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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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 그 숫자 그대로 너무 아름다워서 떠올리는 것 자체가 설렘과 함께 올 것 같은 나이라 부르는 십대, 이십대. 피어오른다, 라는 말이 잘 어울려 활짝 핀 꽃송이를 연상케 하는 얼굴. 그 찬란한 시간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물의 목소리다. 한이 쌓여 숨 쉬는 것을 어렵게 하는 표정이다. 생존해 있음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다.

『겹겹』 속의 할머니들,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암흑이다. 단지 그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겪어왔기에, 지금의 외로움과 고통이 남아있는 것이기에 더 아프다. 거짓에 속아서, 어려운 형편에 가족을 위해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팔려가듯 끌려가 당했던 수모와 고통을 그 누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의경 할머니의 “꽃이 피어오르는 걸 끊어낸 거지.”라는 말씀처럼 피어야 할 나이에 피지 못하고 꺾여버린 꽃이다. 그렇게 꺾여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오고가는 이들에게 밟히고 짓이겨진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기댈 곳도 없고 위로해줄 이도 없다. 가장 큰 아픔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300원, 400원에 일본군 성노예로 팔려가 인생을 구속당한 삶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생긴 지 80년, 일본군의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이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전히 그 폭력이 만들어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을 모습과 목소리를 저자 안세홍이 12년 동안의 기록을 바탕으로 『겹겹』을 만들어냈다.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그 시간동안 만나고, 모습을 담고, 목소리를 기록했다. 한이 섞인 울음소리, 돌아갈 수 없는 꿈같은 기억, 아프기만 한 시간들의 토해냄. 그렇게 겹겹이 쌓인 상처와 가슴속 돌덩이들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흔적이고 상처이기에 드러내야 한다.

저자가 할머니들의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몇 차례씩 중국에 오고가면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안부를 묻는다. 꺼내기 어렵고 아픈 기억이지만 제대로 듣고자 힘을 낸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를, 겪지 않은 그 아픔을 토해 내달라 부탁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슴을 찌를 듯이 아픈 이야기,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한 시간의 기록을 들춘다. 순전히 기억력에 의지해서. 살아있는 증인이기에 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할머니들은, 전쟁은 끝났으나 돌아갈 곳이 없다. 패전한 일본군 대신 내려오는 소련군을 피하고자 중국에 숨어들면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일은 더 어렵게 됐다. 중국말도 모르고,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 어딘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흐르듯 그렇게 살아왔다. 그곳에서. 중국 땅이지만 중국인은 아니고, 북한의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채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이 시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야 할 상태인데도 방치되듯 살아가는 모습들이 아프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쌓인 시간들이 흑백의 사진 속에서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책 속에 담긴 여덟 분 할머니들의 모습이 상처 그 자체였다. 끌려가고 감금당하고, 계속되는 성폭행 끝에 남겨진 것은 버려짐이었다. 전쟁은 끝났고, 일본군은 떠났고, 할머니들은 남겨졌다. 전쟁의 최전선이었던 곳에서,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그곳에서, 이방인인 채로 버려졌다. 그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시간들이 할머니들의 가슴 속에 어떤 모양으로, 얼마만큼의 무게로 쌓여있는 것일까.

“조선말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맘대로 안 돼.” (이수단 할머니)
“갈 수만 있다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박우득 할머니)
“혼은 조선에 가 있어요. 꿈을 꿔도 조선 꿈이지.” (현병숙 할머니)

고향이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다. 조선이란 나라는 할머니들의 고향이었지만, 돌아가기에 만만치 않은 곳이다. 남아있는 가족도 없고, 설사 가족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오랜 시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의 교감이 쉽지 않을 터. 배삼엽 할머니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에 한국에서 사망 신고가 되어 있다고 한다. 국적회복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멀리 고향에서 보내온 가족사진 한 장으로 평생 마음을 의지해 살아오신 이수단 할머니의 그 간절함은 또 어떤 것일까.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하루도 고향을 잊어본 적 없다면서 지도를 보고 사신다는 김대임 할머니의 절절함은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위안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없는 환경,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에서 화가 끓어오르는 박서운 할머니의 열기는 평생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고향에 가고 싶다고, 고향에 갈 방법을 묻는 박우득 할머니의 바람은 어떻게 이뤄드려야 할까.

그분들의 상처가, 아픔이, 고스란히 박힌 사진들이다. 찍는 이의 마음과 피사체로 앞에 있는 이의 마음이 그대로 대화가 되는 사진이다. 조선말을 잊고, 여러 가지 질병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잊지 못할 그곳. 할머니들의 고향을 그리워한다.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지만, 그 간절함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안타까움으로 꾹꾹 눌러 담은 단어, 고향. 자신이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이라 여기며 흘러간 시간과 꽉 채운 나이를 아쉬워하는 마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 할머니들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듯 저자 안세홍의 사진들은 보는 이, 글을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오랜 시간 할머니들을 만나러 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자는 계속해왔다. 계속 찍고, 듣고, 기록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할머니들의 이 모습은 그렇게 전해져왔다. 이해할 수 없는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사진전을 열었던 저자의 마음의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모르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알게 전해줘야 한다. 들려줘야 한다. 그래서 저자의 사진들과 이 책 『겹겹』은 그 의미가 깊다. 잊을 수 없는 그 아픔의 시간들을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보고, ‘잊는다’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않게.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저자의 ‘겹겹’ 프로젝트가 결코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여전히, 아픔은 남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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