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있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숙제처럼 무언가를 다시 해야 할 때나 꼭 필요한 어떤 부분을 찾아내야 할 때 같은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는 한,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펼쳐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성격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몇 번씩이나 손길이 가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출간된 지 딱 10년,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나고 같이 흘러왔던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처음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이 책을 만났을 때는 로맨스소설인줄도 모르고 만났다. 읽다보니 점점 빠져든다. 말랑말랑한 감정 하나만을 주고 있던 게 아니었다.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로맨스소설이되 로맨스소설만은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저절로 그 공감의 둘레 안으로 파고들어가게 했다. 몇 번을 도서관에서 이용하다가 결국은 구매하고야 말았다. 이 책은 나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던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나와 같은 공간에서 그 긴 시간동안 이 책으로 울고 웃고, 위로 받고 보듬어주고, 공감과 이해를 같이 경험해왔다. 이 책의 어디쯤 펼치면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있어서 맞춤형으로 처방전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이쯤이면, 나의 모든 희로애락을 같이 해온 이 책에게 ‘절친’이라고 이름 붙여줘도 되지 않을까? ^^ 그리고 몇 년 동안 들어왔어도 질리지 않을 이 말이 어느 순간 이 책과 동의어가 되어가기도 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서른 한 살의 라디오 작가 공진솔과 서른세 살의 라디오 피디 이건의 사랑이야기다. 프로그램 이름마저도 구수한 <노래 실은 꽃마차>에서 같이 호흡을 맞추게 되면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 남자 건PD, 시집까지 냈던 시인의 경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 소심한 진솔은 더 긴장한다. 글 좀 쓴다고 해서 혹시나 작가를 괴롭게 할까 싶어 마음의 경계를 세우지만, 시간과 마음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마음이 다가갈수록 서로를 더 알게 되고 동료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튼다. 그러면서 또 한 번 겪게 되는 사랑이란 풍랑을 두 사람은 어떻게 건너갈지가 궁금해 내 마음도 동행한다.

라디오라는 단어가 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여전할 수 없었던 걸까. 한때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이 엽서나 편지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워드프로그램으로 타이핑한 것이 아닌 손으로 악필일지라도 손으로 꾹꾹 눌러서 쓰는 그 힘에 온 마음을 담아 적었더랬다. 마치 그 순간 그렇게 적어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마음을 그곳에 담아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운이 좋아 전파를 타고 나에게로 다시 날아오면 무언가를 털어내는 듯했다. 가슴 속 이야기들을 날려 보내고 듣고 싶은 음악 한곡과 함께, 그렇게 또 한 번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던 때가 있었는데. 어떻게 틀리지 않고 쓸까 하는 마음과 적어가는 동안 한 번 더 내뱉는 말들이 주는 개운함과 우표를 붙이고 날아가는 시간, 다시 또 돌고 돌아 나에게 들려오던 시간들이 지금은 사라진 듯하다. 문자 한통에 실시간으로 소개되는, 누군가의 사연이나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만나는 이 책은 그래서 조금 더 느리게 흐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 역시나 그렇게 느리고 단단하게 흐를 수도 있다는 듯이……. 그런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깊어져가는 모습을 건과 진솔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두근거렸던 시작과 서툴게 차단했던 마음과 그래도 사랑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감정들이 풀어내는 것은 온기였다고,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고.

아주 어렸을 적에, 삼십대가 된 어른의 모습은 사랑이 아니라 삶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 그려지고는 했었다. 몇 살에는 무엇을 하고, 몇 살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이미 정해진 매뉴얼대로 진행되고 있는 삶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그렇게 정해진 것은 없다고 생각되더라. 그런 순간들 속에서 진솔과 건을 만났다. 서른이 넘은 사람들,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본, 가슴에 크고 작은 상처 하나쯤은 안고 살아왔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듣고 싶어진다. 평범한 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나도 같이 녹아드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한번쯤 사랑에 실패해봤던 이들이 조심조심, 그러나 진심을 다해 또 다른 사랑에 다가가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이 사랑인 걸까 거듭 확인하고 싶어지고, 사랑이라 표현하고 다가가도 될는지 조심스럽고, 이 사랑이 무사히 앞으로 갈 수 있을지 염려스럽고……. 그러면서도 계속 가고 싶은 이유, 사랑이란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이유를 버리지 못해서인 건 아닐까, 라고.
어쩌면 이리, 쉬운 일이 하나도 없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잊는 것도 죄다 어렵다. 만만한 일이 뭘까, 세상에서. 마음속에서 메아리가 윙윙 울리고 있었다. (352페이지)

이 책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은 건이 나쁜 남자라고 했다. 가만히 있는 진솔을 흔들어 마음을 고백하게 만들더니, 정작 고백을 듣고서는 그 마음을 자신의 마음대로 정의해버렸다.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몰라요.”라고. 진솔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여놓고 순간 진심을 말해버린 자신의 마음을 바보 같이 수습해버렸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건이 나쁜 남자일까? 몇 번을 읽었어도 나는 잘 모르겠다. 온전하게 진솔에게 가기 위해 망설이던 것도,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을 때 따라올 기다림도, 그가 주었던 아픔들에 대해서 그가 치유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남자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건을 나쁜 남자라 말할 때 속으로 웅얼웅얼 하고 싶은 말을 참고는 했다. ‘진짜 나쁜 남자를 못 봤구먼.’하고 말이지. ^^ 나라고 나쁜 남자를 알아봤자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다만 이 남자, 건이 진심을 말하고 다가가는 모습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이해해주고 싶은 아량이 발동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 현실감이 느껴지게 했던 것 같다.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어서, 일상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시행착오를 하는 게 사람이라서 인정하고 싶은 남자라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하나하나에 우리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어서 더 애틋한 소설이다. 바람 따라 떠도는 자유를 느끼고 싶은 선우, 그런 선우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애쓰는 연인 애리, 자신의 진짜 사랑이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찾지 못해 우왕좌왕 고민했던 가람, 사랑으로 받은 상처에 다시 오는 사랑이 주춤거렸던 진솔과 건.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해주신 이필관 옹까지.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이들이 취하는 행동,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메시지들이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만나도 그때그때의 마음에 스며들어 치유해주는 힐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책을 다시 찾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테지. 마음이 두 동강 났을 때, 나를 다독여주고 싶을 때, 봄의 시작에 찾아온 지금의 꽃샘추위를 혼내주고 싶게 따스함 전해 받고 싶을 때.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이 책을 만나야 할 이유가 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로, 더 이상 이 책을 로맨스소설이라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단맛 쓴맛, 살아가는 매 순간의 모든 맛을 경험하게 해주는 인생소설이라 명명하면 어울리려나. ^^ 여전히 사서함 110호의 <노래 실은 꽃마차>의 사연도 계속되고 있을 것만 같다. 아직도 진솔과 건이 거기에 있을 테니까...

2013개정판에 부록처럼 수록된 단편 「비 오는 날은 입구가 열린다」의 제목은 이 책을 읽은 사람이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것이다. ^^ 그래서 내용도 연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단편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내용이다. 오래된 골동품을 파는 가게의 남자와 파꽃을 그리는 여자가 남포등이 켜지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안에 두 사람의 추억과 함께 한 이야기가 겹쳐져 하나로 이어진다. 내용이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도록~ ^^



Dear Diary

잘 자요. 좋은 꿈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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