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돌아가시기 석 달 전부터 계속 말했어. 죽음의 문턱에서도 내 손을 잡고 말이야. 두 손으로 꼭 잡았다고, 꽉 말이지. 마지막 힘을 쥐어짠 거야. 쉰 목소리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묘에 넣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하고 말이지.” (파묘 대소동, 51페이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우리 엄마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신 건가? 평소에 절대 아버지와 같은 무덤에 넣지 말라고 엄마가 그렇게 간곡히 말씀하셨는데, 우리 엄마와 같은 바람을 외치는 사람이 이 소설 속에 있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가다.
가키야 미우의 출간작을 꾸준히 읽어왔다. 그동안 만났던 작품도 마음에 쏙쏙 들어왔는데, 이번 신간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고 싶은 딸과 어머니가 왜 그런 유언을 남기셨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들과 그 가운데서 현명하게 판단하여 파묘를 언급하는 며느리. 그 과정에서 결혼을 앞두고 성별 결정 때문에 파혼한 여성, 아버지의 조상 묘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의무감을 외치는 남성, 약혼자가 이어받고자 하는 조상 묘 관리의 어려움에 겁을 내는 여성, 그래도 역시 아내의 성을 따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남성, 조상의 묘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노후 준비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성, 그런 남편의 생각에 파묘를 답으로 내놓는 여성 등 묫자리를 둘러싸고 많은 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각자의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이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이 소설의 인물들 대부분은 연령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주입하듯 배워왔던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테다.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는 의미는 묫자리를 잘 돌보고 계속 관리하면서 이어가야 하고, 그 정성을 자식의 자식에게까지도 이어지게 하는 어떤 의무감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 의무감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건 변해가는 세상이었다. 나부터도 할아버지의 묘지에 가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선산은 가까운 곳에 있다지만 그곳도 가본 적이 없고, 할아버지는 현충원에 계시니 그것도 멀어서 안 간다. 이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사촌 오빠도 선산에는 안 가는 걸로 안다. 선산에서 가까이 사시는 작은어머니가 한 번씩 관리하신다는데, 그것도 힘들다고 이제 안 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 그곳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한 번씩 정리해 주거나, 아니면 폐허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지.
단순히 묫자리를 관리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소설에서 말하듯 줄어드는 인구, 묫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공감하기 어려운 세대와의 소통, 아들에게만 지우는 대를 잇는다는 무게감, 딸이 모시고 싶어도 성별 결정의 문제까지 생기고 있으니, 이게 무슨 전쟁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작가는 묫자리 유지하는 일을 두고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언급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금 더 현명하게 조상을 기리고 지금 세대가 부담을 덜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은 나와 생각이 비슷하게 파묘를 외치는 사쓰키인 것 같지만. ^^
작가는 비단 이 소설에서 묫자리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사건의 발단은 남편과 같은 묫자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아내의 외침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작들에서 이와 비슷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인 문화를 여러 번 언급하기도 했다.
