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숙제 때문에 밀려있는 책이 많은데도...

여전히 신간에 눈 돌리고 있는 나 자신이 참... ㅠㅠ

습관처럼 산다.

안 읽어도 산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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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헌법 책을 고르고 있자니 복잡하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좀 난감하다. 어렵다. 어떤 헌법 책을 사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어떤 책이든 일단 골라야 하긴 할 것 같다.

서너권을 장바구니에 넣고 조금 더 살펴보고 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 이 나라에서 인간다움을 챙기며 살기 위해 헌법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김제동 때문이다.

평소 그가 하는 말을 호감으로 듣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나에게 딱 이정도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저런 방송인이 있구나 싶은, 그는 저렇게 말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

나와 생각이 같구나 다르구나 하는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냥 딱 그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굳이 관심 두지 않았던 대상이라고 하는 게 가장 솔직한 표현일 듯하다.

그런 그가 헌법 독후감을 썼다고 해서 내 관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읽다가 보니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의 이번 책을 읽지 않았다면 참 많이 후회했을 것 같다고...

 

 

 

 

 

 

 

 

 

그는 왜 헌법을 읽기 시작했을까?

헌법을 읽으면서, 그는 어딘가에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생각해보게 되는데.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가 나타나서 보듬어주고 다 해결해줄 것 같은, 맹목적인 든든함 같은 것을 떠올렸다. 물론 헌법이 엄마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또 법으로 규정한 것을 따르며,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테니까. 사적인 감정 뚝뚝 묻어나는 엄마와의 관계와 법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어쩌면, 그는 뭔가 자기를 지켜줄 것을 찾아다니면서 헌법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개그맨인 그가 개그 무대보다는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곳에서 자주 보이곤 했다. 어느 시위 현장, SNS, 어느 강의 무대에서 그는 움직였다. 그가 잘 짜인 개그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같이 힘을 냈던 시간이 그에게 만들어준 무엇 때문이지 않았을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런 일에 사람들은 무너지고,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다다른 곳. 우리의 존재 이유와 우리가 속한 국가가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헌법에 저절로 가 닿았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그가 닿은 헌법에,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된 풀이에, 독자가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더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헌법 37조 1항)

 

헌법 37조 1항을 보고 마치 연애편지의 한 구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른여섯 가지 사랑하는 이유를 쫙 적어놓고 마지막에 추신을 붙인 거죠.

“내가 여기 안 적어놨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법 조항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5페이지)

 

헌법을 연애편지라고 소개하는 것부터 ‘법’에 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 법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법의 판단 아래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기본권을 응원해주는 듯한 헌법 이야기를, 그것도 쉬운 말로 한번 풀이된 상태로 듣게 되니 그의 말처럼 감동적이다. 그가 진행하는 토크쇼 보는 느낌이다. 저절로 TV 앞으로 고개가 빨려 들어가는 시선 그대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우리의 권리를 찾아서, 우리가 억울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법이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의 행동에 제한을 두기 위해 테두리를 쳐 놓은 그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가 들려주는 헌법은 그 딱딱함과 두려움을 없애줬다. 우리가, 국민이 국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적어놓은 ‘국가 사용 설명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

 

헌법은 사회 갈등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모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만들어낸 가장 간결한 문장이잖아요. 그걸 통해서 우리가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헌법이 법조문을 넘어서서 시나 음악처럼 우리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49페이지)

 

