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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5페이지)

 

십 년쯤 전엔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배려가 많아진다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인을 향한 마음이 점점 열리는 걸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들을 보는 눈도 더 넓어야겠고, 마음을 열어놓는 것도 더 크게 해야겠지, 라고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어딘가에서 읽어서였나. 그런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한 말에 한마디 더 붙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친구가 하려던 말을 내가 끝까지 듣고 다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또 다른 의미의 공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배운 '배려'의 기준이 변해가는 게 자연스러워서, 그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꺼낸 말을 시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살면서 나 먼저 위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지만, 나를 우선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가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세가 세워지고 있더라고.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일들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나만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결론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언제나 내가 우선이 되는 인생이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때의 기억을 꺼내 이제 와 생각해보니 참 살벌하게 들린다. 그런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점점 더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명확한 답을 꺼낼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답을 향해가는 쏠림이 있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이해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아서일까. 이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들려오는 윤재의 상태에서, 나는 그게 큰 문제인가 하는 의문을 먼저 가졌다. 다른 사람과 느끼는 게 다르다는 것, 그게 우리 사는 세상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인 건 맞지만, 그들의 감정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 냉정함이 더 심해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 김정숙 여사의 행동을 보고 이 소설의 의도와 결말이 향하는 지점과 닮았음을 알았다. 평범한 아줌마 차림의 영부인이 이삿짐을 싸다 말고 나와서 60대 여성 민원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라면이라고 먹고 가라며 데리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게 공감 능력이라는 것을... 그 민원인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 말고 영부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도 다 듣고 있더라. 영부인은, 잘은 모르지만 민원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것과 끼니를 거른 민원인에게 내놓은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그 민원인도 안다, 영부인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면서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더라.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을 공감하는 것.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라는 걸 전제했을 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게 있을까? 윤재에게는 그게 없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윤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몬드'라고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서,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게 어렵다. 반복된 학습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없다. 공포, 무서움, 분노, 애정, 호감, 등 사람들이 내보이는 그 어떤 감정 앞에서도 윤재는 침착하다.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 앞에 표정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런 윤재의 상태에 엄마는 절망한다. 하지만 윤재의 삶을 위해 같이 노력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알려주면서, 그때마다 윤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익히게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인데, 이걸 알지 못하는 윤재는 반복된 학습이 아니면 알 수 없다니. 그것도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나 반응을 이해해서도 아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다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동안 많이 힘들 테니까 배워둬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이지, 윤재가 이해해서 터득한 자세는 아니다.

 

이 소설을 계속 읽을수록, 윤재보다는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의 죽음이 나이순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나이순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엄마와 할머니가 죽은 다음에 살아갈 윤재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걱정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들. 그래서 더 많이 알려주고 싶고, 더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이 소설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엄마와 할머니가 참 많이 아프겠구나, 하고 느끼던 그때 비극은 시작된다. 윤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크리스마스이브, 끔찍한 사고로 엄마와 할머니는 윤재의 앞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곤이'가 나타났다.

 

곤이의 등장으로 윤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면서 계속 읽게 되는데, 소설을 잘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재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곤이였다.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가족에게 돌아온 아이, 그나마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적응이 필요한 아이, 험한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벽을 치는 아이. 그런 곤이와 윤재의 조합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오히려 윤재의 모습을 더 궁금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아이들로 비치지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특히 타인의 감정이나 태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인 윤재가 겪어가는 마음의 변화가 기대되는 거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아이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이 계속 세상의 한구석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 세상에 섞이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방법을 같이 찾아보게 하고 있더라. 그 변화를 인지할 무렵 찾아온 또 한 명의 아이 도라. 도라의 등장은 열여섯 소년이 그 나이의 소년으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담담하게 하는 말들 속에서 머리로 배운 태도의 학습이 아닌 마음이 하는 소리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6페이지)

 

사는 동안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하는, '평범'과 '특별'이 공존한다는 것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저절로 공감한다. 각자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으로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순간에 웃으면서 손을 맞잡는 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공부하듯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두렵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처음부터 몰랐던 일인데, 자라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태도이자 감정인데, 그게 불가능하다? 요즘에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것보다는, 굳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나부터도 그렇고. 나의 상황, 나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어떤 순간이 닥치면 나는 또 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타인과의 공감이 살면서 아주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런 공감 능력을 점점 잃으면서 사는 게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야 작가만이 알겠지만...)

