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화 구두 세트 - 전4권
박윤영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3월
품절


어른이 된 후에 만화라는 것에 관심 갖거나 시간 때우기 용으로라도 읽어볼 생각 그다지 안 하고 살았다. 만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하는 게 가장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내가 뭣에 꽂혔는지 이 만화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림이 너무 예쁘니까, 이야기가 궁금했으니까,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니까.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사랑이 두려운 여자.
스물여덟의 신지후는 직장상사 오태수 대리를 좋아한다. 지후는 자신의 마음을 오대리에게 표현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오락가락하는 마음과 오대리도 자신을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당연하지. 누군가를 마음에 담은 사람은 상대도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저절로 갖게 된다. 자신이 하는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후는 사랑을 시작하려는 마음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지나간 사랑이 남기고 간 상처와 흉터가 다시 사랑을 하기 어려운 겁쟁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후는 오대리에게 용기 있게 한발 나아간다. “좋아해요.”
사랑을 믿는 것보다 연애를 하는 남자.
남자 나이 서른하나. 연애를 하다가 끝나도 별 상관없다는 마음이다. 그냥 선을 봐서 결혼하면 되지 하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오대리.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지후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이 남자에게도 사랑의 마법이 쓰이기 시작한다. 근데 그거, 지후가 오대리를 좋아한다는 거, 그 나이에 사랑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오대리에게 잘된 일일까?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을 했던 그 순간의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던 게 아니었냐고. 사랑을 하는 그 사람의 행복했던 얼굴이 자꾸만 보고 싶어서 사랑 그 자체가 아닌 사랑하는 그 시간을 사랑했던 것을 그 사람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사랑을 하던 그 시간을 사랑했던 것이라 해도, 그건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건가? 정말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 모습을 사랑하던 시간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그 마음이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해 보게 되더라. 지난 시간의 내가 했던 그것들을 자신 있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사랑이 아니라면 내 기억 속에서 그 시간들은 무엇으로 저장되어 있는 건지 다시 한번 꺼내어 봐야겠다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이 여자 신지후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지후의 사랑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이 여자 신지후, 밀당도 못한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바로 표가 나는 여자. 그래서 더더욱 오대리를 좋아하는 그 마음도 숨겨지지가 않는다. 아니다, 지후만 그런 거 아닌 거 아냐? 그렇잖아, 누굴 좋아하는 사람은 표가 나잖아. 폭풍우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햇빛 쨍쨍한 맑은 날인 것과 같은 표정이잖아. 그래서 인정하기로 한다. 자신이 더 사랑해도, 자신의 너무 퍼주는 마음이어도 괜찮다고, 내 사랑은 그런 거니까 그대로 하기로 한다고.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순수함은 남아있는 그 모습이 더 설레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가지지 못할 마음이기도 한 것 같아서 더욱 지후의 사랑에 응원을 보내면서 읽어갔는지도 모른다. 지후의 사랑이 해피엔딩이어야만 세상에 사랑이 남아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한편의 로맨스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이다. 소설에 그림까지 더해져서 더욱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그저 소설에나 있는 이야기, 만화니까 그럴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지후와 오대리의 이야기는 사실 내가 보기에 많은 부분이 너무 현실적이라 ‘만화라서 그래.’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하는 누군가의 마음과 표정, 자꾸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 한밤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달려가는 이유가 되어주는 거. 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일들이다. 그렇게 지독한 사랑을 앓고 났어도, 사랑을 겁내하면서도, 또 다시 하는 게 사랑이다. 물론 그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도 있다. 여전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지만, 그 모양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것 또한 사랑일 테니까.

사랑과 이별, 그리고 다음 사랑의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하고 또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다른 사람과 복습하듯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 그 시간들이, 다시 그전과 같이 마음을 다해 누구를 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또 다른 사랑에 주춤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 순간을 넘어서야만 새로운 사랑에 한 걸음 나갈 준비가 된 것일 텐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두려움만 가지고 맴돌기다. 이 책 속의 임주임의 말처럼 말이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많은 순간들이 겁나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보내야 할 시간도, 장담하지 못할 사람의 마음도, 혹시 찾아올지 모를 이별을 미리 떠올리는 것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지워낼 수 없으니 사랑을 하면서 진행되었던 많은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미리 상영되고 있는 것이다. 예고편처럼 짤막한 영상이 아니라 엔딩크레딧까지 올라간 이미 끝난 영화처럼. 그래도 우리는, 다시 또 사랑을 하게 될 테지? 아마도…….

제목만 보고서는 이 책이 여자만을 위한 만화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읽으면서 이 이야기에서 들려주는 여자의 마음을 남자도 좀 들어주었으면 싶고, 남자의 마음을 여자도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내내 들었다. 더 이상 금성이나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처럼 서로를 표현하는 일 보다는 서로의 별에서 조금씩 섞여가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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