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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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고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수업시간표를 내가 만드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2년을, 한 교실에서 이미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받았던 익숙함을 생각하면, 갑자기 변한 학교 환경이 무척 낯설었다. 더군다나, 스스로 시간표를 만들어 수업을 들으라니 무인도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처음 1년 동안은 허둥지둥했다. 쉬는 시간 10분 사이에 학교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강의실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표를 짜고 말았으니, 강의 시간만 볼 게 아니라 강의실이 어디인지도 확인해야 했던 걸 몰랐다. 어찌 되었든 하나씩 배워가면서, 나에게 맞는 수업을 찾아가면서 수업시간표 짜는 걸 익숙하게 해내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중요했고, 그런 경험은 몸으로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저절로 습득하는 거였다. 당연하게 간다고 생각했던 대학이 이런 생활이어야 한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당황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더 많아지겠지. 세상이 겁나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알지 못했던 것, 배워야 할 것이 무척 많을 텐데, 그때마다 옆에서 누가 바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하루 살면서 알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그때마다 내가 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 반드시 배우겠다는 다짐과 목표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그럭저럭 배워지는 것들. 질문도 하기 전에 나와 있는 답대로 살아보니 어려울 것 없이 괜찮더라는...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배워지는 것들로 조금 더 편안해지고, 알아지는 것이 많아지면서 삶의 불편함이 줄어들 때마다, 매번 궁금하고 알아야만 하는 것의 답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잊는 게 아닐까. 나보다 앞선 사람들이 경험하고 들려주는 답으로 오늘이 살아지는 경우가 늘어나다 보니, 새로운 답을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해결 방법이나 답이 필요한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거고. 대학에서 처음 수업시간표를 만들면서 우왕좌왕했던 게 생각나는 순간이다. 처음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계속 실수하고 여기저기 물은 다음에는 내가 찾아서 만들고,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시간표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점차 나아졌다. 수업 시간, 이동 거리, 수업과 수업 사이의 빈 시간을 줄여 등교하는 날을 줄이기도 했다. 이미 정해진 것들에 익숙하게 살아왔던 내가 달라진 환경을 사는 방법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그건 그때뿐만이 아니라, 그다음 번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할 자세의 한 부분이었다. 내가 찾아야만 하는 삶의 방식, 혹은 매번 나를 찾아올 위기나 상황에 대비하는 일,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답을 구하는 것.

 

처음 책을 접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전공 서적도 겨우 챙기던, 책에 전혀 관심 없던 인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어떤 목적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즐기고 싶어서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어가던 게, 이제는 읽지 않아도 옆에 책을 두는 생활을 한다. 습관이다. 어느 순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더라. 그런 나에게 저자는, 질문을 찾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말한다. 재미로 읽던 책이 점점 답을 구하는 경우를 동반하면서, 여전히 편식하지만, 분야를 넓혀가며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저자의 글을 만났다. 그동안은, 책에서 얻는 정보가 나에게 명확한 답을 주기를 원했다. 익숙하게 살아왔듯, 질문이 아니라 답을 찾으면 되는 거였으니 말이다. 살면서 거듭되는, 고민하고 선택하며 결정해야만 하는 일들, 어떤 문제의 시작을 끝맺게 하는 답이 되어줄 이야기를 책이 들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저자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으란다. 답도 찾기 어려운데 질문을 구하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더 궁금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 다른 방향을 제시할 것만 같은 저자의 시선은 무엇일까 하고.

 

그리고 책은 또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의 뇌가 몰입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글을 읽지만,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읽는 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책. (74페이지)

 

