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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 ㅣ 자기만의 방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2월
평점 :
시험을 볼 게 있어서 공부하는데, 직업으로 보지 않는 활동을 쓰라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 자체가 낯설었는데, 어쨌든 외워야 하니까 살펴보다가 발견한 답 중의 하나는, ‘자기 집의 가사 활동에 전념하는 경우’였다. 우리가 흔하게 ‘주부’라고 표현했던 내용을 풀어쓰면 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게 직업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개인정보 입력 중에 뜨는 신분 항목에서 여전히 보이는 ‘주부’는 무엇일까. 궁둥이 한번 붙일 사이도 없이 집안에서 종종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그 존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집안에서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비중이 큰데, 보이는 것과 다르게 작게 설명되는 사람은 어디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때는 그랬다, 고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우리 엄마들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산 같았다. 이 책에 담긴 여성의 인생은 평생 쉬지 않고 일해왔던 시간 그 자체였다. 형편이 어려우니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게 당연시됐고, 등 떠밀리듯 결혼하기도 했다. 아이 낳고 산후조리할 시간도 없이 논으로 밭으로 나갔다. 안에서는 가족들 식사 준비부터 아이들 돌보며 키우는 일까지, 누군가는 병에 걸린 시부모를 돌보는 것도 해내야 했다. 똑같이 밖에서 일하는데도 아내의 일, 직업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도 많았다. 그래, 여기서 또 한 번 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믿었던(?) 시대였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 여성들의 노동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탄광에서 일하던 남편이 죽자 남편이 일하던 곳으로 들어가 탄을 골라내는 선탄공으로 일하고 있는 여성, 남대문시장에서 밥을 파는 여성, 농사를 지으며 뒤늦게 한글을 배우며 자기 이름을 쓰는 여성.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이들의 삶이 아니었나? 남편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는 가정 안에서, 같은 일을 해도 남성보다 적은 급여를 받았던 사회에서 그 삶을 버티고 견뎌온 여성의 이야기에 울다가도, 그 시간을 도망가지(?) 않았던 언니들의 전투력에 많이 놀랐다. ‘집사람’이라 불리며 그 집안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평생 일하고도 모자라 이제는 손자 돌봄까지 하는 노동의 세월을 읽는다. 도시의 삶이 여성의 존재를 높여주지 못했을 텐데, 농촌의 삶을 오죽했을까. 장소는 달라도 인생은 다르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끊임없이 일하는 인생이었는데, 그 시간을 증명하고 나를 소개할 명함이 없다는 게, 뭔가 좀, 아니 많이 서운할 것 같다. 열심히 싸워온 언니들의 시간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다고 모를 우리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옆에서 많이 지켜봐 왔고, 어쩌면 이 시각에도 이 언니들과 같은 시간을 쌓고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언니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어렸을 적에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느 위인전에 나올만한 인물을 적어내곤 했다. 훌륭하다고 하도 들어와서, 그들의 업적을 배우면서 자라왔기에 당연히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라고 들었기에, 그 이름을 적었다. 어른이 된 후에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적었다.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본 엄마의 인생은 존경하지 않고서는 기억할 수 없을 시간이었다. 이 책 속의 언니들처럼, 우리 엄마의 시간도 다르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닭을 튀겼고, 쫄면을 삶았고, 반찬을 만들어 팔았다. 늦은 밤에 자다가 일어나 콩나물에 물을 주었고, 냄새나는 똥을 치우며 닭을 키웠다. 또 뭐가 더 있을까. 내 기억 속 엄마는 집에서 밖에서 일하고, 늦은 저녁 지친 몸을 뉘며 일일 드라마를 보는 낙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래, 여기서 또 한 번, 그때는 그랬다. 그런 일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얼마를 벌든지, 그게 누구라도, 열심히 사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 속에, 우리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엄마가, 대한민국의 많은 여성이 있다.
이 언니들의 삶은 귀하고 아름답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이 여성의 존재나 노동이 인정받지 못했던 때라고 해도, 이들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삶이라고 해서 허투루 살아오지도 않았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흔한 명함 한 장이 없어도, 얼마나 큰일을 해내는 존재로 살아왔는지, 언니들이 알고, 이제는 우리가 안다. 지금도 옆집 아줌마는 우리 엄마의 이름을 큰언니 이름으로 대신 부르지만, 이제는 병원이나 가야 엄마의 이름이 정확히 불리고 있지만, 누구도 이름을 잃고 살아왔던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일하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 삶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내려놓고 싶지만 포기하거나 도망가지도 않았다. 자기 일에서, 삶에서 가치를 느끼며 자기 존재감 ‘뿜뿜’하는 힘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살아보니 인생 그렇게 길지 않다고, 재밌게 살고 힘들게 살지 말라는 조언(!)에, 혹시 지금 어디선가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거나, 찾지 못한 답으로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이 언니들의 화끈한 인생 이야기에 기운 받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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