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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 방황하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필수 심리 실용서 ㅣ 세상 안내서 1
김현철 지음 / 마호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왜 대부분 문제에서 용서와 화해가 당연하게 언급되는 걸까.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된다. 이미 상처받았는데,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을 건데, 왜 자꾸 그러는지... 시간이 흘렀으니까, 지나갔으니까, 상처를 준 이가 용서를 구했으니까, 하는 이유로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만드는지 알 수 없다. 문학을 읽다 보면 대부분 그 화해로 마무리 되는 글이 많더라.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 특히 엄마가 즐겨 보는 아침, 저녁, 주말드라마도 그렇더라. 가슴을 후비고 도려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말들과 경제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사람들을 결국에는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면서 끝나는 드라마가 거의 다였다. 아마도 그 문학이나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그런 결말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길 염원해서일까. 그렇다 치자. 나 역시도 그런 바람이 있으니까. 다만, 그런 바람을 빌미로 그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얼마나 부담이 되고, 분노로 승화하는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거의 1년 정도를 상담 받았고, 그 기간 동안 담당 선생님이 한번 바뀐 것 말고는 동일한 내용의 진료였다. 처음 진료했던 선생님은 환자의 말을 아주 잘 들어주었다. 네, 그렇군요. 네. 네, 잘하셨네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질문을 하는 것보다 환자에게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고 대부분의 진료 시간을 환자의 대답을 듣는 것으로 채웠다. 반면, 바뀐 선생님은 환자의 말을 들어주되, 잘 한 것은 잘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따끔하게 혼을 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어떤 진료방식이 좋은 것일까. 무조건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 아니면 환자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옳고 그른 방식을 인지하게 해주는 것? 결과만 말하자면 그 환자는 선생님이 바뀌고 나서 한두 번 더 진료를 받다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바뀐 선생님은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면서, 자꾸 자기에게 틀렸다고 한다면서, 짜증이 난다면서 병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처음 선생님한테는 자기 말을 아주 잘 들어준다면서, 말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다면서 별 투정을 부리지 않았는데 두 번째 선생님에게는 화를 내면서 병원에 안가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자신이 왜 진료를 받기 시작했는지를 잊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그 환자의 모습을 보면 병원 진료를 받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로 다들 자기만 싫어한다고 했다. 엉뚱한 공상이 정신을 갉아먹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환자는 그렇게 살면서, 늙어가고 있다.
오래 전에, TV를 통해 저자를 본 적이 있다. 기존에 봤던 전문의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맘에 들어서 이름을 기억했다. 라디오에 고정출연하는 방송도 들었다. 그동안에는 늘 ‘지나간다, 다 그런 거다, 이해해라, 참아라, 화해해라, 용서해라...’ 했던 말로 답을 전했던 문제들을, 저자는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게 이 책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저자의 사이가 같은 말이 그리워서 펼쳤다. 아닌 건 아니라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과 싸워도 된다고, 내 안의 상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좋았던 글이다.
신경정신과. 흔히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질병의 치료를 요하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마음의 문제라고 읽어도 괜찮을 듯하다. 그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저자의 다른 작품보다 일부러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싶어서 펼쳐들었던 이유다. 무조건 들어주기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 속에서 적절한 충고를 하고 있을까.
내가 읽어본 바로는, 저자는 후자 쪽이다. 아닌 건 아니라고, 현실 속 살아가는 모양에 맞게 충고한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을 처방전처럼 내놓는다. ‘명절의 본질은 ‘화목’이지 ‘만남’이 아니기에 안 내키면 안 가는 것이 상책.‘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하는 말들 중의 하나다. 너희 집에 갔는데 우리 집에는 왜 안가냐고 싸우지 말고, 각자의 집안 경조사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 단, 상대방에게 의사는 물어볼 수 있되 강요하지는 말라고. 가기 싫다는데 복화술처럼 입에 욕을 달고 몇 시간을 고생하면서 가지 말고, 가기 싫다는 사람에게 당연함 운운하면서 강요하면 안 된다고. 저자의 저 말은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행해지는 마음의 폭력을 방지하는 처방인지도 모른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의무감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화가 어려울 때, ‘소귀에 경을 읽어줄 땐 소의 언어로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나만의 언어로 얘기하면 백번 천 번을 얘기해도 상대가 못 알아듣는다. 상대가 소라면 나도 소가 되어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걸 모를까? 아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화를 내고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방식, 몰라서 제대로 인지하는 못하는 응대, 자칫 예의를 벗어난 일이 될까봐 주저하는 일. 그런 일들로 내 안의 감정은 분노를 쌓고, 용서가 어렵게 되고, 화해는 제스처를 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마음의 병을 쌓아가는 일을 멈추게 하려고 한다.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 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일들을 들추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고, ‘싫으면 하지 마.’ 라고 말하는 듯한 한마디로 쿨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다고 어린애 말장난 같은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내 안의 감정 쌓임으로 힘들어질, 숨어 있던 마음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시간과 관계가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과 서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라는 저자의 말은 우리 마음이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길임을 안내한다.
