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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
진양 지음 / 청어람 / 2006년 9월
평점 :
선을 긋고 시작할 수 없는 마음처럼, 마침표도 그렇게... 『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걸 가지고 애가 탔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애가 탐을 허기지다는 느낌으로 받고는 했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그립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누군가가 그러던데. 그런 걸로 보면 가끔은 폭식하듯 채우는 끼니가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외롭다는 것도, 그립다는 것도 잘 모르고 살았는데... 그런 것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 적도 없었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살아왔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면서 ‘그건 그리움이야.’라고 답을 말해주는 것만 같을 때는 빵점 맞은 시험지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다 틀려서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점수표, 오답 노트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느낌. 그럼 이럴 때는 시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배우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럼 절반은 맞을 수 있을까.
사랑을 시작할 때, '이때쯤 끝내야겠다.' 마음먹고 시작하는 경우는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굳이 그 유효기간을 계산하지도 않았었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으면 담은 채로, 그러다 어느 날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헤어지는 것으로 한 번의 사랑을 끝내고는 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많은 일 앞에서 ‘원래’라는 부사를 붙여서 말을 하고 나면 그게 맞는 것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이미 끝난, 아니면 어긋난 많은 일 중에서 유독 사랑이란 것에 ‘원래’라는 말을 붙이기는 싫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말을 붙인다. 그러면 한 번의 웅얼거림은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은수와 지후의 일들 앞에서도 나는 내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 인생,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이 찾아오는 이 시간도 원래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해지고 싶어지고는 했다.
서은수와 강지후는 3년 동안 연애를 했다. 어느 날 은수는, 둘 사이의 스파크가 없어서, 시들해진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지후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놈의 스파크가 없어서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반면 제법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남자.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비밀연애를 3년이나 했는데, 이젠 그 헤어짐의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할 수도 없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비밀연애는 그런 것이니까. 서로를 끌어안고 자폭할 수 없으니, 서로가 그 공간에서 쿨하게 살아남고자 담백해야 한다. 그들의 이별은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조금의 위로는 날려주고 싶어진다. 사랑이 쿨하지 못한데, 어떻게 이별이 쿨할 테냐.
이 나이 정도(?) 살아보니,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해야 어울릴 듯하다. 물론 그 안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캐릭터들은 소설에서 등장할 수 있는 조연들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이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더 많이 눈에 담게 했다. 두 사람의 이별 순간부터 그려지던 것이 수상하더니, 결국에는 그들의 이별 후 모습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나게 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와 누가 손을 내미는 것도, 누군가는 그 손을 잡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다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시 만난 적이 없었으니, 지금 은수와 지후의 모습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헤어진 누군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뒤돌아서서 가느라 그 뒷모습도 안 봤으니 알 턱이 있나. 그땐 그랬다.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혹시라도 만나다가 그 마음이 식으면, 싫어지면, 솔직하게 얘기하고 끝내자"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연애를 시작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다 끝이 날 때는, 조용히 연락 끊고 사라지지도 말자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면 바람이나 양다리는 허용할 수 없으니, 상대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게 솔직하게 표현자고. 누군가에게 이별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상대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어디로 숨어버리듯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만이라는 의사표현도 분명히 했고, 누군가를 만나면서 바람이란 것은 허용하지 않았으니 상대에 대한 예의를 다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헤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상대가 다른 이를 좋아해서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못해 조용히 연락을 끊어버린 적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가슴에 품었던 이별방식은 저런 거였다. 감정에 솔직해지자는 것. 연애라는 이름이 그 어떤 목적지로도 갈 수 있겠지만, 그 목적지가 이별이라면 솔직하게 입 밖으로 꺼내는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은수의 입장을 쉽게 이해했다. 가슴에 스파크가 일지 않아서 이별하자 말하는 은수에게 공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의 말을 들었을 지후를 살짝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잘못을 물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부족한 감정들이 싫어서 이별을 얘기해야만 했던 은수도, 스스로의 변화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도 그걸 이별로 연결하지 못한 지후도... 각자의 자리에 있었던 두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고 이야기한다면 오지랖일까. 아니면 가슴에 불꽃을 피워줄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대해 좋은 점들만 열거해주어야 했을까. 나는 그냥, 내가 많이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시간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때 내가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 한번쯤 뒤돌아봤으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하는 과정이 보통의 절차라면, 이 이야기는 거꾸로 진행된다. 헤어짐을 말하는 순간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그 헤어짐 후의 두 사람의 모습을 담으면서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을 남겨주고 있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누군가의 감정을 안타깝게 지켜보게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은수와 지후, 두 사람의 이별후 마음을 보게 한다. 당사자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알아차리더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제 3자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참... 그래서 소설인가 싶다가도, 바로 며칠 전에 본 누군가를 떠올리면 일상인가 싶기도 하다. 문학이 주는 재미는 여기서 또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현실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처음 사랑이 시작할 때, '아, 사랑이다.' 라고 말을 하고 시작한 건 아니라는 것."
"이별도 똑같지. 입 밖으로 '이별하자' 꺼냈다고 해서, 그게 이별인가." (160페이지)
이것만큼 정석인 말이 있을까. 우리가 사랑을 하기 시작할 때나, 이별을 하게 될 때는, 출발선에 서서 "요이~땅" 하는 신호음과 함께 출발하는 달리기가 아니라는 것. 사랑도, 이별도...
몇년 전, 우연히 발견하듯 만났던 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던 그 순간 나만의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힘든 마음을 힘들다 말하지 못한 때여서, 누군가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한참을 쥐고 흔들었던 책이었으니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었던 게 사랑 때문은 아니지만... 어딘가 깊은 곳으로 뚝 떨어져있는 것 같은 기분에 더 깊은 우물을 파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그리 심각하게 우울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닮아있는 우리네 현실 같은 이야기에 깊게 빠지게 되어서라고 하면 핑계가 좀 되려나.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건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