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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평점 :
아, 역시 안 변했어. ㅎㅎ 저자의 작품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 재미있는 건 알았지만 그 세세함은 기억나지 않았고, 얼핏 작품의 분위기만 생각나던 터에 만난 작품이다. 평소 방송에서 보던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가 문장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러니까 문장으로 보는 방송 화면 속의 곽재식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작가이기도 하면서 교수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수업을 듣는 재미도 상당할 것 같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운 과학 수업을 이런 강의로 듣는다면 졸림에 눈 비비는 학생은 없지 않을까. ^^
헌혈하고 받은 빵이 이상하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은 지구의 인간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알게 된 묘한 현상 하나로 시작되었다. 내 피를 뽑아내어서 누군가의 몸으로 들어가는 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그 피를 뽑을 때는 누구에게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선뜻 내 몸에서 뽑히는 피를 지켜보는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인간이 아닌 이가 지켜보는 지구인의 행동은 의아했지만, 이미 지구인으로 그 시선을 따라가는 나는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헌혈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헌혈 독려 소설쯤 되시겠다.
미치도록 팔딱팔딱 뛰면서 읽었던 소설이 바로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이다. 읽을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저자도 우리와 같은 경험이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왜 사이버 세계에서 우리는 편해질 수 없는가. 웬만한 사이트 하나 이용하는 정도가 뭐가 어때서 매번 회원가입의 절차를 거쳐야 하느냔 말이다. 주인공은 운영하는 회사에 문제가 생겨 정부 기관의 고지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 확인을 위해서는 기관의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말로만 들으면 간단하겠지만,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등장하는 가입 절차를 당신은 기억할 테지. 서류 한 장 확인하려는데, 이 프로그램을 깔아서 확인하라고 하고 주소를 적으려다가 버벅거리며 첫 화면으로 돌아가고. 보안 프로그램은 왜 또 애를 먹이는가. 120분 안에 마감해야 하는데 속절없이 시간만 허비하게 하는 가입 절차라니.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는 알림 내용 같은 것을 찾아내려 모니터 '뚫어져라' 쳐다보고 헤매던 기억이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이거 뭔가, 정말 간단하고 쉬운 절차로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님?
「판단」이라는 작품은 문장 하나하나가 울분을 토해내게 했다. 너무 흔하게 봤던 직장 상사의 갑질이 아니던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김 대리는 이 과장에게 공격당한다. 인사로 고개만 까딱했다는 게 이렇게 잔소리를 넘어서는 인격 모독을 당할 일인가? 김 대리의 태도를 지적하며 끝이 없는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이 과장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모두의 마음이렷다. 이 공격을 받으면서 우리는 고민한다. 이걸 계속 듣고 있어? 아니면 한방 받아칠까? 길고 긴 이 과장의 진상 발광이 끝날 무렵 김 대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다. 결론은 안타까웠지만, 현실에서의 우리 역시 김 대리와 다른 선택을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다. 직장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그 우위에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남자는 기억에 문제가 있다. 「기억 밖으로 도주하기」는 한 인간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도망치는 남자가 잡힐까 봐 가슴을 졸이면서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를 응원하고 있다. 이유도 모른 채로, 그가 잡히지 않기를. 그러다가 그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오를 무렵, 그가 닿은 어느 집 문을 열고 났을 때는 가슴이 아파져 온다. 그의 사랑, 그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왔을지 듣고 싶어서 말이다. 의외의 반전에 눈물이 핑 돌았던 건, 어쩌면 언젠가 우리가 맞이할 장면일지도 모를 기시감 때문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의 고단함마저 감사하게 여기고 싶은 순간이다.
열 편의 작품 모두 흥미롭고 재밌다. 전설의 괴물을 불러온 「이상한 녹정 이야기」, 시간여행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시간여행문」, 게임 속에 있다는 걸 인지한 게임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등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즐겁지만, 소설 곳곳에 과학 이야기가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즐거움도 볼만하다. 그렇다고 그 과학 지식이 소설의 흐름을 방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짧은 정의를 보태주는 것 같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여행한 기분이 든다. 그 세계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우리 삶을 비춘다. 공동체로 살아가며 베풀어야 할 일들, 우리가 맞이하게 될 인생의 후반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이들의 고단함을 봤다. 저자가 단순하게 흥미로만 적어본 SF소설이 아니라는 말씀.
소설 속에 우리가 겪는 현실이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삶의 고단함도 있겠지만, 저자는 재치와 반전의 판타지를 더하며 인생이 그리 쓰지만은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인간미까지 놓치지 않는 작품들에 감동까지 더해졌으니, 우리 사회를 보는 맛이 절망적이지 않다는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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