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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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늘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지치고 파리한 얼굴을 볼 때마다 잘 지내는 거냐고 물어보는 걱정스러운 시선 앞에서는, 더더욱 괜찮다고 말한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이 시간도 결국 지나갈 거야. 하지만 우리는 애써 모른 척한다. 우리가 괜찮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짓밟히고 있다. 시들어 간다. 그 무언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 그림자, 그리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가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 우리가 다 괜찮다고 말하는 동안 놓쳐 버린 아픔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당신이 억압한 감정들이 언젠가 상처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더 아프게 찌르기 전에. 이 책은 늘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틋한 공감의 편지다. (5~6페이지)

 

새해 해돋이는 못 볼 것 같아서 지난해 마지막 날에 친구와 해넘이를 보러 갔다. 해가 점점 기울어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는 게 그대로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한 살 더 먹는구나, 내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더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 같이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올 한해 어땠어? 잘 지냈니?" 친구는 내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괜찮았어. 크게 나쁜 일도 없었고, 이 정도면 잘 지냈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의 대답을 듣기 전부터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친구에게 물었던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온 질문에 미리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올 한해 어땠나?' 이 생각을 떠올린 순간부터였을 거다. 막막하게 생각하다가 겨우 꺼내놓은 답은 "잘 견뎌온 것 같아..." 그 순간 목 놓아 울고 말았다. 해넘이의 장관을 보겠다고 모인 불특정 다수의 사람 사이에서 나는 울었고, 친구는 가만히 내 어깨를 다독였다.

 

아마도, 그런 지점이었던 것 같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무심한 척. 그렇게 모인 많은 '척'이 만들어낸 '괜찮은 척'의 폭발 지점. 참고 참다가, 괜찮은 척하면서 견뎌오다가 터져 나올 게 터져버린 순간. 생각하다 보니 정말 그랬다. 힘든 것도, 싫은 것도, 아팠던 것도, 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건너온 시간이었다. 싫은 말을 들어도 묵묵히 참고 견뎠고, 짜증 나고 화가 나던 순간도 참았다. 내 입에서 나가는 안 좋은 말들, 부정의 말들이 건너가면 무슨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연습, 아니다 싶은 건 거절하는 연습을 하는데도 잘되지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온갖 '척'을 해가며 건너온 시간 중에 유독 아프고 어려웠던 시간이 작년이었던 듯하다. 물론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의 상황이나 생각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며, 또 나를 바라보는 각자의 또 다른 시선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 자기를 먼저 보게 되는 존재'라고, 이렇게 위무하며 나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더 크게 바라보게 된다. 그래, 나, 괜찮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도 참아야 했고,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순간을 건너왔다. 얼굴에는 찡그림보다 웃음을 먼저 그렸고, 싫은 내색 참아가며 받아들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터지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내내 견뎌온 것들은 거대한 벽이 되어 나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막이 되어왔던 거다. 보호막이 아니라 더 침잠하고 바닥 깊숙하게 파고들게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면서 가까이하던 게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문학은,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내가 눌러오며 지내온 많은 부분을 드러나게 한다. 주인공의 환경, 그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근원, 그 모든 상황 속의 바탕에 깔린 많은 것을 들여다보게 했다. 나와 닮았나? 다른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건너가고 있는 거지? 영원히 부정적인 결말을 만날 수밖에 없는 거였나? 'the end' 이후의 그들은 잘살고 있을까? 가슴 속을 파고드는 문장들을 읽으며 소리 없이 계속 묻곤 했다. 세상살이의 모든 답을 이 소설들 속에서 다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시간이 문장으로 계속 이어질 때마다 몰입해서 들었다. 그 많은 문장 안에서 혹시 나를 위로해줄 문장 하나 없겠나 하는 간절함으로 말이다. 저자는 아마도 이와 비슷한 감각으로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소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꿰뚫듯이 바라보며, 그들이 겪었던 순간들에서 찾아낸 감성으로 어떤 위기, 절망과 슬픔을 건너오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찾아낸 소설의 인용구나, 인물들이 겪는 상처의 은밀한 속내를 주저하지 않고 파헤친다. 마치 그들에게서 꼭 반창고 하나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듯이...

 

엘리너는 자신의 버림받은 처지보다는, 에드워드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루시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상황에 절망한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사려 깊지만 정작 자신을 배려하는 방법을 모르는 엘리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위해 눈물 흘린다. 한 번도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말해본 적 없는 사람은, 항상 동생들을 생각해서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며 살아온 맏이들은 엘리너의 슬픔에 처절하게 공감할 것이다. (66~67페이지)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서 간절하게 외치는 목소리의 정체를.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욕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 욕망이 하는 말을 두 귀로 멀쩡히 듣고 있으면서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얼마나 자신를 짓누르고 있는지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간절함 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데...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왜 그 간절함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살아와야만 했는지 묻는 것만 같다. 괜찮다는 말에 가려진 진심,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안에서 죽어가는 치유의 기회들, 차마 말하지 못한 그림자와 상처, 트라우마를 얼마나 드러내고 싶은지를. 착한 사람 이미지를 포장하느라 상처가 쌓이는 줄도 모르고, 타인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나를 먼저 생각하지 못한 순간들에, 괜찮다는 말로 애써 스스로 위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자아를 확장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과 타인을 향한 반성적 의식의 충돌 사이에서 로라는 깊은 성장통을 겪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잘되고 싶은 욕망, 내가 돋보이고 싶은 욕망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끝없이 충돌한다. 이제 로라는 수없이 이런 일을 겪을 것이다. 이보다 더 아픈 일도. 하지만 적어도 '반성적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다. (253페이지)