 

사는데 필요한 우선이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이 없이 사는 건 안 될 것 같다. 공감이 없는 타인과 삶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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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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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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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계이름 -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이음 지음, 이규태 그림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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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감정을 조금씩 떼어 섞고, 주무르고, 이리저리 포개 보아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난해한 감정이었다. 말로 어떤 장면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19페이지)

 

'말'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지만 멈춰있는 게 아니라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 그렇게 쏟아낸 말은 공감을 이루기도 하지만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는 걸, 항상 그 말이 어떤 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게 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그 말은 점점 줄어들었고, 타인을 이해하는 말은 더 아끼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의 높이와 상대가 하는 말의 높이가 다르다는 걸을 알게 되면, 말의 아낌은 더 많아진다.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다르게 나오는 말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서였다. 그러니 말이라는 건, 그냥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곤 했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당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그래서였을까. 말이 줄면서 동시에 표현도 줄어들더라는 이상한 결과를 얻었다. 어쩌면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말이 줄어드는데, 표현이 늘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의 부제가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쏟아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내뱉은 어떤 말들이 누군가를 난처하고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로 인해 말로 빚을 질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날의 감정을, 살면서 한두 번쯤 의무적으로 마주해야 할 과제쯤으로 생각한다.

변변치 않은 말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른 말이, 못내 미안할 때가. 그렇게 말을 고르더라도 별 소용이 없어서, 말이 모자라다고 생각될 때가. 그런 때가 우리에게 몇 번쯤 있었다. (34페이지)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막상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고, 그런 순간을 건너와서 상대와 더 애틋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해나 공감 같은 걸 넘어서서, 말이 전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가 골목 어귀에서 만난 사람들, 힘들어서 말이 사라질 것만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말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현재의 삶에 녹아든 흔적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내놓고 담아가는 말들을 그는 부딪치면서 들었다. 말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으로 마주하고 감정으로 들었던 거다. 늘 말의 뒤에서 의도와 다르게 읽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겪는다. 그런 말이 전하는 외로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위로였고, 공감이었다.

 

나는, 내 위로가 누군가의 슬픔을 기피하려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늘 일인칭이었다. 누가 대신하여 아파준다는 말은 실행력이 없었다. 누가 먹어준다거나 들어줄 순 있어도, 아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슬픔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말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주물을 매만져야 보기 좋은 형상이 나오듯, 대상에게 깊이 물이 들어야 구체화될 수 있다. (243페이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 책도 읽으려고 해서 읽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우연처럼, 실수처럼 내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그러니 기대도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게 펼친 책에서, 오히려 일부러 골라 읽었던 책보다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들 속에서 작가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작가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사실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선입견에 작가가 여자일 거로 생각하고 계속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 아픔에 내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순간이 생겨날 뿐이다.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거다. 그건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겪는 슬픔은 늘 우리의 몫이기에, 작가의 말처럼 '슬픔은 늘 일인칭'이기에 누가 대신 아파해주고 이해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불가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갈 도구가 필요했다. 내 안의 말이 가 닿아야만 했다. 상대의 슬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어야 했다. '뽈'을 차러 가서도 외로운 아버지, 손끝에서 완성되는 옷에 감춰둔 어머니의 자존심, 평생 이어온 이발소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손자의 머리를 잘라주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다며 두부를 팔던 남자. 말은 분명 우리 마음을 전하고 표현하는 수단인데도, 그게 다 전해지지 못하는 미완성으로 남을 때가 많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말이 다 들려주지 못하는 감정들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이렇게 보여주려는 걸까.