마음이나 세상이나
시간이 갈수록 꼬이지만
이 모두를 리셋 하는 건
이전의 그와 또 다른 그들의 희생이다. (본문 중에서)
읽다보면 특별한 것 없는 처방전 같다. 하지만 시원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많은 감정들과 예의들로 상처받고 힘들어한다. 감정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가 많은 정신적인 아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저자가 단 한 문장, 혹은 몇 줄의 문장으로 상담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음이 주관하는 일, 그 안에 생기는 상처, 애도, 상처를 만드는 가족, 사회, 연애, 행복을 향하고자 하는 성공, 생존의 방식을 둘러싼 문제까지 여덟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은 맨 처음 제시했던 마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마음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인 것이다. 헛된 망상 같은 것에 기대기에는 우리 사는 세상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 현실 속에서 부딪히면서 쌓여가는 마음의 병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면 더 없는 명의겠지만, 적어도 그게 아니라면 그 마음의 병을 조금은 덜어내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내 안의 마음이, 상처나 아픔이 가벼워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하나의 문장이라는 게 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읽고 보니 충분하다. 그 한 문장에 모든 마음의 문제가 담겨 있고, 뜻밖의 해결이 함께 있다.
얼마 전에 진맥을 받을 적이 있다. 한약을 잘 먹지 않으니 진맥 받을 일도 없지만, 나는 진맥 받는 일 자체를 싫어한다. 진맥을 받다 보면 상대가 한의사가 아니라 점쟁이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육체적인 병도 짚어내지만, 결국 마음의 병을 먼저 알아채기 때문이다. 그런 알아챔이 싫어서 진맥 받는 것도 싫어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다른 이를 따라가서 진맥을 받고 보니, 한의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더라. 그 사람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진맥이 끝나고 종이에 뭔가를 한참 적더니, 나에게는 한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대신 마음의 분노를 먼저 뿜어내야 한다고 했다. 마음 속 분노를 터트려야 내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시기상으로 보면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내 안에 어떤 마음과 감정의 상처가 내재하고 있었는지를 내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다 같은 말이었다. 저자의 이 책을 읽고 보니 더 잘 알겠더라. 사람이 늙고 병들어 육신의 아픔을 가져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마음이 병들어 정신적인 아픔을 가져오는 것은 풀어내야할 숙제 같은 것이다. 그 숙제만 풀면 병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쉽지 않으니 그 병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책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지.
지금 부모와 화해한다 해서
과거에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진 않는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과거의 그 사람들이지
늙고 기운 없는 현재 이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용서라 착각하며 행하는 대부분은 애도다. (본문 중에서)
가르치려만 드는 책보다 이런 글이 좋다. 예의상 하지 못했던 표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아야 했던 일들이, 감정을 숨기느라 곪는 줄도 모르고 억눌렀던 마음을, 다 터트려도 될 것만 같다. 변해가는 시대에 변해가는 감정이 맞는 거다. 이런 처방전을 오래 전 사람들이 봤다면 예의에 어긋나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변해가는 치료의 모습도 인정하자. 이게 정답이 아니라, 이런 방법도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돌직구를 던지는 듯한 저자의 말투가 참 개운한 책이다.
이모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안 일로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일주일 정도 시간을 잡아놨는데 차질이 생겼다. 여기 저기 전화해서 몇 가지를 미루고 다시 날짜를 잡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남겨진 사람은 현실을 산다. 죽어간다는데, 곧 숨이 끊어질 거라는데, 나는 이모부의 죽음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이모부는 좋은 사람이 아니므로. 다만, 그 죽음에 슬퍼하며 손을 놓지 못하는 그 가족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모에게는 딸만 셋이다. 이모부는 이모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서, 아들을 낳아오겠다며 밖으로 돌았다.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모에게 좋은 남편은 아이었던 듯하다. 딸들이 자라고 이모에게 잘하면서 이모 마음이 좀 편해지나 했더니, 몇 년 전 이모부는 병에 걸렸다. 한 달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게 들고, 퇴원 후에도 계속 큰 금액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평소 하루 세끼를 모두 외식으로만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 그 모든 돈을 딸들이 다 대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무시하던 딸들 덕분에 목숨 유지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지금 이모 마음이 궁금했다. 이모부와 살면서 좋았던 것도 있겠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이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을 보내는 마음이 어떨지... 이런 마음을 나도 곧 확인하게 될지 모르겠어서 더 무거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