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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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고 두렵게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너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이게 뭔가 싶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이야기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펼쳐지면서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고 있는 걸까. 더우면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때의 느낌과 닮았다. 한낮의 더위에 등에 땀이 흐르는데도, 저녁의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해지는 기분.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양면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알 수 없지만 알 것 같고, 알 것 같아서 더 들여보게 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나는 조예은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더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고기와 석류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옥주는 쓰레기를 뒤지던 이상한 그림자를 발견한다. 분명 손으로 만져지는 존재였고, 그 아이는 무엇이든 먹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옥주의 마음은 외로움이었을까? 집안으로 들여 먹을 것을 주고 돌봤다. 그리고 그 아이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옥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혼자 지내면서 외롭게 죽기 싫었던 옥주의 상황을 알고 찾아온 것처럼, 아이의 등장은 묘했지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하게 고양이와 인간의 동거를 다룬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역시 우리가 혼자 남았을 때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했다. 사라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전단을 돌리고, 진심으로 그리워하던 순간에 사라진 고양이의 존재를 알게 됐다. 누구나 자기의 원래 자리가 있을 거고, 때로는 떠나고 돌아오기도 할 테지.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보내주기도 하는 게 관계의 한 모습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래서 SF를 읽는 건가 싶게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독자는 더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만난다. 릴리의 손은 언젠가 우리가 마주할지도 모를 미래 세계를 보여주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순간을 연결한다. 누구의 손인지 모를 인공 손이 주인공의 옆에 머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장면이 스쳐 가면서 어떤 목소리는 주인공을 부르기도 한다. 혼자여서 외로웠는데, 기억도 못 하는 시간의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리는 서로가 온 곳이 달라도 친해지고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대가 누구였더라도 관계가 만들어지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을 감당하고 견디면서 한 뼘 성장하는 인간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작은 신의 결말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먼지 바람이 인간 세상을 덮어버리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을 때, 누군가는 더 깊숙이 숨어들 계기가 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문밖의 세계와 단절하고 지낼 무렵 찾아온 한 사람. 누군지도 몰랐던 존재가 주인공의 외로운 틈을 파고든다. 이용하려는 사람과 그걸 알면서도 곁에 두려는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정을 팔아 올라가려는 사람과 방심하던 사이 훅 들어온 사람 모두 각자의 틈을 메우고 있다는 걸 알기는 했을까. 먼지 폭풍을 뚫고 달려나가던 그 용기에 달라졌을 무언가가 그려진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 한없이 무너지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숨어있기만 하는 건 더더욱 아닌 존재. 한번 문을 열고서 나간 사람이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오버인가. 그래도 어떻겠나. 이 소설의 결말을 본 내가 바라는 게 우리가 바라는 삶일지도 모르는걸.


문을 한번 열 때마다 시간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진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는 어느 시간을 통과해도 결말을 달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는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메리 블루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긴, 죽은 여자들을 대신해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하던 일은 계속됐다. 그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듯, 기꺼이 살인마가 되어 악인을 처단한다. 악몽을 뿌리며 배를 채우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나쁜 꿈과 함께역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렸을 적 가슴에 품었던 곰인형이 낡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성장한 것 같아도 완벽하지 않다. 불안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혼자가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외로움에서 파생한 감정은 사랑이 되고 함께가 된다. 외로움이 외로움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사람의 곁에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괴담으로 가득한 이야기라고, 판타지로 포장한 으스스한 차가움이 아닐까 싶었다. 잔인한 장면에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악인의 등장에서는 내가 처단하고 싶기도 했다. 혼자서 꼭꼭 숨듯 살아가는 이를 볼 때 슬퍼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소설은 마치 비극의 결말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듯,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적인 장면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사라진 기억 속에서 머물던 목소리, 달려나가서 친구를 구하는, 싫어했지만 삶의 방향이 같아서 미워할 수 없는 사촌, 사라진 아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는 시선을 보여준다. 혹시 어느 날 찾아온 외로움이 힘들거든, 악몽이 찾아와 밤이 괴롭거든, 함께였지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거든, 결코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보이지 않아도 당신 곁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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