딱 그거였다. 살면서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도구, 혹은 문서 같은... 내 것이라는 등기권리증 같은 문서를 보는 기분이 들더라. 아무리 은행 지분이 많더라도 내 것임을 확인해주는, 직인이 쾅쾅 찍힌 문서를 코앞에 두고 몰랐던 것 같다. (한글도 아는데 이걸 몰랐어!!) 법이 나를 보호해주는, 그 기본 중의 기본을 언급한 게 헌법이었다. 나의 존엄을 그대로 명시해준 문서였다. 그의 말처럼, 헌법을 읽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체결한 계약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국민이 ‘갑’인 계약서인 거였는데, 몰라서 그 계약서의 기능을 활용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 생활 곳곳에 묻어있는, 헌법에 근거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이제야 보게 됐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헌법에 관한 관심조차 두기 어려웠을 것 같다. 2017년 3월의 판결 때문에 조금은 들어본 기억이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만 생각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과 헌법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어떤 계기가 필요한 경우, 이렇게 힘을 내서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그가 헌법에 관심을 두고 읽게 된 게 그냥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가 거리에서 마이크 잡고 외치는 일이 없었다면, 바쁜 농사일 접어두고 거리로 나오는 어르신들을 못 봤다면, 고사리손 호호 불어가면서 그 추운 겨울 광장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에게 헌법이 이렇게 빨리 친해질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주권자이며(1조), 인간다운 삶을 살고(34조) 쾌적한 생활을 할 권리(35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특수 계급을 만들어(11조 2항 위반)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다면, 그를 끌어내릴 권리(65조)가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이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면 헌법 10조 위반이고, 저는 그것이 내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06~107페이지)

 

특히 이 책의 두 번째 챕터에 마음이 많이 머문다. 소시민으로 사는 우리와 가까이 닿아있는 사례들이 그의 입을 통해 무게를 가진다. 날씨 수당 100원을 더 지급해달라는 맥도날드 배달 청년의 피켓 시위(10조)는,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달라는 말이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장을 가지고 와서 나를 끌고 가라’고 말하는 것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며(12조 1항, 2항,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12조 4항)로 나의 말을 대신해줄 사람을 둘 권리가 있다. 사생활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가 엄연히 있으며(16조, 17조, 18조), 그가 가장 싫어한다는 36조 1항과 2항은 결혼과 가족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 선거에 관해 언급한 24조 25조를 말하면서 그는 선거 연령이 낮아져야 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출마 연령 제한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 자체는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잖아요. 더러운 이들에게 주면 더러운 것이 되고, 깨끗한 이들에게 주면 깨끗한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로 반드시 좋은 투표를 해야 하고, 정책도 꼼꼼히 살펴보면서 정치인들을 국민의 하인으로 잘 부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87페이지)

 

헌법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글. 그는 누구나 헌법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가 헌법의 ‘진짜 주인’이 된다고 했다.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우리의 상속 문서라고도 했다. 그랬다.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했던 헌법을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거다. 그의 헌법 독후감으로 헌법의 내용을 듣고, 우리의 존엄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법을 믿을 수 없다, 법이 잘못된 거다, 라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법을 가지고 더럽게 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였다.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손가락 끝을 향해야 하는 대상이 잘못 지정된 거였다. 헌법을 제대로 알고 그 의미를 우리의 일상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불행해지는 일은 적어질 것 같다. 우리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다. 그 행복을 위해 헌법이 우리 뒤에 든든히 자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우리의 존엄은 더 가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부였다. 헌법을 공부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일.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뭔가를 확인하고 질문하고 상대방을 귀찮게 했던 경우는 싸우기 위해서이거나 내게 돌아올 혜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 시술을 받고 병원에 한 달 동안 있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병원비가 들어갔을 때, 국민건강보험의 여러 가지 제도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재난적 의료비’였다. 입원으로 병원비 200만 원이 넘어갔을 경우, 그 절반을 국가가 되돌려주는 거다. 물론 자격 조건이 되어야 하는 거지만, 그런 제도를 몰라서 비싼 의료비에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기억해두어야 할 제도인 것 같다. 특히 공공기관 이용하면서 당한 불편함이 너무 커서, 웬만해서는 온라인 검색이나 해당 기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가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거나 적어서 방문하곤 한다. 담당자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몰라서 나의 민원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걸 너무 많이 겪어서 화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껏 한 번도 연체한 적 없이 꼬박꼬박 세금 내면서 사는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으며 일하는 사람이 기본도 안된 자세로, 오히려 민원인의 요청을 귀찮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은 없다니까?’ 하는 말투와 표정으로 민원인을 대하는 걸 보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일을 한번 두 번 겪다 보니, 나 나름의 자세가 생긴 것 같다. 저자가 헌법을 읽기 시작한 이유도 비슷할 거로 생각한다.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 게 옳지 않음을 의심하면서, 우리를 지켜줄 수단을 스스로 찾아다니면서가 아니었을까?

