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위에는 시보다 푹 빠져 읽을 추리소설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그래서 추리소설 몇 권 옆에 쌓아두고 있었는데, 안 읽힌다.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시간이 생겼는데, 너무 더워서 숨쉬기 힘들어서 못 읽었다고 또 다른 핑계를 대고 있다. 거기에, 마음이 너무 바쁘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서 답답하고, 생각이 많아지니 또 머리가 아프다. 처리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적어두고, 정리된 것들의 목록을 지워나가고 있다. 그래도 아직 한참의 목록이 남아 있다. 시간을 쪼개고 동선을 정하며 순서를 정하는 방식으로, 노트 한 페이지가 가득 찼다. 이번 주가 아니면 또 몇 달이 미뤄질 것 같아서 더위에 졸리기까지 하는 몸을 움직이려니 힘이 든다. 그러니 추리소설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읽을 것도 아니었는데, 오늘은 정말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김경민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시를 몰라도 저자가 들려주는 시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기에, 이번 책을 펼쳐 들면서 단 한 가지를 생각했다. 과하고 넘치게 내게 무언가 주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 저자가 전하는 이별과 상실의 시간에 시가 어떤 상처 치유제가 되었는지 듣고 있자면, 시의 구절에서 장면을 만들게 된다. 이런 상황 이런 마음, 누군가의 감정을 들으면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그려본다. 이렇게 사랑하고 이별했구나, 이 상처는 또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 상상한다. 어쩌면 너무 잘 알 것 같은 마음. ^^ 나는 몰랐던 방식의 상처 회복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지나가는 일이라고 말하면 너무 매정하게 들리려나? 그저 인생에서 한번 지나가는 과정으로 여기고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토닥임을 전하고 싶어진다.
찔레 – 문정희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아주 슬펐겠다. 사랑하는 동안 우는 날이 많았었다니, 그런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었을까 잠깐 걱정했다. 그 슬픔마저 놓기 싫어서 사랑한다고 붙잡고 있었으려나. 말을 잃어가면서도 붙잡고 있던 그 마음은 슬픔이 아니라, 아닌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었으려나. 어느 시절을 떠올려 보니, 끝이 좋았던 이별은 없었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소멸하고,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보이고, 내가 주는 것과 받아야 할 것을 계산하느라 바빴던 날들이 채워지면서,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답을 얻곤 했다. 헤어짐의 이유가 한 가지만은 아니었기에 한 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배려하고 양보했던 것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점점 생기더라.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고 많이 어렸다는 생각도 드는데, 오늘도 옆지기와 싸운 이유를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유치하고 이 나이에도 어리기만 한 건가 싶다. 아직도 마음이 한참 자라야만 하는 건가.
이 더위에 만나는 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이에 겪을 많은 이별은, 이성과 사랑이 끝난 후의 감정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 소원해진 관계의 정리로 만남이 끊어지는 일이 더 많았다. 최근에 세 명의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죽음,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부고장,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기다리는 이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렇게 또 죽음으로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이 뭔지, 한마디로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준비하는 이별이 죽음만은 아니겠지만, 그때마다 겪게 될 슬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걱정스럽다. 아는 방법 모르는 방법 다 동원해도 쉽지 않을 일이다. 상실과 상처의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많겠지만, 시 한 편의 필요성을 저자가 말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어쩌면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면, 위로와 상처의 극복에 자존감 회복까지 생각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눈물을 그치게 할 수는 없지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게 시’라는 것을 믿게 하는 책이다. 적어도 오늘 내가 느낀 우울함,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 해결되지 않을 일을 가득 담은 머릿속을 잠시나마 털어낼 수는 있었으니까.
문자메시지 – 이문재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혼자 남는 일은 무섭고 힘들겠지만, 저자는 누군가와 나누는 온기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채워질 한 구절을 선물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전한다. 50편의 시와 그 시를 읽으며 전하고 싶은 말로 가득 채웠다. 그 시의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를 잘 몰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게 한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깊이와 격을 갖춘 작품들로 마음을 나눈다. 200편의 시가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는 말처럼,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를 고르는 일에 공을 들였다는 거겠지. 저자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오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 기뻤다. 차분해지기도 하고, 한참 멍때리며 생각하기도 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면, 하나씩 다시 생각하다 보니 차근차근 순서가 정해지기도 했다. 한 박자 쉬고, 할 발짝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 보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닌데, 마음이 급하니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에 바빴다. 그래서 놓친 것들, 무리하게 마음먹은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이제 하나씩 다시 정리하다 보면 그때 보이는 것들을 더 깊게 들여다보려고 한다.
뜨거운 날씨에 기분까지 바닥을 치니 괜한 우울감이 하늘을 찔렀다. 굳이 오늘이 아니라 언제 읽어도 상관없을 책이었는데, 오늘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에 입소문이 좋은 음식점이 있었다. 점심 장사만 하는 곳이라, 옆지기와 함께 오늘 꼭 먹기로 해서 집을 나섰다. 집 근처라 별생각 없이 입은 그대로, 슬리퍼 끌고, 부스스한 머리 질끈 묶은 차림새로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가고 얼마 후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고, 그 많은 손님 중에 이상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고개를 돌려서 보니 학교 다니는 4년 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기(동기였지만, 나보다 두 살 많은)였다. 근처에서 가게를 하는지 직원들과 함께 와서 점심을 먹는 듯했다. 달라진 외모에 얼굴은 한참을 봐야 했지만, 좀 특이했던 목소리를 내 귀가 바로 기억했다.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의 근황을 물을 사이인가 잠깐 생각하다가, 서둘러서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집으로 오면서 계속 생각이 났다. 나는 왜 그 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을까. 집 근처라고 너무 편한 차림인 게 부끄러워서? 지금 나의 상황이 보잘것없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매사에 당당한 그 사람의 태도 때문에? 뭐지? 복잡한 마음이 오후 내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국, 벼르고 벼르다가 먹은 음식이 체하고 말았기에 소화제가 필요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들이 천천히 내 위장을 타고 내려가는 중이다. 다행이다.
발견 8 – 황선하
2층은 너무 낮고, 4층과 5층은 너무 높고, 3층이 투신 자살 하기에는 꼭 알맞은 높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마냥 즐겁게 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곤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2층은 너무 가깝고, 4층과 5층은 너무 멀고, 3층이 세상 구경하기에는 꼭 알맞은 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일,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아마도 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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