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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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네 눈 정말 예쁘다.”

갈비뼈 안에서 심장이 세차게 뛰고, 내 손은 마치 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울퉁불퉁한 그의 손등을 어루만진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지금 나는 코리 필즈를 만지고 있다. 그 코리 필즈를……. (38페이지)


솔깃하지 않은가? 내가 바라보던 우상이 나에게 칭찬을 해준다. 눈이 예쁘다, 목소리가 좋다, 노래를 잘한다. 그냥 칭찬이 아니다. 노래하고 싶어 오디션에 참가한 현장에서, 우연처럼 만난 우상이 나의 노래를 칭찬하고, 내가 가수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게 꿈인가 싶어서 뛰는 가슴을 단속하지만, 잘 안 된다. 그는 코리 필즈니까. 지금 최고의 가수이자 모두가 만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이고, 이 분야에서 그의 손길을 받는다면 영원히 노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열일곱 소녀 인챈티드는 노래하는 게 꿈이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이 꿈이 쉽게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백인 다수의 고등학교에 다니지만, 그녀의 가족은 흑인이고, 복장 규정에 머리카락을 밀어버린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 갭은 라틴계이기에, 사람들은 둘을 보고 수군거린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게 되는 일상에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노래하는 것이다. 그런 바람이 쉽게 이뤄지는 세상이었다면, 그녀에게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단속 대상에 올려지는 게 비일비재한 흑인이니까. 스스로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만 일상이 흘러가는 곳이었다.


소설은 노래하고 싶은 소녀 인챈티드가 우상 코리 필즈를 만나면서 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함을 경험하게 되는지,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흑인 소녀를 어떻게 성범죄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지 보여준다. 성인 남자가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어린 소녀를 가스라이팅한다. 심리적으로 조종하면서 성을 착취한다. 누군가의 간절함을 인질로 삼아 온갖 협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한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지. 그가 하는 짓은 명백한 범죄이고, 세상은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런 정의대로 세상이 흘러갔다면, 인챈티드와 다른 소녀들이 겪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코리 필즈의 범죄가 제대로 심판받았다면, 또 다른 인챈티드들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녹아들 수 있어요?”

좋아. 스튜디오의 규칙은 다음과 같아. 첫째,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도 몰라야 해. 이곳은 마법이 펼쳐지는 곳이고, 우리의 비밀을 누설해버려선 안 돼. 알겠어? 그러니 그 누구한테도, 네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그런 생각조차 유치해 보이는 데다 그는 이미 나를 이렇게나 신뢰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100페이지)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사건은, 실제 일본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와 닮았다. 오랜 세월 남자 아이돌을 키운 제이 팝의 제왕이 연예계 거물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 학대를 일삼으며 했던 말은, 아이돌로 키워주겠다는 유혹이었다. 피해자들의 걱정은 하나였을 거다.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하면 어쩌지? 그의 입김 하나로 연예계가 쥐락펴락하게 되는 것을 수도 없이 봤을 테니,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겠지.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왜 그가 그런 힘을 갖게 되었는지, 그 힘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면서 모른 척한 세상의 잘못이다.


인챈티드가 코리 필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가 음반을 내주겠다면서 인챈티드의 일상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눈에 선하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말하게 만드는 분위기,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경찰,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한 사람을 판단하고 우러러보는 시선들이 많은 코리 필즈를 만드는 거였다. 거기에 더해진 인종 차별은 이 사건이 이렇게 커지게 한 큰 이유가 된다. 경찰은, 세상은 흑인 여자가 한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책 속의 문장처럼, 인챈티드가 백인이었다면 코리 필즈가 진즉에 경찰에게 잡혀갔을 텐데. 이 문장만 봐도, 세상에서 흑인으로 차별받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껴진다. 여성이어서, 흑인이어서 차별받아야 할 이유인가? 범죄의 피해자이면서 침묵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느냔 말이지.


자기가 가진 돈과 권력으로 많은 미성년 소녀에게 성폭력을 일삼고, 그 아이들을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면서 자기만 의지하게 만들고, 세상의 시선이 어떤지 알기에 자꾸만 비밀을 만들게 교묘하게 착취하고 고립시킨다. 친밀함으로 다가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는 이 나쁜 인간(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에게 죄를 물을 수 없게 하는 세상의 이상한 방식이 답답하다. 이 또한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모양새일 테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말 그대로 괴물의 탄생은 서서히 스며들 듯 계속되어왔고, 그 괴물을 만든 게 우리 사는 사회였다는 게 충격적이다. 인챈티드가 당한 피해와 코리 필즈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도와주고 있어도 그녀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의 상처를 여러 곳에서 묵인했던 게 한순간 없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 코리 필즈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코리 필즈의 죽음에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사람들도 법도 해결해줄 수 없던 게, 가해자가 사라지니 해결된다. 웃음만 난다. 어느 순간, 우리가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며 비판하는 게 익숙해지기 전에, 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사회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가독성이 좋아서 빨려 들어가듯 읽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존재가 인간이라고 느끼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이 당연한 걸 간절히 바라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여전히 무섭다. 또 다른 인챈티드가 나오지 않으려면 우리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경고하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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