 

지난겨울의 끝 무렵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서비스센터에 접수할까 하다가 보일러 사용설명서를 먼저 읽었다. 고장 증상을 살펴보면서 원인을 확인하고, 서비스를 접수해야 하는 건지 내 손으로 설명서를 따라 하면서 고칠 수 있는 건지 고민하게 됐다. 결국은 서비스 접수가 필요한 고장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알게 된 사실들 때문에 다음번에도 같은 증상이 보이면 처음처럼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을 것 같다. ‘아, 그때 이 증상은 이런 원인 때문이었지. 전원을 끄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서비스 접수하고 기다리면 되겠군!’ 하는 일련의 과정과 자세를 배웠다고 해야 할까. 저자가 확인한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법’이라는 단어에 두려움부터 생기고,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에 다가가기를 주저하고는 했던 지난 시간에 미안해질 만큼, 그가 전하는 헌법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다. 내가 국가를 사용하는 방법, 내가 나로 살아가면서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헌법이라는... 헌법 조항 하나하나 기억하고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내 안에 새기는 일이, 우리 일상의 헌법 사용설명서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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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0502 2019-08-1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제동씨 책 읽고 헌법 구매해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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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한국의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은, 산사를 잘 모르는 나도 들뜨게 했다. 우리나라의 산사만이 가지는 특징, 혹은 느낌이 전해지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다. 지난봄에는 금산사에 갔었다. 노래와 흥으로 무장한 관광객들을 뒤로하고 막상 걸어 올라간 금산사에서 본 것은, 제법 큰 법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종교의 의미를 떠나서, 절은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고요하게 하며, 마음속 간절함을 표현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여러 나라에 그 나라 고유의 그런 장소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산사를 따라올 곳이 있을까 싶다. (내가 본 곳이 우리나라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 오래전부터 산사를 예찬해왔다는 유홍준 작가의 마음이, 이번 산사 순례 답사기로 다시 확인하는 것만 같다.

 

이미 만나본 독자도 있을 테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너무도 유명한 베스트셀러이고, 마니아 독자는 1권부터 주제별로 따로 출간된 것까지 다 만나봤을지도 모른다. 이미 선보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뽑아낸, 한국의 산사 20여 곳을 소개한 책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념으로 출간된 책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산사만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요점정리 해주는 느낌이기도 하다. 산사만을 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워도 좋을 것처럼 각 산사의 특징과 매력을 이야기하듯 펼쳐 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를 포함해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놓치면 아쉬울 산사를 빼곡히 담아냈다. 특히 북한의 산사를 소개한 부분은 의외였다. 통일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을 곳이라고 생각했던 장소까지 소개해주다니!

 

 

우리나라 산사 건축은 진입로부터 시작된다. 산사의 진입로는 그 자체가 건축적·조경적 의미를 지난 산사의 얼굴이다. 약 반 시간 걸리는 이 5릿길 진입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속세와 성역을 가르는 분할 공간이자 완충 지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사에는 반드시 저마다의 특징을 가진 진입로가 있다. (73페이지, 순천 선암사)

 

저자는 산사의 진입로부터는 걸어서 간다고 했다. 요즘에는 길을 많이 정리해놔서, 절의 입구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다리가 아프니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저자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산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입로 따위는 무시하고 지나가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쌩~ 지나가 버리는 일이 참 가벼워 보이지 않았을까 싶은? 어딘가로 들어갈 때, 대문이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혹은 똑똑 노크를 하는) 일을 생략한 것만 같다. 그곳을 방문하는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여기서부터는 구석구석 잘 보고 들어가야 여기를 제대로 보는 거다'라는 의미를 담고 말했다. 이곳과 저곳의 구분 짓는 선을 넘어서 들어가니, 무엇이 다르게 느껴지는지 확실히 알 것이라는 예고, 혹은 충고 같은 말. 이 문장을 들으면서 다짐했다. 다음에 다시 산사에 가게 된다면, 절대 진입로를 걸어서 들어가리라.