 

심리학과 문학.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융심리학 이론을 문학의 감동과 함께 전한다. 언급된 많은 작품은 우리가 이미 읽은 책이나 이미 봤던 영화이기도 하고, 아직 만나지 못한 책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지점에서 같은 감정을 봤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시선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어느 감각을 느꼈는지의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작품들로 새롭게 바라보는 내 마음이 중요하니까.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으로 저자만의 리스트를 만들고 보니, '내면의 트라우마' 목록이었다는 말에 잠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로 채워진 살생부가 결국은 내 안의 상처로 저장된 목록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된다. 화들짝, 순간 일시 정지. 동시에 꼭꼭 숨겨둔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이미 내 바깥으로 나온 것의 시작점이 된다는 걸, 안다. 그렇게 걸어 나오는 것들이 나를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그렇게 심리학으로 분석한 우리 감정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잘 알지 못하고 무시했던 무의식을 찾으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개성을 찾으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을 맞이하라고. 저자의 말을 듣다가 생각해보니, 저자가 언급한 문학들의 장면들을 떠올려보니, 그렇게 나를 찾아가는 순간을 문학과 함께했을 때 더 빨리, 더 많이 마주할 것만 같다. 공감과 이해, 혹은 새로운 시선들로 함께하는 시간이 가져다줄 나를 찾아가는 길 같은 거.

 

『감정조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조절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하는 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감정을 느끼되, 그것에 압도되거나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분노의 해일이 당신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지 말자. 냉정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아주 천천히 대책을 세우자. 격한 감정이 우리를 제멋대로 휘두르게 내버려 두지 말자. 우리 자신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분노의 원인보다 훨씬 복잡하고, 강인하며, 냉철한 존재다. (204페이지)

 

저자는 상처, 슬픔, 고통 같은, 나를 힘들게 하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게 했던 감각들을 문학으로 보게 하면서, 그렇게 아팠던 순간의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들었던 '내면 아이'를 여기서 또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상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한 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가장 기본이고 우선이 되는 일이 나의 내면 아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문학 속 인물들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 역시 저자의 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시선들이 생긴다. 그랬구나, 그 순간의 아픔은 이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또 그렇게 치유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답을 찾아가는 듯한 기대와 긍정의 시선들의 보게 된다. 너무 유명해서 안 읽었어도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들, 그 안에서 세상과 싸우느라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으로 저자의 이야기를 같이 들려준다. 그렇게 하나씩, 예전에 읽으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행간 사이의 많은 감정을 이렇게 다시 듣고 있다.

 

듣고 있다 보면, 나를 채웠던 많은 상처를 이렇게 끌어냈는데 어떻게 흘러가야 치유의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다. 그 길까지 한꺼번에 열어준다. 저자가 꾸준한 책 읽기와 계속된 글쓰기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면, 우리는 또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누르던 어둠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살생부에나 기록된 이름으로 남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가장 아픈 순간의 시작점을 따라가고 그 상처의 과정을 되짚어봄으로써 상처가 더는 상처로 남지 않게 하는 일, 그때 상처의 순간조차 지금의 나를 만든 에너지가 되었다는 일부분으로 만들었다는 인정. 그 시간이 지금을 살아가는 순간의 또 다른 방식을 열어줄 바탕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과 비슷하게 흘러갈 수 있겠다는 긍정의 생각이 차분하게 쌓이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괜찮지 않았다고, 힘들었다고, 싫었다고,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입이 트이는 것만 같다. 이런 말을 하는 대상이 누구여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가진 상처가 더는 상처가 아니게 만드는 일,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살아가는 순간들에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 나의 부족한 것들과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나를 흔들지 못하게 하면서 결국은 내가 이뤄내야 할 것은 내 삶의 행복일 테니 말이다.

 

상처란 이렇다. 극복하려고 애쓸 때는 꿈쩍도 안 하다가 때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르르 극복된다. 물론 죽을 떠낸 자리처럼 완전히 말끔하고 평평하진 않지만. 이제 나는 '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만나기 싫다는 생각에는 시달리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그 10여 년 전의 트라우마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건 다 그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의식의 판단'이었다. (35~36페이지)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바로 그 트라우마가 우리의 심리적 유전자를 결정하는 '밑그림'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성작은 될 수 없다. 트라우마가 밑그림을 그리는 연필이 될 수는 있지만 그림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구도나 색채가 되지 않도록 끝끝내 막아 내는 것, 그것이 자기 치유의 노력이고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우리의 끈질긴 자유의지이니까. (314~315페이지)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참 많이 우울했다. 머릿속 생각과 따로 노는 현실들에 무기력만 남은 듯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솔직하지 못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보니,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가면 몇 개는 늘 장착된 삶이었다. 그런 시간이었으니, 살아오는 게 아닌 '견딘' 시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저자가 언급한 책 몇 권을 다시 꺼냈다. 소설 속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과거의 나를, 내가 다가가지 못했던 타인을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지금의 나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지낸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소리 내어 말하는 연습을 한다. 스스로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게 했던 단점들, 모자란 점들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조차 나라는 사람의 한 부분이니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솔직하게 잘 전달하려고 목소리를 내면서,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려 애쓰는 중이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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