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창창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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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계의 스타 작가 곽문영의 딸로 살아가는 일이, 썩 괜찮을 거로 보였다. 부족할 거 없는 현실의 풍요로움과 쓰기만 하면 중박 이상을 터트리는 엄마의 명성에 자식까지 저절로 뿌듯해질 것 같은데. 아니었나?


곽문영의 딸 곽용호는 용과 호랑이가 나왔다는 태몽처럼 이름이 지어졌다. 위풍당당, 어디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며 살아갈 거로 보였던 이름이었건만, 현실의 곽용호는 그저 스물아홉의 백수일 뿐이다. 삼수 끝에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매번 취업에 실패한 패배자로 살아가는 중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 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 그가 바로 곽용호다. 엄마의 유명세만큼이나 그 자신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채로 성장했다. 엄마에게 관심 받지 못하고 자라왔고, 그의 인생에 비치 비춰지는 순간은 엄마 곽문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뿐이라니. 어째 형제자매 사이의 비교도 힘들다고 여겼는데, 능력 있는 작가인 엄마와의 비교도 힘들 것 같긴 하다. 그래서일까,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다. 매번 다투고, 서로의 인생 참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던 어느 날. 새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엄마가 사라졌다.


이 사실에 당황스러운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 엄마의 수족인 오혜진이 곽용호에게 제안을 한다. 엄마의 새 드라마의 대본을 대신 써 달라는 것.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곽용호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여기까지 읽고 나면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 이제 엄마 대신 대본을 쓰는 곽용호는 엄마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를 완성한다. 그동안 엄마의 기세에 눌려 발하지 못한 그의 능력이 화산 터지듯 폭발하는 순간이다. 그럼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겠지. 사라진 엄마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드라마의 완성에 곽용호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 엄마 대신 유령 작가로 드라마를 쓴 곽용호의 인생은 이제 날아오를까? 사실 어릴 적 곽용호의 꿈은 작가였다. 자꾸만 엄마의 재주에 비교하다 보니 그의 재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그런 꿈마저 사라지니, 저절로 존재감 없는 인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 엄마 대신 대본을 쓰고 있는 지금 그의 재능은 어떻게 평가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마치 숨겨졌던 어떤 길을 여는 기분이다. 문제는, 곽용호가 엄마의 대본을 대신 쓰는 이 문제를 해결해도 문제, 해결 못 해도 문제라는 거다.


엄마 대신 드라마 쓰기에 한창 빠져있을 무렵, 잊고 있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집중해서 글을 쓸 때는 생각나지도 않았던 엄마의 부재. 엄마를 찾아야 했다. 곽용호가 엄마를 찾기로 결심하고, 같이 글을 쓰던 함장현과 배우 주민호까지 함께 엄마를 찾아 나선 여정은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궉산의 광혜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고 암자 같지도 않게 흉흉한 외관, 수상한 관리인 스님까지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다. 이곳에 엄마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단서로 곽용호 일행 역시 이곳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는 치매, 상당히 오랜 시간 죄책감이 쌓이면서 기억을 잃어버린단다. 실제로 이런 치매가 있는지 소설 속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는다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죄책감이 쌓여 기억을 잃는다는 게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얼마나 미안한 게 많았으면, 얼마나 그 마음 끌어안고 살아왔으면 이렇게 기억을 잃게 되는 걸까. 더군다나 그런 이유로 기억을 잃은 이들은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마음만 남아 있다고 한다. 밥을 먹이고 씻기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가만히 앉은 채로 살아갈 수 없게 누군가의 한마디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더 아픈 건, 그들 자신을 돌보는 법을 잊었다는 거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그들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일이라면, 자신을 돌보는 법을 가장 먼저 잊고야 말았다. 스스로 먹고 씻고 하는 것조차 잊은 채로 살아간다. 처음 곽용호가 아파트 현관 문 앞에 쌓여 썩어 가는 배달 음식을 보고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일하느라 바빠서 음식 배달 시킨 것도 깜빡할 정도로 엄마가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단정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 혼자 곽용호를 키우면서, 자식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만 하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왔다고 보였을 지라도, 곽문영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그 죄책감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병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곽문영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광혜암에 모여든 사람들의 병이 왜 시작되었는지 추측하게 된다. 해주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없고,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인생이었고, 아이 키우며 살아가기 위해 죽을 것처럼 일했고 성공도 했는데, 그렇게 살아오고 보니 남은 건 혼자 자라듯 성장한 딸에게 미안함과 죄책감 뿐이었다는, 그런 거 아닐까. 서른이 다 되도록 아무 색깔도 가지지 못한 채로 실패자로 살아온 곽용호의 인생을, 엄마인 자신이 만든 것 같아서.


결국, 이 모든 사건과 진실을 파헤치는 동안 곽용호와 그의 친구들이 마주한 것은 괜찮다는 말이었을 거다. 인생 왜 이렇게 꼬질꼬질한지, 그 창창했던 꿈은 어디에서 무너져 버렸는지, 성공하고 싶은 인생은 어쩌다 매번 실패만 하게 되는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계속 경험한 게 절망 뿐이었다면, 이제는 조금씩 나아가는 마음을 붙잡아준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광혜암의 그 많은 사람이 갖게 된 죄책감 말고, 괜찮다는 말로 그저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해준 시간이었다. 곽용호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아가는 많은 이가 똑같이 겪는 불안정한 경험 속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괜찮다고 말한다. 기억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미친 듯이 써 대면서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을 산 대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 앞장서고, 다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던 누군가의 마음이 그대로 읽힌다. 그저 그 시간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현실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설령 이 인생의 엔딩이 또 다른 패배자의 기록으로 남는다고 해도, 그저 나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뭐가 하나 부족해도, 가야지.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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