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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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튀지 말자. ‘보통혹은 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섞여서 살면 되겠지 싶었다. 딱히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것도 아니어서 일반적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한 적도 없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때그때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면 되는 거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비슷하게 살아가되 전혀 다른 방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우리, 그렇게 살아가도 되는 거 아니었나?


십 대 소녀 나쓰키는 스스로 포하피핀포보피아별에서 온 마법 소녀라고 생각한다. 나쓰키는 어쩌다가 이런 상상에 빠져들어 살아오게 되었을까. 단순하게 어린아이의 엉뚱한 상상이라고 여겼다.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등장하는 이 판타지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쓰키의 이야기가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한마디에 상처 입을 때마다 아이는 자책했다. 엄마에게 언어적 물리적 학대를 받는 이 아이가 도피처로 삼은 게 또 다른 세계였다. 유체 이탈 같은 방법으로, 이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쓰키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촌 유우다. 외계인이라고 여기며 돌아갈 순간을 바라던 유우는 나쓰키의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일 년에 한 번 백중날에 만나는 사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가까운 두 아이는 마지막으로 만난 백중날의 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쓰키에게 놓인 세상은 그저 인간 공장일 뿐이다.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서 자라야 했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공부를 잘 따라야 했다. 그래야만 착한 아이, 부모님의 기대에 맞게 잘 자라나는 아이, 보통의 삶을 누리는 아이로 남을 수 있었다. 나쓰키에게는 이 세상의 방식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여자의 자궁으로 새 생명을 번식하기 위한, 육체로 이어진 인간 공장이었다. 잘 키워진 나쓰키 같은 아이는 언젠가 이 공장의 생산품으로 출하될 거다. 이런 방식의 세상은 누가 만든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나쓰키는 이 방식에 반기를 든다. 자기를 이해하는 유일한 대상 유우에게 결혼하자고 말하며 자기 몸이 더러워지기 전에 그에게 닿고 싶어 한다. 육체적 폭력을 당해도 어른들은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육체적 행위에는 야단법석을 떤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쓰키는 도모오미와 결혼한 상태다. 나쓰키가 흘러온 시간만큼이나 정신적인 치유와 성장을 이뤄냈을까 궁금했는데,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흡수되어 잘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가 필요하고 원하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처럼 가게 된 아키시나의 산속 집에서 유우와 재회한다. 이제 이 세 사람, 나쓰키, 도모오미, 유우의 이상한 동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 이런 소설이 가능해? 믿을 수 없는 결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너무 조심스러워서, 이 소설이 흘러가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다. 아키시나의 산속 집에 머문 세 사람의 선택을 처음에는 막장 드라마의 삼각관계쯤으로 여겼다. 과거에 결혼했던 남자, 현재 결혼한 남자, 그 사이의 여자 한 명. 이 구도라면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예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주인공은 끝까지 평범함을 거부하고 이 세계의 인간 공장 폭발시키고자 한다. 공장의 부품으로 이용되는 여성의 자궁을 거부하며, 인간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규칙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폭파한다. 이들이 선택한 도주이자 자신의 삶이었다.


꼭 같은 방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반드시 살아남을 것. 이 약속을 지키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지구별 인간은 다른 모습의 삶을 용납하지 않았다. 점점 옥죄어오는 지구별 인간의 그림자를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이들이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더는 참지 않고 자기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고, 어른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아이를 이끌려고 착취하는 폭력에 대해 강렬한 결말로 보여준다. 이렇게나 다른데,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고?


문장 곳곳에 묻어 있는 소품의 등장이 귀여웠다. 요술봉과 변신 콤팩트, 고슴도치 인형, 마법을 불러오는 퓨트 같이 십 대 소녀의 주변에 충분히 있을 만한 이미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막상 이 존재들이 일으키는 마법(?)의 힘을 확인한 순간, 우리는 두려움에 빠진다. 굉장히 충격적이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서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의 폭발일 수도 있다. 인간은 파란 덩어리였고, 피는 금빛 액체로 흘러내리고, 세상은 온통 핑크색이고... 머릿속에 그려보는 이런 세상은 한번 즐겨볼 수 있는 판타지였지만, 막상 이 소설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은 공포였다. 언제부터 고정됐을지 모를 평범한 삶을 강요하는 일은 의미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고, 어떤 것도 똑같을 수 없다. 그저 각자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살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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