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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일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7
김보현 지음 / 민음사 / 2022년 7월
평점 :
일하는 곳 주차장을 걷다가 발에 뭐가 걸려서 넘어졌다. 그날따라 반바지를 입었고, 넘어진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넘어진 게 창피해서 몰랐는데, 대충 치료를 하고 나니 점점 통증이 심해지더라. 아팠던 거다. 내 피부가 쓸리고 피를 흘리는 일은 아픈 거였다. 지금 무릎의 상처는 딱지가 되어 있다. 아픔보다는 가려움이 더 커진 상태. 처음에는 피부의 상처가 크게 보여서 속상했는데,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게 어디냐 싶어서 그때의 고통은 곧 잊히더라. 사는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고통보다 가벼울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3년 전, 정희는 아들을 잃었다. 2년 넘게 병원에 있던 아들은 더는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을 감당하며 죽어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그녀는 고스란히 경험했고, 3년이 지났음에도 아들이 잃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위태로웠고, 그나마 남편이 존재함으로써 견뎌내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정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른 여자를 향해 환히 웃으면서 달려가던 남편의 실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상한 일은 계속 일어난다. 정희는 남편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실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다려보라고 말한다. 협박하듯 걸려온 전화, 연락도 없이 계속 실종 상태인 남편, 처음 본 시누이의 남편이 찾아와 이제까지 몰랐던 진실을 꺼내놓는 등 그녀를 둘러싸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진다.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꼬리만 드러낸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녀가 나서야 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녀가 겪은 슬픔의 감각이 만들어낸 예민함으로 한발 한발 진실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정희와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이 철식이다. 외모부터 피폐해 보이는 그는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이다. 그는 같이 탈북한 아내 록혜와 한국에서 행복할 줄만 알았다. 목숨 걸고 탈출한 그들이 아니었던가. 북쪽의 일은 다 잊고 이곳에서 뿌리내리는 삶을 계획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내가 자살했다. 그는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다가 록혜가 한 남자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철식의 남은 생은 한 가지를 위해 존재했다. 아내를 죽게 한 남자를 찾아서 죽게 하는 것.
알 듯 모를 듯 이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인물이 영호였다. 정희의 시누이 지애의 남편으로, 결혼한 줄도 몰랐던 지애의 남편이라며 갑자기 찾아온 그는 혼란스러워하던 정희를 더 세게 흔들고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정희 앞에 나타난 것이며, 그의 아내가 사라진 것을 왜 정희에게 말하고 은근한 협박 같은 말을 쏟아놓고 갔는가. 더 이상한 건 아내가 연락이 안 된다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거. 그가 성훈의 실종과 지애의 연락 두절 사이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양한 인물의 등장으로 처음에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애쓰며 읽었다. 아이를 잃고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여자가 살아가는 모습에 빠져 있다가, 강인하면서도 나약해 보이는 남자의 분노에 두려워하다가, 너무 신사다운 모습으로 사라진 아내를 찾는 순한 남편의 태도에 안쓰럽다가도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몰라서 궁금했다. 정희의 눈앞에서 사라진 성훈은 어디에 있는지, 왜 사라진 건지, 그의 실종이 이 소설의 과정을 어떻게 장식할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는데, 인물 각자가 가진 오늘의 무게가 버거워 보여서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영업하는 사람이 팔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엇이든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거다. 돈과 목숨을 맞바꾸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이거 현실에 너무 진하게 물들어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도 사고팔 수 있다는 게 상상이 아니었다. 결말을 확인하면서 점점 나 자신에게 묻는 횟수가 늘어간다. 나는 어떤 상품일까. 얼마나 잘 팔릴까. 얼마에 팔릴 수 있을까. 아니, 내 삶이 나를 팔아야 할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묻고 있었다.
그녀는 희망이 없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상황이 어떤 식으로 치달아 갈지 역시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가슴이 조여 왔다. 정희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조용히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이것은 끝이 아니며 가장 나쁜 일도 아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206~207페이지)
내용을 다 소개하자니 이 책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한 사람을 의심하다가 보면 진실은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사람을 추적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여기에서도 진실은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닥칠 때마다 누군가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전율이 흐른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의 무너지지 않음이 이 소설의 희망이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것 같은 고통에 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하는, 어쨌든 찾아야 할 진실이 있다는 이유로 맨발로 뛰어야 했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숫자를 세면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이 가장 최악 같아도, 가장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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