『이제 이혼합니다』에서는 50대 주부의 이혼 성공기를 다뤘다. 살림과 육아에 집중하느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남편은 아내의 역할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시부모를 돌보고,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아내가 단지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일을 한다고 여기는 걸까. 친구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부러워해야 할 만큼 지쳐있는 여성이 이제 이혼을 외친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무슨 이혼이냐면서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는데, 이제 그녀의 인생은 또 다른 시작점을 맞이해야 한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대도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남성 중심적인 편견이 머문 세상에서 주인공이 찾아갈 자유와 새로운 삶이 기대되게 하는 이야기다. 행복의 주인공은 내가 이뤄낸 가족이나 그들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야 만족스러운 행복이라는 메시지가 강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응축시켜 보여준 『시어머니 유품정리』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이야기다. 정작 시어머니의 자식인 남편이 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며느리가 하게 된다. 바쁘고 시간도 없는데 굳이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나 싶지만, 역시 누군가에게 맡기자면 돈이 든다. 그 돈을 절약하고자 직접 나선 며느리가 여전히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시어머니가 남겨놓은 물건들을 보면서 시어머니가 살아온 시간을 유추하게 된다. 어떤 물건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알게 되고, 내가 아는 시어머니와 그들이 기억하는 시어머니가 너무 달라서 당황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짐만 되는 쓸데없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에 도움이 되는 물건으로 변하기도 한다. 글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를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집 정리를 상상하느라 숨이 턱턱 막히곤 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그분들의 시간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죽은 후 남겨진 물건들로 그 사람의 삶을 읽게 되는 시간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직접 확인한 일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시어머니의 방에 있던 수많은 유품은 시어머니의 인생을 응축시켜 보여주었다. (시어머니 유품정리, 392페이지)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저절로 생각되는 ‘만약’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후회병동』은, 이상하게 나이를 한 살 더 먹어갈수록 떠올리게 되는 소설이다. 연명 치료를 거부한 말기 암 환자 4명이 그들의 후회를 곱씹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마음을 잘 못 읽는 의사가 이러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게 뭔가 어색한 설정 같지만, 오히려 이 설정은 두 사람(의사와 환자)을 더 가깝고 애틋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주운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니 환자의 마음이 들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후회되는 일들이 계속 떠오르는 환자의 힘든 마음을 듣게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사정을 알게 된다. 꿈, 가족, 결혼, 우정 등 살아가는 동안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어서 더 공감하게 되는 시간이다. 뭔가 간절히 바라지만 다 가능하지 않고, 지나고 보니 자꾸만 그때가 후회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게 답인 걸까. 소설 속 어느 환자의 말처럼, 누구나 죽게 되어 있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 딱 그 정도가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러면 되는 걸까? 너무 과하지도 않게 모자라지도 않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게 딱 좋은데, 왜 매번 그걸 잊으면서 후회를 반복하는지.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것만이 우리가 아는 인생의 답인 건지...
"선생님,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세요. 누구나 죽게 되어 있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정도가 딱 좋지 않나 싶어요." (후회병동, 210페이지)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문제로 이제 70세가 되면 사망해야 한다는 법이 가결되었다는 『70세 사망법안, 가결』은 소개 글만 보면 무섭지만, 그 속내를 들어보면 우리가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가 바로 보인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인, 노동의 인구는 적어지고 고령화는 빨라진다. 노령의 사람을 돌볼 국가 정책이 시행되면서도 세금 문제는 해결이 잘 안된다. 국민이 세금을 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이 노령의 인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국가는 결정한다. 이제 모든 사람이 70세가 되면 사망해야 한다고.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해결 방법이 다를 뿐이지 우리에게도 직면한 문제다. 일할 수 있는 인구는 줄어들고 고령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누구나 늙는다. 나이 듦을 거부할 수도 없다. 누구나 아플 수도 있고, 일하고 싶지만 일할 수 없는 신체를 가지고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 청년 실업자가 될 수도 있고, 경제적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경제활동을 못 하게 된다거나 고령화 시대에 살아가는 게 비단 나이 든 사람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거다. 소설에서 제시하는 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목소리만 높일 게 아니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서로의 상황, 우리를 둘러싼 현재의 모습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거다. 완벽한 답은 아니어도, 조금씩 완전해지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가 같이 나아가는 미래를 그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신과 나, 젊음과 늙음이 공존하는 방법을 꾸준히 찾아야 하는 일, 그게 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이라는 고민이 남았다.
이보다 더 많은 가키야 미우의 작품이 있는데, 지금 찾아보니 절판된 작품도 몇몇 보인다. 다양한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도저히 현실에서 동떨어진 문제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거다. 지금, 오늘을 살아가면서 몇 번씩 부딪히는 모든 문제가 작가의 소설 속에 다 있더라. 그래서 더 잘 읽히는 듯하다. 우리 집 이야기, 어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앞집 아줌마가 하소연하는 소리, 매일 뉴스에서 접하는 이야기 등 우리 사는 세상에서 매일 듣는 이야기가 이 안에 있었다. 우리나라 출간일 기준으로 보니 보통 1년에 한 권씩 나오는 거 같은데,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고,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서 읽게 된다. 때로는 어떤 답을 얻기도 하고,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했던 일을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한다.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많은 일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인지, 조금 더 엄숙하게 읽게 되는 부분도 있다. 앞으로도 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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