막상 펼친 이 책은, 저자가 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라고 묻는지 그 질문 자체를 공감하게 한다. 책에서 발견한 문장으로 생각이 많아지면서 질문은 이어지고, 질문이 계속될 때마다 답이 더 다양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매번 답이 명확하게 나오는 건 아니다. 이렇게 고민했다가, 저렇게 생각했다가, 이런 답이 맞을까 또 물음표를 그렸다가, 다른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더 많은 물음표를 머릿속에 띄우기도 하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어떤 질문이 계속되고 이어질 때마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구함으로써 사고는 변해간다. 이게 최선일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는, 이 답이 맞을 것 같지만 오답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지하게 된다. 매번 옳다고 생각했던 게, 이미 그렇게 알고 행해왔던 게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게 한다. 결국은, 오늘을 사는 진지함과 내일을 생각하는 삶의 방향이었다. 어느 날 사람이 싫어져 선택했다는 책. 저자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읽어온 책으로 답이 아닌 질문을 찾는다. 어떻게 보면 서평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이 책에서, 저자는 자기가 읽은 책으로 찾은 질문을 들려준다. 소설에서부터 고전, 인문서까지 다양하다. 저자의 '뇌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발휘할 차별성을 기대했는데, 막상 펼쳐본 이 책은 그 기대에 부응하듯 장르의 다양함으로 호기심을 채운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목록이라고 생각하니, 참 여러 방면의 글이 그를 만들었구나 싶기도 하다.

 

'함께 혼자' 살기를 추천하며 사르트르의 『닫힌 방』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부터 눈길을 끈다. 평소 『닫힌 방』이 궁금했던 터라 눈여겨본 부분이기도 한데, 내가 많이 어려워하는 '관계'의 문제를 더 생각하게 하고 있어서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관심이 아닌 상태에서 관계가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항상 고민했는데, '함께는 괴롭지만 혼자는 외로운 게 인간의 조건이기에, 쇼펜하우어는 ‘함께 혼자’ 살기를 추천한다. 외롭지 않을 정도로 함께 가지만 ‘인생’이라는 길은 결국 나 홀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29페이지)'라는 문장에 공감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반복되는 문제와 고민에 결국 나 홀로, 하지만 '함께 혼자'라는 방식의 또 다른 길을 여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다가 또 같은 고민이 이어지는 시간이 반복되겠지. 혼자여서 외로웠다가, 함께여서 부담이었다가 하는 게 인생이라는 듯이.

 

예니 에르펜베크의 소설 『매일마다 저녁』에서는 "만약에……"라는 질문을 끝없이 반복하고, 가지 않고 경험하지 못한 시간의 질문을 잇는다. 평소에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질문인데, 책으로 그 질문이 잊지도 않고 계속 찾아오는 걸 확인하는 듯했다. 알렉산드로스 황제와 다리우스의 대조적인 모습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은 누구인가 묻는다. 아니, 영웅의 의미부터 다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브리앙은 질문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알렉산드로스 황제의 그늘 아래 잊힌 다리우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병사와 친구들을 희생시킨 알렉산드로스 황제. 반대로 포로가 된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제국의 왕관도 포기하려 했던 다리우스 대왕.

우리가 진정으로 존경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잔인한 승자일까? 아니면 가족을 사랑한 패자일까? (149페이지)