 

 

수덕사는 결코 볼거리가 많은 절은 아니다. 문화재를 찾는다면 대웅전 하나로 끝이다. 그 밖에 오층석탑이니 뭐니 있지만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덕숭산의 사계절과 그 자연 속에 살았던 인간의 이야기와 전설이 있기에 우리의 가슴속에 젖어오는 감성의 환기가 있고 이성의 일깨움이 있다. (186~187페이지,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사람들은 국보나 보물이라는 명칭 때문에 문화유산의 가치와 멋을 그런 데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봉암사에서 진실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절집의 자리앉음새이다. 경내 어디에서 보아도 우뚝 솟은 희양산 준봉들이 봉암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깊은 산속에 이처럼 넓은 분지가 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할 정도다. (247페이지, 문경 봉암사)

 

뭔가 유명한 볼거리가 없어도, 우리가 산사를 찾는 이유 중의 하나를 콕 집어서 말해주는 것 같아 많이 공감했다. 이름 있는 문화재나 특징 있는 다른 것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산사 특유의 고즈넉함과 침잠하는 분위기 때문에 찾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산에서 뿜어대는 사계절의 바람과 변화하는 색들,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줄기 하나에도 우리는 종종 특별함을 느낀다. 아니, 오히려 그 고요함과 자연이 그대로 있는 곳을 찾아가는 목적일 때도 있다. 이건 뭐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아니면 그 마음 조금은 다독여주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배치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 자리한 구조들이 특이하기도 하다. 아니면 저자가 말한 봉암사의 위치처럼, 주봉들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배치라니 참 놀랍다. 오랜 시간, 그 중심에 있는 봉암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산사를 유지해왔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북한에도 절이 있고 스님이 있다는 데서 조금 놀랐다.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나는 '북한'이란 나라에 많은 부분이 폐쇄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절과 스님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북한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오랜 시간 같이 해온 역사가 있었을 텐데, 그 안에서 자리한 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먼저 떠올리다 보니 다른 종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가 1997년 9월에 찾아간 보현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들린다. 보현사가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한다.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한 곳인 표훈사가 금강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이라는 것도 놀라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표훈사는 금강산의 핵심처고, 금강산의 복부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책으로 수없이 보아왔고, 해마다 한국미술사 시간이면 슬라이드로 비추며 보아온 이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준수하게 잘생겼다. 생각만큼이나 크고 세부의 묘사에도 게으름이 없고 마감질에 불성실은커녕 추녀마다 풍경, 북한말로 바람방울을 무려 104개나 달아매는 치밀성을 보여주고 있다. (372페이지, 묘향산 보현사)

 

작가가 전국을 돌면서 본 많은 산사 중에서도 특히 애정이 묻어나는 곳을 이렇게 들려준다.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볼 게 없는 산사는 없을 터였다. 전국 어느 산을 가더라도 만나게 되는 게 산사다. 우리나라만의 전통인 산사의 아름다움을 이렇게나마 전달하면, 이 내용을 접한 독자는 알아서 더 많은 산사와 절의 자태, 산사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우리나라의 산사가 등재된 게, 세계에 우리나라 산사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가 산을 찾을 때 절의 모습, 지붕의 이음선 하나, 기둥 하나, 배치, 그 땅에 뿌리내린 나무 등 산사를 이루는 많은 것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를 바라게 된다. (나부터!) 종교를 떠나서 그냥 그곳에 자리한,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이 되어온 산사를 느끼는 것이면 충분하다. 저자가 이 책으로 전하고 싶은 말도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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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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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한다거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정리하면서 활약을 펼치는 추리소설은 많다. 혹은 그 주인공이 탐정이라던가. 나쁜 놈들 다 해치우고, 정의를 되찾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독자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 역시 아직 세상은 살 만해.'라고 뿌듯해하기도 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온갖 부조리에 불평등에 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투성이인데,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정의를 소설에서 되찾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 때문에 만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욕심이지만, 이런 의미는 소설을 읽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런 의미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야쿠자의 등장은 그저 설정이고, 야쿠자와 형사가 대립하며 조직폭력의 근간을 없애버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 혼자 상상했더랬다. 다 읽고 나니, '아니오.'였다. 안타깝게도, 야쿠자를 상대하는 경찰 세계도 온전히 정의만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던가 보다. 그 느낌은 이 소설의 제목과 닿아 있다.

