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본인 스스로 가장이 된다.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생긴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그게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은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 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어간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감의 크기가 달라져간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중략)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페이지)

 

투병생활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달라져갔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아버지의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이 아니라는 데서 공감을 끌어온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 시간이 달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을 쌓아간다. 보통의 경우 이런 시간을 거쳐 가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이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그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어떤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아버지의 시간을 기록하면서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본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가면서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 부녀의 관계. 어떤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을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한 가슴을 쥐며 읽어 내려간다. 애써 피해가야지 하면서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들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참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극히 감정의 파도가 일렁일 것 같은 에피소드 앞에서도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려 애쓰는 게 읽힐 정도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의문이 들면서도 그래야만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 같은 순차적인 일들이 가능해지는 순간.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 가슴 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