 

말들은 수시로 내게 찾아와 버려지거나 읽혔다. 그건 어머니의 삶이 내 삶에 보내는 안부 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득, 내가 누군가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삶이 한 삶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철을 넘기면서 동시에 말도 넘어온 것과 다름없었다. (202페이지)

 

여전히 밤은 어려웠고, 잠 못 들게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해명하는 말들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말이 쉬워지는 것이라고, 다룰 수 있는 말의 가짓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통은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단순히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개 말은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가고, 그건 한 삶이 다른 한 삶에게 보내는 우편 같은 거니까. 말의 종착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이고, 하여 자신의 범위 내에서 이해 가능할 뿐이라고. (192~193페이지)

 

저마다 가진 말의 높이를 계이름으로 말하며, 그 말의 표현으로 감정을 읽는다. 너무 높아서, 너무 낮아서 닿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외롭고, 아프고, 상처받고, 오해한다. 너무 가벼워서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말들에 더 외로워지곤 한다. 일상처럼, 습관처럼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가 마주한 감정은 상대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부를 묻기 어렵고, 이해가 버거웠던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필요한 건 말이었다. 온몸으로 읽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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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4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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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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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늘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지치고 파리한 얼굴을 볼 때마다 잘 지내는 거냐고 물어보는 걱정스러운 시선 앞에서는, 더더욱 괜찮다고 말한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이 시간도 결국 지나갈 거야. 하지만 우리는 애써 모른 척한다. 우리가 괜찮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짓밟히고 있다. 시들어 간다. 그 무언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 그림자, 그리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가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 우리가 다 괜찮다고 말하는 동안 놓쳐 버린 아픔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당신이 억압한 감정들이 언젠가 상처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더 아프게 찌르기 전에. 이 책은 늘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틋한 공감의 편지다. (5~6페이지)

 

새해 해돋이는 못 볼 것 같아서 지난해 마지막 날에 친구와 해넘이를 보러 갔다. 해가 점점 기울어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는 게 그대로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한 살 더 먹는구나, 내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더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 같이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올 한해 어땠어? 잘 지냈니?" 친구는 내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괜찮았어. 크게 나쁜 일도 없었고, 이 정도면 잘 지냈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의 대답을 듣기 전부터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친구에게 물었던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온 질문에 미리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올 한해 어땠나?' 이 생각을 떠올린 순간부터였을 거다. 막막하게 생각하다가 겨우 꺼내놓은 답은 "잘 견뎌온 것 같아..." 그 순간 목 놓아 울고 말았다. 해넘이의 장관을 보겠다고 모인 불특정 다수의 사람 사이에서 나는 울었고, 친구는 가만히 내 어깨를 다독였다.

 