 

오가미는 구레하라 동부경찰서의 폭력단계 형사다. 베테랑이라면 베테랑이기도 하고, 속도니 말로 꼴통 짓을 하는 형사인 듯하다. 자기 식대로 수사하고 필요하다면 절차도 무시할 수 있는 배짱이 있는 형사. 하지만 결과는 늘 올바르게 가져오기에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형사이기도 한 존재. 그런 오가미의 밑으로 신입 히오카가 왔다. 고참 형사와 새내기 형사의 조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갑과 을이 정확히 보이기도 하고, 신참 형사가 고참 형사를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일을 배울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콤비가 야쿠자를 상대하는 방식은 어떨까. 아마도 오가미의 일방적인 방식이리라. 후훗~

 

 

구레하라 금융의 우에사와가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오가미는 이 소식을 듣고 의심한다. 구레하라 금융은 악덕 대부업체로 야쿠자가 배후에 있다. 우에사와의 실종은 해당 야쿠자의 범죄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실종으로 더 큰 사건을 찾아낸 거다. 상대의 것을 뺏으려고 하는 집단과 지키고 방어하려는 집단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중간에 오가미가 있다. 어떻게 형사가 야쿠자 사이의 싸움에 관여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여기서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오가미가 야쿠자를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도 이상했고, 야쿠자를 잡아들여야 하는 범죄 집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에 관여하고, 야쿠자와 소통하며 지내는 오가미의 행동을 보고 난 후,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가미의 어록이 여기서 등장하는데, 그건 야쿠자 세계를 이해하게 하면서도 이 세계의 생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공생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22~23페이지)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213페이지)

 

그러니까 야쿠자의 세계를 이해해야만 오가미가 야쿠자를 대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된 이들을 벌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정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오가미가 증명한다. 어차피 폭력단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사는 그들을 이해하는 게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 그래서 오가미는 그들의 불합리한 세계에 맞는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그의 말처럼 '야쿠자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감시하고, 도를 넘는 녀석들을 없애는 일(214페이지)'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다. 그래서 오가미는 그가 만든 나름의 기준과 방식이 있던 게 아니었을까? '야쿠자를 상대하는 방식' 뭐 이런 타이틀로 그의 머릿속에 새기고 일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특히 그 방식 안에서도 정의를 잃지 않은 오가미의 태도는 너무 멋졌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형사의 모습을 그린다면 오가미가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다. 그 현장은 바로 야쿠자의 세계일 것이고...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엉터리 수사로 야쿠자를 상대하는, 이렇게 야쿠자와 호형호제하기도 하면서 슬렁슬렁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가미지만, 마지막에는 야쿠자를 일망타진하고 홀가분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오가미, 드디어 정신 차렸군!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소설은 분위기를 전환하면서 또 다른 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오가미가 야쿠자 집단 사이의 화해와 계산을 중개하던 그즈음에, 뜬금없이 14년 전 미결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오가미를 지목한 투서가 날아든다. 왜 하필 이때? 이때부터 뭔가 자꾸 불안해지고 오가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태롭게 들린다. 그가 아끼던 라이터를 히오카에게 맡기면서,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이라는 가정으로 나중에 히오카가 해야 할 일을 말한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오가미와 야쿠자 사이에? 그랬다. 그렇게 안심했다. 오가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히오카는 오가미의 팀으로 그와 계속 수사를 하는 형사로 성장할 것이다, 라고 믿고 싶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드러나면서 소설은 반전을 일으킨다. 소설의 중간중간 보이던 수사일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검은 펜으로 줄이 그어져 삭제된 문장. 오가미가 정의한 현실 속의 논리가 히오카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아키코('요릿집 시노'의 주인이자 오가미와 끈끈한 우정을 나눈 여자)에게 히오카가 했던 말처럼, 독자인 나도 오가미와 히오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도 동지입니다." 이 사회에서 정의가 온전하게 이뤄진다는 건, 어쩌면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실이 너무 냉혹해서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을 꿈꾸는 것보다, 이 현실을 지금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며 대응하는 게 맞는 방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아마도 오가미 때문이겠지.

