 갖춘 기업이라도 중요한 타이밍의 룬샷을 놓친다면 그 결과는 뭐, 추락이겠지.

 

천재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품을 가지고 건설한 제국이 오랫동안 건재하면 그를 둘러싼 신화가 널리 퍼진다. 그러나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렬히 지지하기보다는 많은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79페이지)

 

기업의 입장에서 룬샷을 잡지 못한다면 망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조금 더 크게 보자면 국가의 위상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서구 사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발견하고 이뤄놓은 기술이 다양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에게 사용되고 기억되는 과학적인 발전은 서양에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이와 인쇄술, 자기나침반, 화약, 대포, 주철, 지폐 등 중국이 먼저인 것들이다. 중국은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전을 세계로 돌리지 못했다. 그건 중국이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서 베이징, 만리장성, 대운하 등 프랜차이즈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너무 성장한 나라였기에,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친 아이디어에 더는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보다 정교한 기술, 새로운 생각들을 '과학적 방법'이라는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의 발전에 바탕이 된다.

 

그저 우연히 발견된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성공한 룬샷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룬샷 육성을 위한 설계가 중요하다. 저자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룬샷의 성공을 말한다. 대부분 회의적이고 불확실한,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기록 긴 시간을 이겨낼 것. 무엇이 문제인지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는 가짜 실패에 속지 말 것. 실패의 이면을 파고들어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낸 의사결정의 질을 생각할 것. 룬샷을 폭발하는 조직의 시스템을 만들 것. 룬샷을 만드는 것보다 룬샷을 육성하는 정원사가 될 것. 모든 요소, 룬샷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끈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룬샷을 육성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미친 아이디어는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발견과 성공시킨 그 이후가 진정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개인, 팀이나 기업, 아울러 한 나라의 통찰력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0-05-0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한테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 사람 많을 것 같습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사람 많았겠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이 관심 갖지 않은 걸 잘 알아본 사람도 많았겠습니다 바로 앞보다는 멀리 내다봐야겠지요 중국이 먼저 만든 것들이 세계로 뻗어가지 못하다니 아쉽군요 세계가 서양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좀 다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걸 누군가는 잡고 누군가는 놓치겠지요


희선

구단씨 2020-05-13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그런 눈을 갖고 싶어요. 기발함을 알아보는,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눈. ^^
익숙한 것이 편하고 오리지널이 주는 슬기로움이 있겠지만,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있고 인간은 또 그 변화에 어울리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2020 고종훈 한국사 동형모의고사 시즌 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 김중규 선행정학 ALL PASS 모의고사 서울.지방 9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 선재국어 나침판 실전 모의고사 Vol.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간힘
유병록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고 나는 아들을 잃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행복한 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행복 대신 보람이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했다. (201~202페이지)

 

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슬픔을 상상하곤 한커. 그 슬픔의 대상이 누구일까, 그 슬픔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막상 내 앞에 닥친 깊은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끝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하는 슬픔의 크기는 점점 커갔다. 그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살면서 책임지고 겪어야 할 무게가 커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은 고작 숙제를 안 해가서 선생님께 혼나는 정도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그 슬픔이 크기를 키워 와서, 지금은 숙제 정도로 슬픔을 가늠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과 죽음으로의 이별 같은 일을 큰 슬픔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기준을 슬픔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나는 아직 그 슬픔을 경험하지 못했다. 언제가 닥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그 슬픔을 상상하면서도, 설마 그 슬픔의 깊이가 이미 경험한 사람만 하겠는가. 저자가 어린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잘 이겨내기를, 잘 버티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언젠가 내가 겪을 그 시간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행의 순간이겠지만, 언제까지 그 슬픔을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안간힘을 버티며 살아간다. 슬픔도 이겨내고, 불행도 밀어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말이다.

