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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4년 8월
평점 :
빛줄기는 잠시 후 살롱 끝자락 벽에 닿더니 천천히 벽을 타고 올라갔다. 처음에는 빛줄기가 살롱에 들어서고 벽을 타고 오르려 할 때, 약간이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천장과 벽에서 무엇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거대한 것들이 천장과 벽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빛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향하면 마치 숨어 있던 알 수 없는 것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략)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내게 떨어진 것은 수천 갈래의 밝은 빛줄기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빛의 반사로 처음에는 시야를 잃었고 이내 주변은 온통 따뜻함으로 감싸졌다. 마치 엄마의 포근한 품속에 안긴 것처럼. (93~94페이지)
문장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장면을 그리게 되는 건 나뿐만은 아닐 테다. 건물의 부서진 부분으로 자연의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장면, 넓은 식탁의 한 곳을 비추다가 점점 방향을 옮기는 빛줄기, 모두가 모여 있는 살롱을 한 바퀴 돌듯 빛의 움직임이 끝나는 과정이, 마치 몰입해서 보던 연극의 막이 내리는 듯하다. 어디 더 근사한 표현이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지만, 나란 인간 감성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보다. 누군가는 그 빛을 보려고 일 년 동안 기다린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단순히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에 이해가 된다.
소설은 주인공이 파리의 한 저택을 구입하려고 하면서 시작된다. 돈이 없는 뤼미에르에게 유서 깊은 저택이 헐값으로 다가온다. 그 저택은 오래되었지만, 막상 보고 나니 뭔가 더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된다. 건축가인 그가 조금씩 손을 보면서 고치면 되겠지. 하지만 그 저택을 구입하기 위한 조건이 하나 있다. 스위스의 요양병원에 있는 집주인 피터를 만나러 와 달라는 것.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요양병원을 보고 또 한 번 반하게 된다. 중세 수도원이었던 곳이 요양병원으로 탈바꿈한 거다. 그것도 한쪽이 부서진 채로 나머지 부분을 요양병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니, 이곳도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도 잠시, 이 요양병원에서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건물 탐사는 계속되고, 그때마다 이 건물에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펼쳐진다. 건물을 어떻게 이렇게 지을 수 있지? 매번 보면서도 감탄하고, 뭔가 하나씩 감춰진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뤼미에르는 이 비밀이 단순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온 그에게 피터는 저택을 양도한다. 그렇게 다시 수수께끼 풀기는 파리로 이어져 왔고, 스위스의 중세 수도원이었던 요양병원과 파리의 저택에서 찾아낸 비밀은 한 사람의 역사이자, 한 가족의 모든 기억이었으며, 사랑이었다.
건축가인 저자의 이력 때문인지 몰라도, 이 소설의 배경과 모든 구성이 건축물과 연관되어 있다. 처음 소개 글만 봤을 때는 어떤 신비로운 건축물 하나를 파헤치는 정도로 여겼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파리의 저택과 스위스의 중세 수도원, 시간은 현재와 1920년대를 교차하며 과거를 추적하고 기억을 불러온다. 그 중심에 건축가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추리와 일반인이 상상만으로 그릴 수 없는 묘사가 가득하다. 거기에 비밀의 도서관, 두 권의 일기, 열어야 할 곳의 열쇠들까지 미스터리한 수수께끼는 계속 이어졌다. 천장, 벽, 깨진 유리 등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를 그리느라 더디 읽히기도 했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빛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특이하긴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소설의 대부분은 건축물의 묘사로 진행되었고, 상상만으로 그 장면 그대로를 온전히 그리면서 읽기에는 어려웠다. 내 머리로는 무슨 복잡한 도면을 그리면서 읽어야 할 정도였는데, 그것도 초반 부분 읽으면서 잠깐 끼적이다가 말았다. 그냥 흐름을 타듯 읽어갔다. 이 건물의 이런 공간, 주인공이 건축의 전공을 발휘해 찾아내는 수수께끼의 정답을 같이 확인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드러나는 과거의 비밀, 직접 전하지 못해서 쌓인 오해들, 누군가의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복원된 집, 그 안에 가득한 사랑을 발견하는 재미가 더 컸다. 진짜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한 가족의 사연으로 느끼게 했다. 그렇지. 집이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것, 그 안에 같이 머무는 사람들과의 교감까지, 무엇 하나 빼놓고서는 집의 의미를 말할 수 없으리라.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것도 결국은 이 메시지일 거로 여겨지나,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좀 어렵다거나 재미가 덜 하다고 해야 할까. ‘쏟아지는 찬사’만 믿고 보기에는 좀 아쉽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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