아마도, 그런 지점이었던 것 같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무심한 척. 그렇게 모인 많은 '척'이 만들어낸 '괜찮은 척'의 폭발 지점. 참고 참다가, 괜찮은 척하면서 견뎌오다가 터져 나올 게 터져버린 순간. 생각하다 보니 정말 그랬다. 힘든 것도, 싫은 것도, 아팠던 것도, 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건너온 시간이었다. 싫은 말을 들어도 묵묵히 참고 견뎠고, 짜증 나고 화가 나던 순간도 참았다. 내 입에서 나가는 안 좋은 말들, 부정의 말들이 건너가면 무슨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연습, 아니다 싶은 건 거절하는 연습을 하는데도 잘되지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온갖 '척'을 해가며 건너온 시간 중에 유독 아프고 어려웠던 시간이 작년이었던 듯하다. 물론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의 상황이나 생각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며, 또 나를 바라보는 각자의 또 다른 시선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 자기를 먼저 보게 되는 존재'라고, 이렇게 위무하며 나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더 크게 바라보게 된다. 그래, 나, 괜찮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도 참아야 했고,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순간을 건너왔다. 얼굴에는 찡그림보다 웃음을 먼저 그렸고, 싫은 내색 참아가며 받아들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터지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내내 견뎌온 것들은 거대한 벽이 되어 나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막이 되어왔던 거다. 보호막이 아니라 더 침잠하고 바닥 깊숙하게 파고들게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면서 가까이하던 게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문학은,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내가 눌러오며 지내온 많은 부분을 드러나게 한다. 주인공의 환경, 그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근원, 그 모든 상황 속의 바탕에 깔린 많은 것을 들여다보게 했다. 나와 닮았나? 다른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건너가고 있는 거지? 영원히 부정적인 결말을 만날 수밖에 없는 거였나? 'the end' 이후의 그들은 잘살고 있을까? 가슴 속을 파고드는 문장들을 읽으며 소리 없이 계속 묻곤 했다. 세상살이의 모든 답을 이 소설들 속에서 다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시간이 문장으로 계속 이어질 때마다 몰입해서 들었다. 그 많은 문장 안에서 혹시 나를 위로해줄 문장 하나 없겠나 하는 간절함으로 말이다. 저자는 아마도 이와 비슷한 감각으로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소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꿰뚫듯이 바라보며, 그들이 겪었던 순간들에서 찾아낸 감성으로 어떤 위기, 절망과 슬픔을 건너오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찾아낸 소설의 인용구나, 인물들이 겪는 상처의 은밀한 속내를 주저하지 않고 파헤친다. 마치 그들에게서 꼭 반창고 하나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듯이...

 

엘리너는 자신의 버림받은 처지보다는, 에드워드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루시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상황에 절망한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사려 깊지만 정작 자신을 배려하는 방법을 모르는 엘리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위해 눈물 흘린다. 한 번도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말해본 적 없는 사람은, 항상 동생들을 생각해서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며 살아온 맏이들은 엘리너의 슬픔에 처절하게 공감할 것이다. (66~67페이지)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목소리의 정체를.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욕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 욕망이 하는 말을 두 귀로 멀쩡히 듣고 있으면서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얼마나 자신를 짓누르고 있는지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간절함 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데...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왜 그 간절함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살아와야만 했는지 묻는 것만 같다. 괜찮다는 말에 가려진 진심,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안에서 죽어가는 치유의 기회들, 차마 말하지 못한 그림자와 상처, 트라우마를 얼마나 드러내고 싶은지를. 착한 사람 이미지를 포장하느라 상처가 쌓이는 줄도 모르고, 타인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나를 먼저 생각하지 못한 순간들에, 괜찮다는 말로 애써 스스로 위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자아를 확장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과 타인을 향한 반성적 의식의 충돌 사이에서 로라는 깊은 성장통을 겪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잘되고 싶은 욕망, 내가 돋보이고 싶은 욕망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끝없이 충돌한다. 이제 로라는 수없이 이런 일을 겪을 것이다. 이보다 더 아픈 일도. 하지만 적어도 '반성적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다. (253페이지)

 

심리학과 문학.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융심리학 이론을 문학의 감동과 함께 전한다. 언급된 많은 작품은 우리가 이미 읽은 책이나 이미 봤던 영화이기도 하고, 아직 만나지 못한 책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지점에서 같은 감정을 봤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시선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어느 감각을 느꼈는지의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작품들로 새롭게 바라보는 내 마음이 중요하니까.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으로 저자만의 리스트를 만들고 보니, '내면의 트라우마' 목록이었다는 말에 잠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로 채워진 살생부가 결국은 내 안의 상처로 저장된 목록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된다. 화들짝, 순간 일시 정지. 동시에 꼭꼭 숨겨둔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이미 내 바깥으로 나온 것의 시작점이 된다는 걸, 안다. 그렇게 걸어 나오는 것들이 나를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그렇게 심리학으로 분석한 우리 감정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잘 알지 못하고 무시했던 무의식을 찾으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개성을 찾으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을 맞이하라고. 저자의 말을 듣다가 생각해보니, 저자가 언급한 문학들의 장면들을 떠올려보니, 그렇게 나를 찾아가는 순간을 문학과 함께했을 때 더 빨리, 더 많이 마주할 것만 같다. 공감과 이해, 혹은 새로운 시선들로 함께하는 시간이 가져다줄 나를 찾아가는 길 같은 거.