얼마 전에 읽은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끌어내고 있었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폭군과 영웅은 한 끗 차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상황,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폭군은 영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브리앙의 질문에서 또 한 번 고민한다. 나의 삶에서 비슷한 순간이 온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되어야 하는지 다리우스가 되어야 하는지. 금방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명확하게 하나의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이런 질문에 답은 하나일 수 없다는, 답을 회피하는 지연작전이라도 써야 할 판이다. 듣고 보면, 승자가 쓰는 역사에서 그 순간의 진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매번 같은 부분을 읽으면 같은 고민을 또 할 것 같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그들 중 누구였을까, 오늘과 미래의 나는 누구여야만 할까, 하고.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미래에 새로운 기록이 발견된다면 과거는 재해석될 수 있다. 과거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의 영향을 받는다.(180페이지)'는 저자의 말처럼, 이 또한 우리 미래에 다른 해석으로 등장하여 질문의 방향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2017년 3월의 대한민국은 먼 미래에 어떻게 써질까. 온갖 상상과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그때는 제발, 많은 것이 바로잡히고 정의가 살아있던 시간으로 기록되었기를 바라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대할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다르다'는 이유가 저지르는 학살과 폭행과 차별을 경고한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인 거다. 때로는 어깨의 짐이 무거워서 변해버리고 싶은지도, 흉측한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그레고리를 가족으로 인간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레고리에게 모든 짐을 지운 가족은 그를 버린다. 그리고 홀가분해 한다. '이게 인간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마음은 '도대체 가족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이기적인가?' 하는 슬픔이 보태진다. 내가 이 작품으로 처음 느꼈던 건 가족이란 관계의 배신이었다. 그다음에는 그레고리에게 모든 무게를 던진 가족들의 이기심에 분노했다. 그러다 점점 내 마음의 물음표가 변하는 걸 느꼈다. 내가 그들 가족 중의 하나였다면 나는 흉측한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레고리가 느낀 부담은 다른 가족의 부담으로 시선이 변한다. 저 벌레가 가족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결같은 애틋함이 이어질 수 있는지, 오래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여기서도 적용해야 하는지... 한마디로 답할 수 없었다. 답이 와야 할 자리에 질문만 더해갔다. 누군가는 이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가슴속 슬픔을 먼저 떠올린다. 어떤 생각을 먼저 하든, 가슴속 고민과 질문은 계속된다는 거다. 만약에, 나라면, 어떻게, 인간이기에 해서는 안 될, 혹은 인간이기에 저렇게 잔인할 수 있나, 왜 우리는 그런 생활을 사는 걸까, 같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으라는 저자의 말을 계속 고민하면서 읽게 된다. 책으로 답을 찾으려 했던 기억을 뒤로하고 끊임없이 이어질 질문을 떠올리면서 그동안의 시간을 생각했다. 기존에 나와 있는 답, 남들이 제시하는 과정, 이미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살아가는 게 편하다. 문제 해결의 무난한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과거를 살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며, 내일을 살아야 한다. 당장 앞의 문제만 보는 건 우리의 오늘과 미래를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답을 구하는 일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답 역시 질문 다음에 나오는 거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늘어날 때마다 또 다른 고민이 끼어들고, 그때마다 답을 찾으려하면 할수록 물음표만 늘어났던 걸 기억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저자의 말처럼 그건 질문이었다. 모든 순간과 상황을 잘 대처하기 위해 답을 찾으려는 몸부림에 앞서 찾아오는 진리. 질문이 있어야 답을 갈구하기 마련이니까. 아마도 저자는 그 순서를 자주 잊는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미로 보면, 간단한 서평의 나열이 아니라, 이 책은 저자가 '책'을 매개로 경험한 시간과 그 책으로 파생하는 질문을 이어가는데 방점이 있다. '글을 통해 남겨진 이야기는 책이 되고, 그런 글과 책으로 인간이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살게 한다'는 것.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그의 사고의 장을 열어준 책으로 새로운 질문을 찾음으로써 더 넓고 큰 통찰의 장을 만나게 된다는 거다. 거기에 우리의 미래를 같이 둔다. 계속되는 질문으로 우리의 삶에 다양한 그림을 그린다. 그때마다 변화할 것이다. 질문의 다양함과 크기도, 끌어오는 답도, 우리가 살아갈 시간도.

 

많은 책이 간단하게 언급된 것에 비하면, 소개된 책은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미루기만 했던 갈증으로 남은 이탈로 칼비노, 묵직한 내용의 궁금증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던 움베르토 에코, 상상력의 극치와 현실적인 판타지를 목격할 것 같은 더글러스 애덤스, 『율리시스』 때문에 더 애가 타는 제임스 조이스, 『변신』 때문에 다른 작품이 더 궁금한 프란츠 카프카, 랭보 시집까지. 읽어보고 싶은 목록만 더 늘었다. 대개 이렇게 책이 새끼를 치는 책들이 남긴 우울함이다. 읽고 싶은 목록만 늘어나고, 안 읽은 게 많아서 더 궁금해지는... 저자가 언급한 많은 책이 궁금하여 찾아보고 싶었던 중에, 아직 국내 미출간 도서가 많았다. 사람 마음 참 이상하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살았을 그 책이 여기서 언급되니 더 궁금해지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이라고 하니 더 갈증이 나는 건 무슨 심리더냐...

 

 

#김대식 #어떻게질문할것인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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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술 - 작가들의 이유 있는 음주
올리비아 랭 지음, 정미나 옮김 / 현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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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싶었다. '작가'와 '술'이라니.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부분도 있었다. 뭔가 조금 알 것 같은 분위기. 글을 쓰는 데 있어 술이 작용하는 힘이 어느 정도일까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더라. 술이라는 게, 작가라는 직업에서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술이 인간에게 가져오는 부정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거다. 흔하게 보아왔던 장면들일 텐데도 말이다. 뭐든 적당하면 좋고 약이 되지만, 과하면 독이 되는 건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법칙인가 보다. 술이 힘이 되어 쓰는 아름답고 멋진 글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보는 도구가 되었다.