 

 

어떤 침묵은 외면이겠지만, 어떤 침묵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따뜻하다. (37페이지)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슬픔이 찾아왔다. 저자는 아들을 잃었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고,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중이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다가오는 건, 언젠가 내가 했던 생각들이 그대로 비쳐서다.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하는 게 정말 어렵다.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 순간 내가 건넬 수 있는 마음이 어설픈 위로로 비칠까 봐서다. 그런 마음을 저자는 염려한다. 그가 겪은 아픔이 주변 사람들에게 퍼질까 걱정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금방 또 잊을 거로 생각해서 서운함을 비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내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그들의 일이 되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공감하는 슬픔으로 여길 수도 있다. 기꺼이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불편함은 상대를 향한 서운함으로 저장된다. 게다가 내가 겪는 슬픔의 분위기가 그들에게까지 옮아간다면, 나 하나 때문에 그들의 감정이 내내 슬픈 채로 머물러야 한다는 게 또 미안해진다. 그래서 점점 주변과의 거리를 두게 된다. 내 마음이 감당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들의 웃음이 가득한 일상에 나의 아픔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슬픔은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과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어린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그대로 가슴에 꽂아주었고, 함께하는 아내만이 자기의 고통을 공감해주리라 믿었지만 그마저도 온전하게 같지 않았다. 부부의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을 같이 잃었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미세하게 달랐다. 저자는 그런 아내에게까지 서운했을 것이다. '영원히 지금 그대로의 슬픔을 당신과 공유한다고 믿었는데, 그 슬픔을 벗어나는 방식이 당신과 내가 이렇게 달랐구나' 싶은 순간, 마치 아내의 슬픔이 더 작은 건 아닐까 하는 오해도 하지 않았을까? 듣다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이고 바탕이 되는 마음들이 보인다. 이것저것 재는 것이 아닌, 가장 순수했던 마음 그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 마음과 같으면 그렇게 이해해주는 게 고맙고, 내 마음과 다르면 괜한 미움과 서운함이 겹쳐 감정이 멀어지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서, 그 상황과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으면서도 조금은 더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심을 잡고 슬픔을 끌어안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그 방법은 각자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아들과 함께한 시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죽은 이가 남긴 기록을 생각한다. 아직 학교에 다닌 적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아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부모로서 기억하는 모든 것은 아들이 남긴 게 된다. 아들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편안하게 잠들었던 작은 침대, 살던 집의 곳곳에서 풍기는 아들의 자국들. 그 공간을 떠나면 아들의 흔적을 금방 지우고 슬픔도 소멸할까 싶지만, 저자는 굳이 그곳을 떠나면서 아들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마주하며 기꺼이 끌어안았다. 우리 삶은 슬픔을 외면해도 계속되니까. 그러니까 굳이 그 아픔을 빨리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흐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슬픔도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방법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 꼭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따라해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해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77페이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말에서 먼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반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존중을 얻는 방법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많은 나이가 아니라, 깊고 넓은 마음뿐이다. (147페이지)

 

 

나에게 다가온 슬픔을 잊으려고 애쓰지 않고 간직하면서 삶을 유지하는 이야기 같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기억하면서 슬픔에 빠져있기보다는, 아들의 빈자리만큼 더 나은 삶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맞이한 비극에 주저앉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면서 아들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아내와의 시간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그의 성장을 함께한 가족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가 처음 겪은 상실은 존경의 의미를 기억하게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보고 느꼈던 일들에 그의 다짐을 더 하고, 관계를 더 현명하게 이어가는 방식을 경험한다. 매 순간 삶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문장에, 그가 안간힘을 내며 나아가는 모습은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된다.

 

그 대상을 잊는 게 반드시 슬픔을 지우는 방법은 아닐 테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극복하면서,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떠나간 것을 잊고 또 다른 것들로 삶을 채우면서 나아가는 일이 때로는 버거울지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0-05-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부모보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식은 자기 분신과도 같으니 자기 살이 떨어져나가는 느낌... 그런 마음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아요 아이가 죽고 사망신고 하는 일도 무척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부부라 해도 슬픔이 똑같지 않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누구 슬픔이 더 작다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둘 다 힘들겠습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희선

구단씨 2020-05-07 22:32   좋아요 1 | URL
그러겠죠?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 슬픔이 가장 큰 슬픔일 거예요.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 슬픔도 같을 거로 생각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픔은 다 똑같지가 않더라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힘든 시간을 같이 걸어가는 동안 슬픔도 같이 줄어들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