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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 한약방
서야 지음 / 가하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비가 오는 날, 엄마가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비 비린내가 난다." 하고. 비가 내릴 때 나는 냄새가 비린내로 표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받아들일 때 그 냄새는 비오는 날의 흙냄새가 아닐까 한다. 흐음~ 마른 흙이 내리는 빗방울에 막 젖어 들면서 나는 냄새. 그 모든 것이 '흙냄새' 라는 한 마디로 다 표현될까 싶지만 나는 그 냄새가 가끔은 좋다. 내리는 비는 싫어도 그 흙냄새를 맡고 싶어서 마당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가 있는 걸 보면. ^^
전주라는 지명, 어느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은, '삼거리 한약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한약방,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서 어른들과 말동무 하면서 침을 놓고 계실 것 같은 강원장 할아버지, 그리고 그 안을 종일 누비면서 놀이터 삼아 살고 있을 것 같은 늘뫼, 한약방과 이어진 쪽문 같은 것을 지나면 마당이 딸린 안채가 나올 것 같고, 마당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평상, 수돗가, 마당 한 구석에서 푸다닥거리면서 제 영역을 표시하고 있을 것 같은 닭들, 조용히 배춧잎을 씹어 먹고 있을 것 같은 토끼들, 하루 종일 구수한 냄새가 막 풍겨 나올 것만 같은 정지간.
이 책은 그렇다. 흙냄새가 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장소에만 어울리는 공간이고 사람들이다. 한약방도 늘뫼도, 그리고 그곳에 다시 채워지는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은 나이인데도 초등학생의 지적수준을 가진 지적장애인 늘뫼.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렇듯 강원장도 그렇다. 자신이 이 세상과 작별하면 늘뫼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깊은 고민. 늘 늘뫼 걱정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런 강원장의 또 다른 구원투수 편원장. 일 년에 한 번씩 강원장의 삼거리 한약방으로 진료 봉사를 오면서 늘 계획을 세운다. 늘뫼의 짝이라 생각되는 녀석들을 일부러 진료 봉사에 데리고 와서 삼거리 한약방에 떨어뜨려 놓고 갈 생각만 한다. 그동안 계속 그래왔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늘뫼와 짝지어주고 싶은 녀석을 데리고 왔다. 바로 이준 쌤. ^^ 차갑고 자상하지 않고 배려심도 없을 것 같은 이 남자의 진국의 모습을 어른들은 이미 보았나보다. 세상 물정 모르는 늘뫼와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이준쌤 훈훈한 이야기.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있다. 뭐랄까 로맨스이되, 가족드라마 같은. ^^ 늘뫼의 하루하루의 이야기가 천방지축 발랄함으로 보이지만 너무 안타깝고, 이준쌤의 그 마음은 돌덩이로 만들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산하고,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문명의 그 안하무인격 행동은 웃음과 차분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그리고 늘뫼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조연들이 아니라 다 주연들 같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사랑스럽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너무 구수하다. 어디선가 나물 무치는 구수한 참기름 냄새가 막 쏟아져 나오고 있고, 아삭 소리 내면서 풋고추 하나 된장에 찍어 먹는 것 같은 소리도 난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을 늘뫼가 보이는 듯도 하다. 아, 사랑스러워.
중요인물은 세 사람인데(늘뫼, 이준쌤, 문명), 난 오히려 문명의 이야기를 더 듣게 되어서 반갑더라. (은행나무에 걸린 장자 / 서야 / 은목의 가야금 스승으로 나왔던 인물 / 종손어르신의 연적이었던. ^^) 후반부에서 점을 치는 선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들 세 사람은 나무꾼을 놓고 선녀가 하늘로 데리고 올라갔던 세 아이의 운명 같은 관계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안심이 되었다면 이상한가?
도시의 번화가가 아닌, 시골이어서 가능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흙 밟고 서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세련된 표준어가 아닌 촌스러운 사투리여서 더 정겨운 이야기. 아~ 포근해. ^^
근데 우리 집 골목 앞에 30년 넘은 한약방이 있는데, 거긴 이런 냄새 안 나던데…….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