 

올리비아 랭은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존 베리먼,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등 여섯  작가의 삶과 작품을 들춰보며 그들과 술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추적한다. 추적이라고 하니 좀 으스스할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궤적을 밟으며 그 안에서 함께한 술과의 동거를 파헤쳤다는 게 더 어울리겠다. 좋은 말로 술을 사랑했고, 나쁜 말로 술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즐기는 걸 넘어서서 알코올중독에 빠지기 일쑤였고, 삶은 평온하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장르에 조용하고 평탄한 삶이 주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로 그동안 접해온 작가들의 삶은 평범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절대 평탄하지 않은 삶일 수밖에 없는 게 예술가들이 아닐까 싶다. 그 누구보다 술을 좋아해서 즐겼고, 그 영향으로 많은 문학 작품도 토해냈지만, 그들의 삶은 영원히 숙취 해소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던 듯하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마지막을 보낸 뉴욕의 한 호텔을 시작으로 미국을 돌았던 저자는 각 작가의 삶과 술의 연관성을 찾고 그들의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하길 기대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흐음...

 

하나하나 듣고 있자면, 나는 여기 소개된 작가들이 술과 보낸 시간에서 하는 말이 작가라는 직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너무 당연한가?) 직업의 특성에 하등 상관없이 보였다. 그냥, 여기저기서 봐왔던 술에 의존하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 비극에 가까운 인생의 마지막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그들만의 특징은 아니었던 거다. 다만, 작가가 술과 함께했을 때 불러오는 글의 효과를 그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남아있다. 그들의 모든 작품을 읽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들어왔던 그들 작품의 명성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성장 배경에서 생긴 우울한 삶의 시작은, 자기혐오로 자존심까지 추락했으며 늘 위태로웠다. 그렇게 이어진 술과의 자연스러운 인연이 그들의 글로 승화된 것 같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렇게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 술기운에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글을 쓰기 위해 술이라는 약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이었던 거라고.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이 그걸 증명하는 건지도 모른다. '술이 기분을 돋워주고, 감정이 고양되고, 그런 감정 때문에 이야기가 태어나고...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맞추기는 힘들지만, 글에 감정이 빠지면 안 될 것'처럼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술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대로 드러낸다. 그들에게 글을 쓰는 건 숙명처럼 보였고,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써야만 했다. 그러다가 주객이 전도된 거겠지. 술에 저당 잡힌 목숨이자 애증의 관계. 막말로 욕하고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어떤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여섯 작가의 술 인생이 참 안타깝게 들여오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안에서도 의외였던 게 술로 맺는 작가들끼리의 인연이었다.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몇 시간 후 많은 사람 앞에 서서 강의해야 하는데도 술을 사러 가는 작가들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만나면 술만 마셔댔다는 치버와 카버. 작가들이 만나면 작품 이야기를 하고, 진지하게 문학을 두고 토론의 장을 열 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술로 쌓은 시간이라니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뭐, 실망하진 않았는데 '작가'라는 대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변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느꼈던 거지만, '작가=글'을 동일시하지 않게 되더라는... 글과 글을 제외한 작가의 그 어떤 것들이 비례하는 건 아니므로. 술집에서 처음 만났다던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다. 술로 맺은 인연이 적으로 돌아서기도 하면서 서로 떠올리기도 한다.

 

이 그들의 작품을 더 빛나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치명적인 유혹 때문에 많은 것을 망가뜨리고 놓치면서 산다는 건 불멸의 법칙이다. 저자 자신에게도 가족 때문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더 관심 두는 주제였나 보다. 너무 담담하게 풀어가고 있어서 저자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저 작가들의 알코올 인생이 어떻게 작품에 영향을 주고 어떻게 무너져가는 인생을 만들어갔는지 들려주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글의 분위기로는 저자의 감정을 자세히 읽을 수가 없지만, 곳곳에서 들리는 알코올중독 작가들의 책임 회피성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분노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들 작가가 술을 대하는 처지와 반대의 자리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래도 글을 생각하면 술이 필요하구나 하는 긍정의 생각을 하다가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온갖 상처를 주는 작가들의 이런 변명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별수 없구나 하는 실망의 생각이 들더라. 작기이기에 앞서 그저 술로 저지른 많은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만 같아서.

