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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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일기에 적는 건가 보다. 가장 은밀하고 가장 솔직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거나 할 수 없는 말을 차곡차곡 모아놓을 수 있는 것. 여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상태를 진료하던 의사에게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도 그녀는 회복될 수 없었다. 누구도 진실하게 진료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말할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편 존은 아내의 정신적 질병을 알고 있다. 다른 의사도 그랬지만, 남편 역시 아내에게 내린 처방은 참 단순하고도 무심했다. 절대적으로 휴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내의 신경 쇠약이 쉬어야만 낫는 병이라고 말이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시골 마을 외딴 저택으로 간다. 여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아내의 정신을 환기하겠다고 말이다. 아내를 위해 통풍이 잘되고 채광이 좋은 꼭대기 층 넓은 방을 부부가 사용하기로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결정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토록 세심하게 돌봐 준다며,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시대를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21세기인 지금도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을 호의로 여기며 생색내는 사람이 있기는 할 테지만, 소설로 보는 작가의 경험담이 더 생생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시대를 대신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남편은 자기 역할이라 여기며 아내를 돌보는 방법이 오직 휴식 치료법이라고 여겼기에 그렇게 했을 텐데, 그게 정말 치료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나 보다. 몰랐던 게 아니면, 무시하고 싶었거나.


존은 신중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내가 나서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줘. 하루 종일, 매 시간 내가 할 일을 처방해 주지. 이토록 세심하게 돌봐 주는데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거야. (33페이지)


흔히 휴식 치료법이라고 불리며, 19세기 초 여성에게 히스테릭하고 신경질적인 성향이 내재하여 있다고 믿던 시기. 간혹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휴식 치료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두고 관리하려 드는가. 육체를 옭아매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게 휴식 치료법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주장을 제압하고, 단속하려 들었다. 여성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아내답지 못하고, 엄마답지 못하고, 불평불만이 많고, 바라는 게 많다는 거였고, 그렇게 많은 여성이 휴식 치료법의 대상자가 되어 목소리를 잃었다. 삶을, 인생을, 미래를 잃었다.


남편은 아내의 완벽한 휴식을 위한다며 모든 지적 활동을 금지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생각도 하지 말고 상상도 하지 말고, 뭔가를 적는 일도 하지 말고. 오직 숨만 쉬고 먹고 자는 일만 허락했다. 방 밖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했다. 아내는 꼭대기 층 방에 갇힌 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마음을 말해도 부정당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갇힌 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내의 증상은 깊어졌다. 남편은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며 자기 처방을 믿었다. “내가 의사잖아.” 의사라는 전문가의 말을 믿어야겠지만, 때로는 오진도 있고 잘못된 처방도 있지 않은가.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힌 아내가 매일 보는 것은 누런 벽지다. 노란 것도 아닌 누런 벽지. 누워도 보이고 앉아 있어도 보이는 그 벽지에 점점 시선을 빼앗긴다. 아내의 모든 시간은 이제 한쪽 벽을 뒤덮은 누런 벽지에 잠식당한다.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병은 더 깊어만 간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면, 아내는 정말 아픈 게 아니다. 내 몸의 이상을 나 자신이 느낄 수 있다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지금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녀가 아무도 듣지 않는 자기 말을 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 몰래 글을 쓰는 방법뿐이었다. 누군가 오는 기척이 나면 얼른 숨기고,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자기 생각을 적곤 했다.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치유를 하는가 싶었는데, 그마저도 누런 벽지에 빠져들면서 힘을 잃었다. 혼자 있는 방, 보이는 건 누런 벽지뿐. 아내는 점점 벽지에 빠져들면서 벽지를 보고 읽는다. 벽지의 무늬에서 사람을 보고, 움직임을 느낀다. 심지어 벽지와 대적하는 지경에 이른다. 아내에게 휴식을 주겠다며, 아내의 병을 치료하겠다며 선택한 방법이 옳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드디어 탈출했어, 당신과 제니는 막으려고 했지! 내가 벽지를 거의 다 뜯어냈으니 다시 나를 가둘 수 없을 것이야.” (115페이지)


총 열한 개의 일기가 담겨 있다. 그녀가 머물던 저택의 꼭대기 층 방에서 머문 시간이 고스란히 적혔다. 아무도 듣지 못한, 듣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말을 유일하게 꺼낼 수 있던 방법. 읽을수록 바라게 된다. 그녀가 빨리 그곳을 탈출했기를, 남편이 그녀의 말을 더 새겨듣게 되기를, 갇힌 방에서 있는 게 휴식도 아니고 치료도 아니라는 것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기에 더 와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기 안에 있는 많은 것을 억압당하고 살아야 하는 게 어떤 결말을 만드는지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분출을 막는 강요로 지성이 스러지는 과정을 생경하게 그렸다는 말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원인과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문학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여성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그들이 믿는 치료법이 잘못된 방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작가는, 거대한 벽 하나를 무너트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평등을 위한 외침은 계속된다. 19세기에 이뤄낸 여성 인권 신장을 이 소설로 확인하게 된다. 소설의 결말은 끔찍했지만, 작가는 독자는 물론이고 오늘을 사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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