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서 고맙고 감사한 사람, 있으나 없으나 별 피해 안 주고 있는 사람, 차라리 없으면 좋겠는 사람... 어떤 종류의 사람이 썩 괜찮은 사람인지는 다 알지 못하겠지만, 어떤 종류의 사람이 괜찮지 않은 사람인지는 알 것 같다. 차라리 없어져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 그 사람만 없으면 다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 나를 악하고 독하게 만드는 그 사람 때문에 인생 이렇게 꼬인 것 같은 이유를 붙이고 싶은 사람... 그런 대상이 가족인 경우, 정말 누구 하나 죽어야만 끝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정말 궁금해진다. 누구 하나 죽으면, 끝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고...

보통은 잔인한 달은 4월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잔인한 달은 5월이다. 어버이날 말고도 이런 저런 가족 행사가 몰려 있는 달,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달, 달력 한 장을 쭉 찢어내어 5월을 전멸시키고 싶은 달...
곧 엄마 생신이다. 우리집에서는 국경일보다, 명절보다 더 큰 행사, 또 한 번 가족놀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족이 아닌 가족놀이. 오늘도 한번 그 가족놀이 예행연습에 피를 볼 뻔했다. 아, 침묵해야 조용한 가족놀이라도 지나갈 수 있겠구나 싶어 다시 입을 닫았다. 이 침묵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으나...


미련하게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이다. 평균나이 49세인 이 가족이 사는 법은 따로 국밥인데, 한 그릇에 넣고 비빈 맛있는 비빔밥 같기도 하다. 한 덩치 하는 형부터 망한 영화감독인 화자, 이혼하고 엄마 집에 들어온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딸인 조카까지. 모두가 실패한 인생처럼 엄마 집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이 엄마가 대단한 것은 그저 일상처럼 손을 내미는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오는 자식들을 보는 것처럼...

그게 가능해? 라고 묻고 싶어진다.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고 했다지만 그게 임무처럼, 의무처럼 가능한 것이냐고 따져보고 싶어진다. 그거 뭐 별건가,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가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익숙하다.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하는 가족놀이와 이들 가족의 모양새가 뭐가 다른지 살펴보고, 아무리 뒤져보려 해도 큰 차이를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이들의 엄마가 아니라는 거. 이해하기 싫으면 이해 안 해도 된다는 거. 그래, 이 책이 굳이 이해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근데, 이해가 아닌 듣고 싶어진다. 이들이 하는 얘기, 투박하고 거칠지만 이들의 마음속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이 가족의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는지 뭐 하나는 꺼내어오고 싶어진다. 작은 바람 하나쯤은 가져와도 되는 거잖아. 콩가루라면 콩가루이고,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 이 가족도 이렇게 살아가잖아. 그 옆구리 한 구석쯤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나눠줘도 되잖아. 그래서 들어가 보려고, 이들 가족의 사는 방식에. 나의 가족놀이를 지우고 가족이 되어보려고...

‘당신을 닮았다’는 말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험한 욕이며, 당신은 우리 집에서 암적인 존재이며, 오직 식구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평생을 살아왔으니, 설령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그 죽음을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발악을 했다. 그저 한 사람 사라졌구나 싶은 부재를 느낄 뿐이지 그 어떤 감정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며 왜 이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사는지를 모르겠다고, 사람이라면 가족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을 뱉어내면서 미친듯이 날뛰던 어느 한 순간이 생각났다. 여전히 당신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식구들의 증오와 미움을 받으면서 익숙한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어느 날 가만히 바라보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도 싫어했던 당신과 너무 닮아있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당신을 닮은 외모, 당신에게 그렇게 싫어했던 습관들 행동들을 나도 모르게 내가 하고 있을 때,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다며 한참을 울부짖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겨진 것처럼...