 

작가와 작품이 주가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 안에서 술의 작용은 뺄 수 없었고... 하지만 작가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과 술의 관계에서 더 보게 된다. 술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더 감정적이고 완벽하게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면의 것을 보고 있자면 술의 부작용이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술이, 누군가의 인생이나 시간을 더 깊어지게도 할 수 있고, 그 나약함을 더 증폭시켜 고통스러운 삶을 만든다는 걸 보게 한다. 술의 양면성, 부작용, 혹은 긍정의 효과, 거기에 작가와 술이 만나면 어떤 삶이 펼쳐지는지 흥미롭게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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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4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이나는 클래스
지난번에는 방송을 놓쳤는데 오늘은 우연히(?) 봤다.
챙겨보고 싶은 프로그램 . 쉽고 재밌게 들려서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처음으로 유시민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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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열광하며 보던 때가 생각난다.

도서관에 있기에 가져와봤는데, 소설로 읽으니 좀 다르다.

아마 드라마로 보던 그때 책으로 읽었어도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었겠지.

랠프 신부님 편애 모드로 완전 빠져들었었는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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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저널 -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혼조 마사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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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 종편 채널의 기자가 발견한 태블릿PC로 사람들은 영원히 숨겨졌을지도 모를 어마어마한 진실을 마주하고 있다. 여대생들의 목소리는 입시 비리를 파헤치는 문을 열었다. 몰랐다면, 아니 짐작했으면서도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로 고요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입학시험에 통과하겠지 싶은 간절함으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낸 세금이 우리 삶을 더 안정되게 해주기를 바라면서...

 

한 가지 사건에 관해서 온갖 사람들이 취재한 것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검증하고 비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널리즘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신념을 가진 저널리스트는 많지 않다. 그러니 신문을 읽는 우리도 쓰여 있는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항상 의문을 품고 읽어야 한다. (112페이지)

 

언론이 쏟아내는 모든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그때 달랐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것으로 판단하며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이슈가 터지면 또 무엇을 감추려고 저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매체가 전하는 정보는 세상과 통하는 하나의 창구가 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그런 정보는 누가 전하나. 기자들이다. (외압이 없다는 전제하에) 어떤 의문이나 제보가 감지되면,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하고 기록하면서 진실을 전할 거다. 이제껏 그렇게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자 사명이겠지. 하지만 그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은 그 취재 과정이나 자세를 다 알 수 없다.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공식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궁금했다. 그들이 바라는 특종을 위해 뛰는 오늘의 모습은 어떤 걸까. 그들이 취재하려고 달리는 모든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었다. 진실을 좇아 한밤중에도 취재에 나서는 기자 세계를, 신문기자로 활약했던 작가의 경험 때문에 더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니 더 듣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다.

 

7년 전 아동 유괴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취재 중에 살아있는 피해자를 죽었다고 치명적인 오보를 낸 주오 신문. 그 책임으로 본사에서 지국으로 밀려나고 부서를 옮긴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들, 기자 고타로와 후지세, 히로후미의 현재 모습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특종 기자 고타로는 주오 신문 지국에서 일한다. 그는 여전히 특종에 목말라 있지만, 지국으로 돌면서 그 기회는 계속 멀어져간다. 어디 본사에 있을 때만 하려나. 그래도 그의 기자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 전의 실수 때문에 오히려 더 공정하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면서 기사를 신중히 처리한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그 실수로 피해자 가족은 고통스러웠고, 사람들은 주오 신문의 보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자 자신의 마음에 치명적인 주홍글자가 새겨졌다.

