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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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언제나 통용되는 말이 아닐까? 때로는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로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부정하며 거부하던 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게 다 아는 게 아니었다는 새로운 사실과 맞닥뜨리며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는 시간을 열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 삶에 스며드는 것처럼 다가오는 순간 중의 하나인, 바로 '내 옆의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는 이 소설처럼 말이다.

 

69세 아서의 아내 미리엄은 1년 전에 죽었다. 그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는 것도 의미 없다. 현재 그의 일상은 살아있는 사람의 시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그는 미리엄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런 아내를 잃은 상실에 스스로 집안에 가둔 삶을 1년 동안 이어왔다. 꽉 닫힌 집안에서 아내를 기억하는 일이 그가 사는 일상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만에 정리하는 아내의 옷장 속에서 낯선 팔찌 하나를 발견한다. 참이라 불리는 팔찌의 펜던트들. 옷장 깊숙이 숨겨있던, 처음 보는 아내의 물건에서 그의 여정이 시작된다.

 

처음 시작은 그에게 아내를 추억하는 여행처럼 여기게 했다. 읽는 나도 그랬다. 아서의 상실과 슬픔은 우연히 발견한 팔찌 하나로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을 것만 같았다. 그가 몰랐던 아내의 물건이 그가 알기 전의 아내의 시간으로 불러줄 거로 믿었다. 그 시간의 아내를 만나는 일은 그가 아내의 부재를 인정하며 슬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내의 팔찌와 그가 좇은 아내의 시간은 그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된 건 맞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마주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는 거다. 40년을 함께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시간을 마주함으로써 그는 아내의 숨겨진 마음을 듣게 된다.

 

"만약 당신이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당신을 만나기 전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었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는데 그 얘기를 당신한테 하지 않았다면, 그게 문제가 될까요?" (162페이지)

 

책, 코끼리, 호랑이, 팔레트, 반지, 꽃, 골무, 하트. 아내의 팔찌에 끼어있던 여덟 개의 참을 단서로 아서는 아내의 삶을 추적한다.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아내의 과거를 하나씩 마주하면서 슬픔과 의심으로 가득해진다. 런던, 파리, 인도까지. 아내의 친구, 아내의 인생, 아내의 남자. 영혼의 동반자라고 믿었던 그의 아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아내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마주한 아내의 과거로 그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가 아내의 흔적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그의 의심과 분노, 질투를 하늘을 찌르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시간이 흐를 때마다 점점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집 밖으로 나오는 아서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방문이 귀찮아서 거부하고, 집 밖으로 나갈 일조차 만들지 않고, 오직 아내 미리엄과 함께한 그 집에 붙박이가 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아내를 위한 애도의 모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틀렸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거였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곳에서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때마다 그 사람들 상황들 속에 부딪힌다. 피해가거나 숨거나 드러내지 않는 게 그가 보낸 1년의 세월이었다면, 아내의 팔찌를 들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그의 시간은 사람들 속에 속하면서 이야기와 마음을 주고받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는 평범한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는 것만 같았다.

 

아서가 발견한 건 결국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이었다. 호랑이한테 물렸을 때 그토록 용감하게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침착하게 대처했다. 정말이지 그는 자신이 비명을 지르거나 겁에 질릴 줄 알았다. 또 잠옷과 치약도 없이 이상한 영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로 전날만 해도 일상의 조화가 깨어진다는 생각만으로 이마에 진땀이 나던 그였건만.

카페에서 낯선 사람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했고, 그 조언이 그가 그 자신을 두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심한 노인네가 하는 소리 같진 않았다. 과거의 연적을 만났고 무심히 돌아설 수도 있었지만 세바스티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약물 중독 전력이 있는 청년과 청년의 개에게 보여준 열린 마음과 포용력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아서는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속 깊은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발견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람들과 사건들이 아서의 내면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갈망이었다. 욕정이나 그리움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돕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호랑이가 그를 공격했을 때 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오렌지색 짐승이 그를 내려다볼 때, 그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했다. (225~226페이지)

 

그랬다. 아서의 여정이 시작된 처음의 마음이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아내의 과거가 불러오는 그가 느끼는 감정은 배신감이나 분노, 절망이 아니었던 거다. 처음의 예상이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여정은 아서에게 조금 더 멋진 애도의 시간을 만들게 했다. 아내와 함께한 40년의 추억으로 충분한 행복이었으니, 이제 아내가 떠난 현재의 아서가 살아가야 하는 오늘과 내일을 보게 했다. 언제까지 우울하게 아내가 떠난 시간의 상실만 되새김하면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내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거다. 아서와 미리엄이 사랑했던 시간은 아주 아름답게 남아있으므로, 이제는 혼자 남은 아서가 살아가야 할 시간을 채워야만 한다. 그가 아내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것은, 그가 몰랐던 아내의 삶이 아니라 아내가 살아가고자 했던 방향의 시선이었다. 아내는 자유로운, 멋진 삶을 이룬 여자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아서에 대한 사랑도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아내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데, 아서가 주눅이 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서는 충분히 사랑받고,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었다는 확인과 확신을 얻은 게 이 여정의 수확이었다. 절망과 슬픔에서 희망과 기쁨, 용기로 바뀌는 시간...

 

"날씨가 아주 고약하네요. 걷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신 거예요?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러운지 원." 여자가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기가 막히게 화창하다가도 갑자기 어두워지고 음산해지죠. 하지만 태양은 반드시 다시 나와요.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네요. 이제 곧 갤 거예요." (370페이지)

 

아서의 마지막 여행지에서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이 폴폴 느껴졌다. 잃었다고 여긴 것들 대신 그를 채우는 것들로 행복해하는 표정이 저절로 그려진다. 일흔의 노인이 가진 삶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그런 생각 역시 편견이고 불필요한 생각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나이가, 누군가의 과거가, 상실의 슬픔이 문제가 되지 않는, 우리가 바라고 나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라고 말이다. 그의 사랑으로 충분했던, 그의 사랑이 불러온 자아 찾기 같은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어딘가로 한 발짝 나아갈 용기를 부르게 하는 아서의 이야기에 새해의 시작과 함께 밀려오던 우울함이 가신다. 문 한 번 열고, 한 발 내딛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이렇게 또 한 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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