 

야쿠자 사이의 세력 다툼의 생생한 장면들, 야쿠자와 경찰 사이의 팽팽한 대결, 야쿠자 조직의 생리, 시민의 안전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경찰 조직의 실체까지 두루 다루면서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특히 야쿠자와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은근히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걸까?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범죄자와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관상은 닮았다고 하더라. 오가미가 야쿠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경찰이라는 조직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복선처럼 들렸다. 어쩌면 오가미는, 야쿠자와 싸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경찰 조직도 불합리한 세계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베테랑 형사의 야쿠자 정복기이면서, 신참 형사의 야쿠자 적응기이기도 하고, 세상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되는 건 아니라는 현실을 알리는,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이어받는 새로운 형사 콤비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이제는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출동하는, 어느새 선임 형사가 된 히오카의 활약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보고 싶다, 오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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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9-02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게 보셨나 보네요 형사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자기 신념을 밀고 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경찰 조직도 위로 가면 안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에 아주 무너지지 않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 여기에서는 야쿠자를 알면 그 세계를 알 수도 있겠지요 이건 어디나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에도 시대 소설을 보면 그때부터 야쿠자는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건 사라지지 않겠지요 한국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아주 없앨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밖에 없겠네요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지 잘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18-09-02 22:36   좋아요 0 | URL
이 소설에서 오가미가 말하는 것도 딱 그거였어요.
없앨 수 없으니까 같이 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적어도 그들이 민간인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기억하자는 느낌?
이런 형사 문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원래 현장에서는 경험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쓰고 보니, 아버지를 처음 봤다는 말은 좀 이상한 데가 있다. 그것이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언제 처음 만난 것일까? 그것이 내 몸의 소용돌이가 시작된 기원이라면, 내가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의 어디쯤에 다다라야 하는 것일까? 사실 ‘처음 본 기억’을 꺼낸 것은 이어서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8년 7월 11일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그날의 날씨와 창밖의 여름과 분주한 간호사들과 가족들의 모습. 하지만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 알 수 없는 생각의 문을 열자,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페이지)

 

시인의 첫 문장이 강렬하다. 아마도,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부모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을 소환하면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되는지는 알 것도 같다. 저마다 다른 시작점이겠지만, 그 시작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이랬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억의 시작. 나에게도 그런 시작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시작될 무렵을 거슬러보니, 나의 기억 대부분은 엄마와 함께였다. 남들이 말하는 '부모'라는 이름은 거의 떠올릴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일상과 성장에 있었던 건 부모가 아니라 엄마였다. 혹시 모르겠다, 기억이 없는 그 시절에는 아빠가 함께 있었는지도.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아버지와 나는 같은 시간 속에 없었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게 가슴 아프다거나 속상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아버지란 이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게, 남들이 말하는 ‘보통’과 달랐다는 게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무슨 연애소설인지, 아니면 이별 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알았다. 누군가의 눈물은 차마 앞에서 흘리지 못해 뒤돌아서 우느라고, 그 등만 보이게 된다는 것을. 소개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와 불화해본 모든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와 산문’이라고 하는 이유를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들려주는 시는 그렇다 치고, 산문은 그들의 기억과 시간에서 소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아니, 그 사실에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더한 이야기겠지. 어쨌거나 두 시인이 말하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인 것은 그대로일 터이니.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은 궁금한 정도? 왜 아버지가 주제인지, 왜 두 사람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아버지는 나와 다른지,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은 정도였다.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 대상을 굳이 책으로 내는 것까지 감행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한번은 만나고 싶은 이상한 느낌에... 호기심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말하는 그들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 하지만 곧 후회했다. 읽지 말 것을, 공감과 비공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내가 자라온 시간에 없던 아버지가, 다른 이들에게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속이 조금 상하더라.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추억이고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인데, 나에게는 왜 그런 아버지가 없던 걸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특히 나와 더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나는 그런 사이였는데, 아버지의 병원 생활을 하는 3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마주하는 가족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도 마주하기 싫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같은 밥상에 앉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동안 아버지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의 몇 배를 같이 보내고 있던 거였다. 괜히 억울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 병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이렇게 그럴 일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나의 불화는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글쎄, 내 기억엔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69페이지)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향해 무심한 사이였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내 인생 안에 포함한 적도 없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러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내 일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타인처럼 여겼던 것은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써놓고 시험 날짜를 기다리던 때였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왜 입학 원서를 바꾸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되물었더니, 아버지가 학교에 오셔서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단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갑자기 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던 게, 아버지는 내가 어느 학교로 원서를 썼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대해 서로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중학교 생활 내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학교에 찾아와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다니.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한테 물었다. 이때껏 부모 노릇한 적 없는 사람이 왜 뜬금없이 내 일에 참견하려 드는 거냐고. 당신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당신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 원래대로 진학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나의 보호자는 더 확실하게 엄마뿐이었고, 나의 성장 시간 내내 함께한 것도 엄마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버지는 옆에 존재했다. 가족들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일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부담을 주는 존재로...

