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푸어 소담 한국 현대 소설 5
이혜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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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언젠가부터 '사랑=연애=결혼'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순수하게 마음의 소리 하나만 듣고 연애하기에는, 인생을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되는 분위기. 소설이나 영화 속 로맨스는 그 안에서 품는 바람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이 현실에서 마음 하나만 봐달라고 말한다면 허황되고 지독한 꿈인 걸까.

 

그 지독한 꿈에 현실의 공포를 더 하게 만들고 있는 소설이 『로맨스 푸어』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떠올리기만 해도 무서운 '5포세대(5포시대)'의 인생에서 무엇을 더 도려내란 말인가. 여기서 더 포기할 게 남아있기는 한 건가? 주인공 유다영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가 지금 처한 배경이 살아갈 만한 세상은 아니라는 것에 격한 공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영만이 아닌, 나에게도, 주변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현실에 섬뜩하고 쌉싸래한 시선을 던지게 한다.

 

서른둘의 은행직원 유다영. 위에서 까이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어정쩡한 나이와 위치에서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열심히 다닌다. 여유 부릴 돈도 없다. 남자친구도 없다. 그래서 머릿속 계산기를 굴렸다. 은행 고객으로 왔던, 40대 후반을 달려가는 남자 이성욱에게 여자로 어필하려 애쓴다. 강남 120평의 유토피아팰리스에 입성하기 위해 비위 상하는 식사자리에서 소화할 수 없는 상대의 말까지 꼭꼭 씹어 넘긴다. 그 정도쯤이야 뭐, 참으면 된다. 인생 안정권으로 스며들기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릴 수 있다. 이 남자만 꽉 잡으면 전염병처럼 좀비가 창궐하는 서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가 준 백신은 생명줄이고 그의 유토피아팰리스는 단단한 성벽이다. 그녀를 감싸줄 안전지대다. 방심하면 나 혼자 죽는 세상에서, 없는 사람만 당하는 현실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다.

 

편의점도, 약국도, 커피숍도, 내 뒤를 노리는 좀비보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들이 더 무서웠다. 솔직히 나도 좀비가 돼서 저 인간들 목덜미를 물어뜯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거리 쪽 사람들도 밀리진 않았다. 격분한 사람들은 유리문을 부수고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끼고 싶지 않았다. (67~68페이지)

 

유다영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좀비가 공격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방법을 유유히 찾아가고, 폐쇄된 강북을 방치하며 강남을 안정권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음모론이 사람들 사이를 돌며 와해를 불러온다. 누군가 빠져나간 자리가 내 자리가 되어야만 하는 간절함과 이기심이 힘을 발휘한다. 그 과정을 보여주며 적나라한 현실을 비추는 게 이 소설의 포인트인데, 섬뜩하다. 안타깝지만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삶의 진실을 그대로 쏟아낸다. '누구라도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과 '아마 나도 그랬을 거'라는 답을 동시에 내놓는다. 그 가운데서 또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며,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게 꿈으로만 머물 로맨스일지라도 말이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버리는 게 의리였다. 오늘날, 함께 잘살아 보자고 부르짖는 '연대'는 목숨을 앞에 두고 떠올리기 힘든 단어다. 말 그대로 각박한 시대, 타협의 선은 없다. 오직 내 목숨 지키는 게 나에 대한 의리고 소신이다. 정의가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라 정의를 버려야 내가 사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다. 좀비가 내 목을 물어뜯고, 내가 하루하루 버티기 위해 아이볼을 획득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시쳇말로 영혼이라도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건 어느 영역에서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방식이다. 전쟁터 같은 전염병이 발악하며 공격하는 지금, 안전지대로 입성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인 거다. 그래서 다영은 사랑 운운하며 의리와 정의를 말하는 우현에게 선뜻 진심을 보일 수 없다. 열정적으로 연애했던, 돈이 없어도 좋다는 20대의 연애를 품기에 현실은 냉정했다. 적당한 온도의 연애와 돈이 필수라고 여기는 30대의 여자 다영은 현실을 대하는 소신을 지키고 싶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땐 옆에 있어줄 사람이 중요하지만, 명확한 목표가 생기면 옆에 있는 사람이 거치적거리는 법이다. 우현은 한참 동안 방문을 긁어댔지만,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223~224페이지)

 

답이 나와 있는 쉬운 선택 같지만 늘 그렇듯, 인생에서 딜레마의 늪에 빠지는 순간이 온다. 좀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백신을 놓아줄 남자 이성욱, 함께 좀비와 맞서 싸우며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남자 우현. 한 남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로맨스는 빠진 상태로 오직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선택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복병은 여기서 등장한다. 다영이 지키고자 했던 인생의 소신이 오작동하면서 계산기의 고장이 다른 삶을 열기 위해 꾸물대고 있었다. 그 선택의 문제가 단순히 사랑에서만은 아니다. 다영이 보여주는 것은 지금 처한 상황을 타개하며, 오늘, 내일을 살아갈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바로 1초 후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아직은 정의가, 의리가, 희망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 진짜 괜찮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포기해야 할 게 생긴다. 경제학 수업을 얼마나 들었는데, 여태 이 기초적인 공식을 부정해왔던 거다. (309페이지)

 

맨스를 선택하며 '푸어'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기회의 문제와 결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포기하며 기회비용을 생각하는데 '로맨스'가 해당되는 문제라는 게 조금 씁쓸하다. 그게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어서 더 암담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여러 가지가 갈수록 늘어나는 걸 부정할 수 없어서 서글프다. 그 간극의 크기를 느낄 때마다 좌절한다. '정말 이것 밖에는, 정말 다른 선택의 길은 없는 걸까?' 싶은, 답이 없는 물음표를 계속 던지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무섭다. 좀비나 메르스보다 더한 공포인 거다. 백신도, 마스크도, 손세정제도, 비타민이나 홍삼도 구해주지 못할 양심과 의리,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고 답을 던져준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고,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간절하다. '왜?'라는 물음에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는, '본능'의 소리를 들었던 우현과 다영의 선택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그려본다. 많은 것에서 '푸어'를 노래하는 세상이지만, 그래, 아직은, 아직은...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 소설일 거란 기대와는 다르게 살아가면서 놓지 말아야 할 것, 아직은 품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한 희망을 부르는 생존모험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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