이 책 <고령화 가족>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 번 가슴의 조임을 느꼈다. 심장이 그 동작을 멈추면서 아주 작게 오그라들었다가 다시 늘어났다가 그 무언가가 나의 심장의 동작을 잠시 조정하고 있는 것 같은.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게 쥐고 흔드는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와 가족'이란 이름으로 연결된 그들의 이야기가 내 심장의 박동수를 주관하는 것만 같다. 엄마가 살고 있는 낡고 작은 빌라, 그곳에 세 명의 자식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평균나이 사십 구세. 깡패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 빌붙어 사는 첫째 오함마, 영화 한편의 실패로 빈털터리가 되어 가정도 잃고 돈도 잃고 남은 게 하나도 없이 엄마에게 기어들어간 둘째 오감독, 두 번의 이혼 후에 그래도 큰소리치며 살겠다고 중학생 딸과 함께 들어온 막내딸 미연이. 그리고 그런 자식들에게 한마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래 그렇게 함께 살았던 것처럼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 엄마.

실패한 자들의 집합소 같았던 엄마의 빌라였다. 그 나이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이미 그 가정에서 또 다른 가정이 탄생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시간인데, 이 책 속의 그들은 참 난감하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말 그대로 '멀쩡한 인간' 하나 없는, 오랜만에 만난 고기 앞에서 서로가 더 먹겠다고, 집안에서의 자신의 영역 다툼에 유치하기까지 하고, 담배 피우다 걸린 조카를 삥 뜯는 것은 교육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하나둘씩 밝혀지는 그들 가족의 웃기지도 않은 비밀들이 공존하는 그 곳. 그런데 그곳은 신성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겉보기에 막 나가는 인생들이 모인 그곳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지만, 그랬다. 아마도 그 안에, 그 중임인 ‘엄마’가 계셔서 그런 거 아닐까 기대게 된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드라마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페이지, 그리고 다음 페이지, 한장 한장 넘기면서 사람을 웃기게 만들어 방바닥을 뒹굴게 한다. 웃기기만 한줄 알았더니 가슴 찡하게도 만든다. 어디선가 우리집을 몰래 엿보다가 가서 그대로 담아둔 것은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들게 한다. 어쩌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차마 그 밑으로 떨어지기가 두려워 모여든 자식들에게 엄마가 베푸는 마음, 밥, 애정, 그리고 그 무엇이 더 존재할 것이다. 어떤 대가가 따르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돌아갈 곳이, 쉬어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쉬게 만들어주는 곳. 엄마가 있는 바로 그 집, 그들, 가족. 엄마이기에 가능한,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자식들 앞에서 얼굴에 혈색이 도는 엄마를 나는 이해할 것도 같다. 성공해서 큰소리치려고 모여든 것이 아닌, 그저 엄마에게 기대려고 오는 자식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흔히 '자식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자식의 입장일 때는 절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들이 부모가 되면, 엄마가 되면 다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전에 알던 누군가가 그랬다. 가족이란 존재 자체가 부담이라고.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 말을 나는 그 나이에 이미 이해하고야 말았으니까. 외로워서 함께 하고 싶은 것도 가족이며, 함께여서 고통스러운 것도 가족이라고.
같이 있을 땐 원수처럼 미워하다가도 막상 없으면 그리운 게 식구인 모양인지 나는 문득문득 민경의 짱알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오함마의 뱃고동 소리도 그리웠다. - 243페이지
엄마의 집에 머물렀던 그 시간은 그들에게 휴식이고 충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시간들을 겪어가면서 그 무엇도 설명해줄 수 없는 그 감정들을, 눈물을, 웃음을 느끼지 않았던가. 서로 부딪히고 아옹다옹하고, 그러면서 조용히 서로를 위하는 것을, 이제 다시 각자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시간을 만난 것 역시도.

 

이야기가 이야기로 끝나지 않음을 느낀다. 작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그 모든 이야기를 나에게 비추게 된다. 온전히 나에게 다가올 느낌들과 이야기들로 다시 들려오게 만드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으면 절대 생겨나지 않을 그 감정의 변화들과 여운들을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두 번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도 슬픈 일일 것이다. 그 감정의 격랑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아서 다시 펼쳐들 수 없는 책이다. 여전히 내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인데, 손이 뻗어지다가도 다시 거두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가족놀이이 지쳐있다가도, 이 책들 앞에서 다시 ‘놀이’가 아닌 ‘가족’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는 한다. 그게 가능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빗소리마저 구슬프게 들리는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그 가족이란 것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지는 한 사람이다.

왜 이제야 보였을까...
이 두 책의 표지가, 느낌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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