 

시인의 말이 솔직하게 들려서 계속 읽게 된다. 무슨 사전에 정의라도 해놓은 것처럼, 아버지는 무조건 존경해야 하고 아프게 여겨야 하는 대상으로만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버거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게,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그리워서 얼굴을 그리고 싶게 하기도 하는...

 

종합병원의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병실, 요양병원.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면서, 엄마의 고충을 덜어드려야겠다는 것 말고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아버지의 보호자로 사인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 화가 났다. 왜 엄마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버지로 만들어놔서, 왜 엄마와 나 단둘이 있을 때 이런 일은 자꾸 일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3년여의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왜 나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양가감정이 수도 없이 부딪히면서 마음을 상처 나게 했다. 시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이 싸우듯, 사랑과 미움이 서로를 찌르고 희망과 절망이 자리를 바꾸듯, 그리고 눈물이 왼뺨과 오른뺨의 길이를 재듯'이.

 

작년 4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을 사실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언젠가 한 번은 죽는 거지만, 내가 그 대상을 직접 보게 된다는 게 낯설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본 게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다. 날씨가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나들이 가기 좋았던 날, 손님을 초대하기에도 덜 미안했던 주말을 낀 날, 마침 들어가고 싶었던 장례식장에 자리도 있던 날, 화장터에서 오래 기다리지도 않게 예약도 순조로웠던 날.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버린 날이었다. 누군가, 결혼식이 너무 복잡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두 번은 하고 싶지 않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었지.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피곤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결혼식처럼 한 번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남겨진 사람은 또 누군가를 보내는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식구들이 각자의 공간으로 떠나고 엄마와 둘이 남아있을 때, '어제 비가 이렇게 왔으면 더 힘들었겠다'는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나는, '당신은 우는 것 같다'는 그 순간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가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혹시라도 아버지가 혼자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시인이 말하는, 그 교차하는 마음은 한없이 공감한다.

 

나를 상처 입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을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파른 사랑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기도 하다.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미움이 있어 또 다른 사랑은 태어나고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4페이지)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나. 누구라도 그러겠지. 기억 속 아버지를 소환하며 추억하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나 하는 순간을 떠올리겠지. 한때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점점 조각이 난다. 하나둘씩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악에 받쳤던 감정은 마치 남의 일처럼 조금씩 흐트러진다. 이대로 계속 흐트러져 완전히 사라져가는 기억이도 좋을 것 같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는데, 앞서가는 사람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추적추적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얼른 가서 우산을 씌워드리고 집으로 가는 그 길을 같이 걸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앞서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걷는, 그냥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처럼, 가만히 걷기만 했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볼 때까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작정하고 뒤를 따라 걸었던 게 아니라 조금은 주저하고 있었던 듯하다. 평생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머쓱하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가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같이 가요' 그 말을 하기가 어색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것,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아쉬워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그날이 자꾸 생각난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은 우산을 같이 써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일은 지난 일이 된다. 시간은 세상의 전부였던 일들을 기억의 일부로 돌려놓는 재주가 있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85페이지)

 

기억이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너무 많아 버거운 것이기도, 때로는 텅 빈 것이기도 하니까. 기억은 호리병처럼 생겼을까, 핀셋으로 집어야 하는 작은 칩처럼 인간의 몸속 어딘가에 심어진 부품일까. 기억의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인간의 의지로 결별을 제안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88페이지)

 

가족은 뜨겁고도 차갑고, 성기면서도 질긴 이름. 어느 가족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한 부분이 조금씩은 있게 마련. 기타노 다케시의 말마따나 “누가 안 볼 때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비유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무 구질구질해서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결국 가족이고 끝내 가족이니까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 남는 게 또한 가족이라는 거.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9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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