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책에 관한 어떤 시험을 봤는데, 모두 주관식이었다. 이미 수업 들은 교재에서 그대로 나오는 형식이라 미친 듯이 외워서 쓰면 되는 거였다. 말이 쉽지, ‘~서술하시오.’라고 하는 문제에 답을 쓰기가 쉬울 리 없다. 그런데 더 어려웠던 건 마지막 문제였다. 내 인생의 책 한 권을 소개하라는 거였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 질문이 가장 어렵더라. 책이라는 게 취향이 있어서 각자 좋아하는 최고의 책이 다를 거고, 또 하찮고 가볍게 들려도 어느 순간에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게 책이라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누구에게 함부로 소개해 줄 만한 책이 없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을만한 것도 없다. 그냥 그때 이 책이 참 좋았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느끼곤 했다.
이번에 이 이벤트 보면서도 한참을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선뜻 떠오르는 책이 없어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장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이 각자 담은 내용도 다르고,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에 이런 책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이 책들을 읽으면서 했던 것 같다. 세상에 필요한 책이라니, 이 정도면 이 책들의 존재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미 비포 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서 더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루와 윌의 로맨스에 설레게 되는, 그냥 로맨스 소설로 여길 수도 있다. 나 역시 그 설렘을 잔뜩 느끼면서 이 소설의 가독성에 감탄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윌이 루에게 전하는 인생의 소중함이었다. 자신이 죽을 때를 정해놓고, 자기를 돌봐주러 온 여자에게 남겨준 건 삶의 가치, 자기 인생을 발전시켜 나가는 기회였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당당함, 노랑 줄무늬 스타킹은 그냥 신으면 되는 거라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생각하고 꺼내라는 말이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시골 마을에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며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바꿔놓은 남자. 윌 역시 자기 삶을 자기가 정하면서 떠났지만, 루에게 자기 삶을 완성해 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단순히 재미만 장착한 소설은 아니었다.
<원숭이의 손>
화이트 씨 가족에게 찾아온 모리스 상사는 ‘원숭이의 손’을 꺼내놓는다. 소원 세 개를 빌 수 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보였나 보다. 하지만 그냥 소원만 빌 수 있는 건 아니다. 위험하다. 분명 원숭이의 손을 들고 소원을 빌면 이뤄지지만,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얻은 것만큼, 아니 얻은 것보다 더 크게 잃게 되는 게 이 원숭이의 손 법칙이었나 보다. 소원은 소원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쓰디쓴 인생의 교훈만 남겼을 뿐이다. 분량이 짧은 소설이라 가볍게 보면 오산이다. 이 소설에 담긴 메시지는 누가 봐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메시지가 우리 인생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걸 잊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을 읽고 나서 후회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끝이 없는 호기심에 또 다가서는 게 인간이라는 이 아이러니는 뭔지...
<개의 심장>
인간의 뇌와 고환을 개의 몸에 이식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소설의 주인공 필리쁘 필리뽀비치 교수는 그의 숙원이었던 이 연구를 실행한다. 수술을 성공시키고 수술의 예후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과연, 이 수술은 성공적이기만 했을까? 인간의 뇌와 고환을 이식받은 개는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다. 인간의 이름도 얻는다. 두 다리로 서고, 인간의 옷을 입고, 걷는다. 하지만 개로 살았던 본성은 변하지 못했다. 예절도 없고,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보고, 여성을 희롱한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이 떠돌이 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거다. 1920년대 러시아 사회가 배경이 되어, 인간이 된 개의 모습으로 이 혼란을 정리하려는 필리쁘 필리뽀비치 교수의 마지막 시도가 인상적이다. 잘못된 것을 되돌려 놓으려 애썼지만, 아무 일도 없던 처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상처 자국만 더 선명해지고 늘어났을 뿐이다.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시도하는 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다. 재미도 있었지만, 개의 변해가는 모습과 태도가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다.
<제가 한번 해 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책으로 만났다.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같이 경험하는 내용이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내가 잘 알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던 순간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 우리 삶에 너무 닿아있는 모습을 담아냈기에 더 귀한 책이었다. 세상의 정의를 외치면서 앞에 서지는 않아도,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는 않아야 하는 다짐을 더 하게 만든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이 그대로 담긴 책이다. 그의 경험에 더해진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매우 힘들어 보였던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우리 사회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힘듦을 공감하는 건 당연했다.
인생 책이라고 하면 어떤 책을 떠올려야 할지 항상 고민되는데, 그냥 그 순간 생각나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기억에, 마음에 남은 책이 아니라면 그렇게 떠오르지 않을 테니. 장르를 떠나서, 어떤 책이든 우리 인생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르침을 준다면 그게 최고의 책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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