 

그러던 중 또다시 아동 유괴 사건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고타로가 있는 사이타마. 도쿄가 아니었지만, 사건은 7년 전과 비슷하다. 이상하다. 이미 7년 전 사건의 범인은 사형을 당했는데? 무엇이 그 사건과 자꾸 연결해서 생각하게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면서 7년 전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단서를 고타로가 다시 파헤치기 시작한다. 수법이 비슷하다. 어쩌면 동일범일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의심은 이 사건이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 할수록 뭔가 계속 가려진 느낌이 든다. 뭘까? 뭐가 자꾸 안개가 낀 것처럼 이 사건을 투명하게 만들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취재는 계속된다. 더는 특종 때문에 불확실한 내용을 전하지는 않으리. 마지막까지 취재와 확인을 거듭하면서 진실을 전하는 것에 목적을 두겠다고 마음먹는다.

 

한번 펼치면 도중에 내려놓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다. 기자들의 취재 과정이 흥미롭게 들린다. 오랫동안 닫힌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안의 모습을 샅샅이 훑은 느낌이랄까. ‘아, 기자는 이렇게 취재하면서, 이렇게 정리하고, 마지막까지 이런 긴장감을 놓지 않는구나!’ 싶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눈으로 읽히는 맛이 그러했으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다. 막상 현장에서 뛰는 느낌은 이보다 더한 긴장감은 물론이고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일 듯하다.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서 취재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들이 기사를 쓰는 목적은 단 하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사람의 거짓말이나 침묵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게 씁쓸했다. 각자의 입장을 아주 모를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기자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취재해야 하고, 경찰은 사실 공개의 적정한 선을 두고 수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목격자 역시 자기가 위험해질까 봐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있을 거다. 동료 기자도 마찬가지였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진실 규명을 위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기자의 취재 과정이 의외였다. 그냥 사건이 터지면 달려가서 인터뷰하고 기사를 쓰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더라.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씨앗을 뿌리듯 정보원을 만들고, 싹이 트길(정보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틔운 싹을 근거로 기사를 쓰기도 한다. 그때 정보원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지만, 그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내보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다면 기사로 써야 한다.

 

신문기자에게 무기는 쓰는 것이다. 취재 대상 입장에서는 반드시 허락을 받고 쓰는 기자가 안심할 수 있으니 무슨 얘기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취재 대상에게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에서 질문한 적은 없었다. 오늘처럼 ‘잠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쳤다. (323~324페이지)

 

7년 전의 오보를 바로잡을 기회라 여기고 달려든 주오 신문의 기자들. 고참 베테랑 기자부터 신입 기자까지 다양한 기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하나였다. 진실을 알리는 게 저널리즘의 본질임을 잊지 않는 것. 실오라기 같은 단서라도 끝까지 매달려 확인하는 것만이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거다. 클릭 한 번에 쏟아지는 많은 정보를 뒤로하고, 한밤중에라도 사건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는 그들의 열기를 전한다. 사실을 보도한다는 기자의 사명감과 사실을 전함으로써 다음 범죄를 방지할 수 있다는 믿음, 진실을 밝혀내면서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자긍심이 그들을 채운다. 그 배경에 어린 소녀들의 유괴·살인 사건을 심어두고, 사건은 사건대로 흐르면서 형사들의 추적을 그린다. 그 사건의 취재를 위해 뛰는 기자들의 고군분투가 소설의 주제다. 독자는 그 추리 과정을 즐기면서도 기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재미까지 얻는다.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보는 소식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고 이런 정리로 우리에게 들리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흐른다는 걸 모르진 않았는데, 직접 듣고 보니 더 생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총과 칼 대신, 펜이 무기가 되어 휘두르는 전쟁터였다. 그 펜으로 누구 가슴을 찌를 수도 있고 눈물 나는 감동을 줄 수도 있다. 그 안에서 필수가 되어야 할 게 정확한 정보 전달이다. 인터넷 클릭 몇 번에 확인하는 정보들이 속도는 빠를 수 있겠지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도 많기에, 그래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또 누구를 아프게 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현직 기자들이 추천했다는 말이 이 소설에 신뢰를 얹는다. 소설로의 재미도 있었지만, 역시 그들(기자) 세계의 모습을 잘 전달했다는 믿음도 있을 거다. 진실을 파헤치는 고타로와 그의 동료들의 의지가 그래도 믿을 만한 세상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 올바른 정보 전달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 세상을 바꾸는데 그 사실 전달이 속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스마트한 시대에 구식 취재 방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진실을 접하는 방식일 테다. 그 방식이 사람을 구하고, 죄를 묻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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