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그럼에도 우리는
다노 / 동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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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게, 원래 그렇다. 다 잊었다고,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채로 있을 것 같은데, 가끔 그게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떠오른다. 그래서 기억이란 건, 지워지는 게 아니라 희미해진다는 걸 확인한다. 희미하게 흐려졌다가, 어느 순간 또렷하게 생각이 났다가, 잊고 싶다고 아우성치다 보면 또 억지로 눌러 담았다가, 그게 아닌 걸 알면 또 나타나서 혼란스럽게 하거나. 그러니까 한 마디로, 기억은 내 의지대로, 머릿속 다짐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우진을 처음 본 진서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

 

“혹시, 나 알아요?” 혹은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라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지 않은 순간. 진심이었다. 쌍팔년도의 작업 멘트가 아니라, 꼭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우진과 마주친 진서는 묻는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없는지. 우진도, 호재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가보다 싶다가도 불쑥불쑥 두통이 일듯 찾아오는 기억에 우진의 모습이, 우진의 목소리가 있다. 처음 본 게 아닌 것만 같다. 오랜 시간 가족처럼 지내온 호재에게 의지해 그 흔적을 찾아내려 하지만 쉽지도 않다. 뭔가를 자꾸 숨기고 있는데 그것도 금방 알아낼 수가 없다. 진서는 부딪혀 보기로 한다. 우진과 호재가 숨기는 어떤 시간을...

 

기억 상실이란 소재, 다시 만난 인연 앞에서 불행한 사람들, 그렇게 다시 만나는 게 옳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가슴 속 뜨거움은 그런 판단 따위 의미 없게 만드는 일들. 뭐, 색다른 분위기는 아니다. 그동안 만나온 소설들 속에서 익숙하게 느껴온 것들을 재탕하는 기분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 부분 분명 있는데, 어쩌면 이 소설은 두 사람의 로맨스 자체보다는 주변 인물과 함께 하는 힐링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이 소설이 로맨스소설의 달달함을 채우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 진서와 우진의 헤어짐의 이유를 알 것 같지만, 다시 만난 이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대의 기억 상실이 의미 없어지게 하는 재회가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진서의 기억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 (어차피 해피엔딩일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건가 싶은 염려가 생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 그들의 시간에 나에게만 잘려나간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면 감당해야 할 충격은 아무도 계산에 넣지 않고, 오직 다시 만나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진 연인으로만 그려져서 아쉽기도 하다.

 

이들이 가진 시간의 심각함 때문에 분위기가 우중충해지려고 하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그거 별거 아니잖아? 뭘 그렇게 고민해? 마음 가는 대로 그냥 해봐!’라고 말하듯 던지는 호재의 몇 마디가 어떤 결심을 아주 쉽게 만들면서 분위기를 전환한다. 누군가가 하지 못하는 말들을 호재의 가벼운(?) 입이 방정을 떨면서 대신 말해주기도 하는 순간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을 만드는 호재 때문에 복잡하다고 여긴 일들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실타래로 만들기도 한다. 진서의 아빠 역시 착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진서와 우진의 만남을 반대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흐르는 마음을 거스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진이 선택한 정의 때문에 와해한 그의 가족도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면서 가까이 다가간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의 형 강진이 보여주는 의외의 귀여움은 이 소설의 해피엔딩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 남의 일에 독설을 날릴 줄 알았지 관심이라고는 없던 인간이, 은근 오지라퍼가 되어가는 모습이 괜히 즐겁다.

 

누군가의 사라진 기억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연들을 보는 노파심은, 두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에서 두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용기 내게 한다. 잘라내려 했는데도 안 된다면, 모르는 사람으로 살면서 지우려고 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기억해내고, 다시 만나고, 같이 갈 수밖에. 상처와 고통으로 채운 시간이 그들의 기억에 계속 박혀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버티면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계속 사랑할 수밖에...

 

상황의 설정이나 전개, 뭔가 자꾸 끊기는 흐름도 분명 있었다. 그때마다 몰입은 떨어지고, 페이지는 더디게 넘어가긴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면 완독하지 못할 게 없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이 작가가 다음 작품을 내놓는다면, 그때는 좀 더 탄탄한 구성에, 캐릭터의 매력이 더해졌으면 좋겠다. 로맨스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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