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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평점 :

안데스산맥의 깊은 골짜기 어디쯤으로 한 남자가 추락한다. 그의 이름은 누네즈. 같은 탐험을 하던 일행은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철수하고, 그의 존재는 잊혔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그는, 추락한 곳에서 눈을 뜨게 되고 살길을 모색한다. 그는 어딘가로 계속 걸었고, 사람의 흔적이 있는지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줄 곳이 있는지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 마을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이곳에서 그가 겪을 일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네즈가 도착한 곳은 ‘눈먼 자들의 나라’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곳의 사람들은 점점 시력을 잃어갔고, 어느 세대부터는 아이들이 아예 눈이 보이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을 모습을 보고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시력을 잃어가면서 상상력을 더해 그 시절이 머물곤 했는데, 점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이 이루어지면서, 앞을 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변해갔다. 이제 이곳은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 구축되었다. 그러니 누네즈가 마주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그의 위기를 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눈먼 자들이 사는 나라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환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아주 무시해도 될 듯한 그들만의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 나름의 체계가 자리잡혀 있었고,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일을,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과 동일시했던 거다. 내가 가까이에서 봤던 그대로,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건, 우리가 아는 장애인의 삶이었다. 내가 사는 방식과 다른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일로 인식했다. 내가 틀렸다.
노인의 목소리가 누네즈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눈먼 자들의 나라에 갇혀 어둠 속에서 살아온 장로들에게, 누네즈는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살았던 넓은 세상과 하늘,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경이로운 것들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누네즈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누네즈가 이야기하는 것 중 무엇 하나도 믿지 않았고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누네즈가 사용한 단어의 상당수를 알아듣지조차 못했다. (45페이지)
누군가, 무엇이 정상인지 묻는다면, 이 소설 속 이야기가 답이 될 듯하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눈이 보이는 자가 비정상인 된다. 그 유명한 말, ‘눈먼 자들 가운데에서는 외눈이가 왕이다’라는 말을 믿었던 누네즈는, 자신의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겼다. 당연하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보다 세상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에 있지 않겠는가. 그가 눈먼 자들의 위에서 군림할 거로 믿었는데, 그 믿음은 완전 꽝이 된 거다. 그 스스로 ‘내가 너희들보다 잘났다. 나는 다 보이니까 너희들을 다스릴 수 있다. 눈이 안 보이는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월등한 존재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 세계에 속하려고 했던 누네즈는 곧 그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내가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본다고 아무리 외쳐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외침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그를 자기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며 바보 취급했다.
얼마나 비웃었을까. 처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은 세상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누네즈가 하는 모든 말은 미친놈이 씨부렁거리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보고 인식하며 정의했던 모든 것들이 그곳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누네즈가 그들에게 세상의 모습을 알려주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적응할 무렵, 그는 아름다운 눈먼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앞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여성의 집안 반대로 벽에 부딪힌다. 그 세상에서는 누네즈의 눈이 열등한 이유였고,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의 눈을 파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그들과 똑같은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선택을 빙자한 강요였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랑을 위해 두 눈을 파낼 것인가, 아니면 다 포기하고 이들 세계를 떠날 것인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할까. 아니, 애초부터 이런 문제의 갈림길에 설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대답은 우리는 언제나 이런 문제의 중심에 서서 살아왔다는 거다. 누네즈처럼 눈을 파낼 정도의 선택은 아닐 수 있겠지만, 항상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문제도 대화가 통하고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선에서 가능한 일이다. 내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세상에서,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세상을 마주했을 때 혹은 정상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 어떤 선택도 불가능해질 수 있다. 어떤 선택도 만족시켜주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누네즈가 그곳에 머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그의 눈을 파내야만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일까?
주저앉고 나니 낙관적인 마음이 들었다. 싸움에 가담한 이들이 으레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조금은 더 난처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깨달았다. 생각의 기반이 완전히 다른 사람과는 싸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63페이지)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른 세상을 완벽히 이해하며 살아갈 수 없다. 한 집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이해 못 할 일은 쌓이고 쌓인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방식의 삶에 다툼이 생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이 다름과 갈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벽을 세우고 살게 되지 않을까? 내 방식이 맞으니까 나는 정상, 상대의 방식이 이해가 안 되니까 너는 비정상의 공식이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다. 서로 간의 틈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면, 우리는 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 살아가려고 할 텐데, 그것도 허용되는 범위가 있다. 여기까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내가 양보하고 노력해봐야지 하는 선이 분명히 있다. 그 선이 너무 멀리 있다면, 그 선까지 따라가려다가 지치기 전에 포기하기도 한다. 말이 어느 정도 통해야 노력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누네즈가 눈먼 자들의 마을의 산 위에서, 마을과 세상의 경계에 누워 하늘의 빛나던 별을 바라보던 그 순간에 어떤 답을 얻었을까? 어떤 선택으로 그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작가의 다른 작품 여러 권을 오랫동안 목록에 올려 두었는데,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래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책인 줄 알았는데, 내용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또 메시지를 생각하니 닮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내로라 출판사의 ‘단숨에 읽고, 깊어지자’ 시리즈의 출간작들이 그러하듯, 분량은 짧으면서 책의 내용에 담긴 무게는 상당하다. 이 책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 지금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방식이 달라서 갈등하곤 했는데, 그 다른 방식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선이라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 정도는 버겁다 싶을 때는 그 사람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도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는….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눈먼 나라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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