 

『감정조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조절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하는 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감정을 느끼되, 그것에 압도되거나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분노의 해일이 당신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지 말자. 냉정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아주 천천히 대책을 세우자. 격한 감정이 우리를 제멋대로 휘두르게 내버려 두지 말자. 우리 자신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분노의 원인보다 훨씬 복잡하고, 강인하며, 냉철한 존재다. (204페이지)

 

저자는 상처, 슬픔, 고통 같은, 나를 힘들게 하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게 했던 감각들을 문학으로 보게 하면서, 그렇게 아팠던 순간의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들었던 '내면 아이'를 여기서 또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상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한 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가장 기본이고 우선이 되는 일이 나의 내면 아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문학 속 인물들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 역시 저자의 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시선들이 생긴다. 그랬구나, 그 순간의 아픔은 이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또 그렇게 치유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답을 찾아가는 듯한 기대와 긍정의 시선들의 보게 된다. 너무 유명해서 안 읽었어도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 그 안에서 세상과 싸우느라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으로 저자의 이야기를 같이 들려준다. 그렇게 하나씩, 예전에 읽으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행간 사이의 많은 감정을 이렇게 다시 듣고 있다.

 

듣고 있다 보면, 나를 채웠던 많은 상처를 이렇게 끌어냈는데 어떻게 흘러가야 치유의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다. 그 길까지 한꺼번에 열어준다. 저자가 꾸준한 책 읽기와 계속된 글쓰기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면, 우리는 또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누르던 어둠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살생부에나 기록된 이름으로 남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가장 아픈 순간의 시작점을 따라가고 그 상처의 과정을 되짚어봄으로써 상처가 더는 상처로 남지 않게 하는 일, 그때 상처의 순간조차 지금의 나를 만든 에너지가 되었다는 일부분으로 만들었다는 인정. 그 시간이 지금을 살아가는 순간의 또 다른 방식을 열어줄 바탕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과 비슷하게 흘러갈 수 있겠다는 긍정의 생각이 차분하게 쌓이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괜찮지 않았다고, 힘들었다고, 싫었다고,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입이 트이는 것만 같다. 이런 말을 하는 대상이 누구여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가진 상처가 더는 상처가 아니게 만드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살아가는 순간들에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 나의 부족한 것들과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나를 흔들지 못하게 하면서 결국은 내가 이뤄내야 할 것은 내 삶의 행복일 테니 말이다.

 

상처란 이렇다. 극복하려고 애쓸 때는 꿈쩍도 안 하다가 때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르르 극복된다. 물론 죽을 떠낸 자리처럼 완전히 말끔하고 평평하진 않지만. 이제 나는 '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만나기 싫다는 생각에는 시달리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그 10여 년 전의 트라우마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건 다 그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의식의 판단'이었다. (35~36페이지)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바로 그 트라우마가 우리의 심리적 유전자를 결정하는 '밑그림'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성작은 될 수 없다. 트라우마가 밑그림을 그리는 연필이 될 수는 있지만 그림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구도나 색채가 되지 않도록 끝끝내 막아 내는 것, 그것이 자기 치유의 노력이고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우리의 끈질긴 자유의지이니까. (314~315페이지)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참 많이 우울했다. 머릿속 생각과 따로 노는 현실들에 무기력만 남은 듯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솔직하지 못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보니,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가면 몇 개는 늘 장착된 삶이었다. 그런 시간이었으니, 살아오는 게 아닌 '견딘' 시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저자가 언급한 책 몇 권을 다시 꺼냈다. 소설 속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과거의 나를, 내가 다가가지 못했던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지금의 나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지낸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소리 내어 말하는 연습을 한다. 스스로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게 했던 단점들, 모자란 점들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조차 나라는 사람의 한 부분이니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솔직하게 잘 전달하려고 목소리를 내면서,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려 애쓰는 중이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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