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사실, 누군가가 좋은 말을 금방 떠올리지 못하거나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앞서는 것은, 좋은 말을 몰라서도 아니고 부정적인 상황을 바라서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다만, 마음이 품은 희망을 현실이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게 괴로워서 좋은 생각보다 나쁜 순간을 먼저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러니까, 나와 닮은 다른 많은 사람도 그러지 않을까 내내 생각했다. 마음과는 다른 말들이 자꾸 튀어나갈 때, 순간적으로 나가는 말들이라 금방 또 후회하지만 이미 놓쳐버린 거라 되돌릴 수는 없고, 그래서 자꾸 마음과 어긋나는 말들에 화도 나고, 그렇지만 진심은 그게 아닌데... 이런 마음이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거라고 애써 변명하지만, 그것도 완전하게 개운함을 주지는 않는다. 이런 책, 『방구석 라디오』 같은 글들이 계속 나오고, 누군가 계속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어쩌면 우리 속을 들여다보는 평범한 또 다른 우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멈추지 않는다. 똑같은 생각과 말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거나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말을 누군가 대신해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안심하는 기분. 이 책은, 그런 말을 대신 해주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일상에 지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각자 처한 상황이나 모습들이 달라도, 지친다고 말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와서, 지친다는 표현이 낯설지 않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도 없을 듯하다. 저자의 이런 읊조림도 그 일상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의 연속일 거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잘되지 않고, 상처받기 싫은데 그 상처들은 잘도 찾아오고, 내 마음 내 건데 이 마음을 단속하는 법도 모르겠고, 예전의 나는 이랬는데 지금의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지 짜증 나고, 잊으려 애쓰던 것들은 왜 자꾸 불쑥불쑥 찾아와 어지럽게 하는지 화가 나고... '다른,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거 맞지?' 하는 물음이 생겨날 때 들려올 답이 필요하다. 저자가 자신의 일상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답을 말하고 있다. 그 답이 삶의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답이라는 게 여기서는 중요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우리가 위로받고 싶은 말은 전파 타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사연처럼, 같이 듣고 생각하고 끄덕일 수 있는 공감의 목소리니까. 살아온 시간의 많은 이야기를 저자가 짧은 글로 전하면서 그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이야기로 일상의 편린들을 꿰맨 조각보처럼 한곳에 모아둔다. 여기서 하는 말은 그냥 듣기만 해도 좋아, 라고 멈췄다 갈 수 있게.

 

대단치 않은 일상의 기억들인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걸 풍선처럼 마구 부풀려 나의 중요한 일부인 마냥 소중히 간직하려고 발버둥 친다. 여전히 엄마에게 잘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나는, 어린 시절 엄마와 들었던 노래가 우연히 고막을 울리기 시작하면 이내 겪은 적 없는 애절함으로 어딘가 한쪽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103페이지)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인연을 억지로 이어나가기엔 우리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대신에 상처받은 내 마음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172페이지)

 

저자가 작은 노트에 적어놓은 일기를 읽는 기분이 든다.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쏟아내는 느낌에 오래 전 내 일상에서 사라진 '일기'라는 단어도 꺼내본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노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한 권을 다 채운 적도 없다. 그렇게 몇 권의 노트를 버리듯 방치하다가 발견하면 괜히 머쓱해진다. 이거, 다시 쓸 수도 없고, 누굴 줄 만한 새 노트가 되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물건으로 남곤 하기에 이제는 애써 노트를 쓰지 않게 된다. 메모하는 것의 필요성과는 다른 의미로 이젠 나와 거리가 멀어진 게 노트다. 가끔 닫힌 블로그에 몇 마디 주절거릴 때는 있지만, 그것도 일정하지는 않다. 얼마 후 삭제하기도 한다. 그 순간에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쓰고,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마음에 지워버리고 마는 일을 반복한다. 남겨진 게 거의 없다. 그러다 이런 글을 만날 때면 한 번씩 떠올린다. 한때, 언젠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을 지도 모를, 어떤 마음들을.

 

오늘 하루를 밖에서 보내면서 틈틈이 꺼내본 책이다. 저자의 일상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는 공감이 이어진다. 소개팅 전날의 두근두근 설렘,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 SNS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근황을 보는 시선, 좋아하는 것들에 묻은 시간, 적당히 포기하며 사는 어른의 삶, 꼭 지나고 나니 후회되는 것들, 말하지 않는다고 모르지 않을 것들을 풀어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저자는 수다스럽지 않은 사람일 것 같다)

 

짧은 글들이 불러오는 생각들이 참 많았는데, 그 생각들 대부분이 지나간 어떤 것들인 경우가 많아서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밖에서 보내기에 딱 좋은 날씨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어떤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다. 거기에 제목이 주는 어감까지 이 책의 분위기에 한몫한다. '그리움'이란 단어를 부른다.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지만, 그리운 것들이 쌓인 시간이 내일을 살아갈 힘을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지금도 온라인 상태에서는 인터넷 라디오를 습관처럼 켠다.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날로그 라디오를 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느 날 저자가 방구석에서 찾아냈다는 라디오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 풀어놓은 말들은 살아갈 시간에 대한 염려가 가득한 단상들이겠지만, 그것들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 소환되는 기억들일 테니. 녹음하고 반복해서 듣지 않는 이상 -지금은 바로 다시 듣기도 가능한 시대지만- 라디오에서는 계속 이렇게 DJ의 멘트도, 노래도 그대로 흘러가고 있을 테니 우리 마음도 그렇게 흐르도록 두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다시 또 보이고 알아지는 것처럼, 다시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을 즐길 수도 있을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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