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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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 거다. 겉으로 보이는 호의나 미소 말고, 상대의 진심을 제대로 알고 마음. 지금 나에게 보이는 저 표정이 진심일 거로 믿었다가 뒤통수 맞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한 가부장제에 내가 스며들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당황. 아니, 그건 배신감이었을 거다. 딸로 여긴다는 시부의 말에, 간질거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게 하던 사랑스러운 말들에 내주었던 마음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진심에 사그라진다. 그 사이에 있는 남편 역시 내 편은 아니고, 여전히 가부장제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여성이란, 아내란, 며느리란 어떤 존재인가.


화자인 는 지금 고요한 일상을 지낸다. 번역 일을 하고, 남편과 사이도 좋다. 남편이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시부는 남편을 정성 들여 키웠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 전부인 시부는 짧은 학력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살았다. 아들을 박사까지 만들어놓고,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시부였다.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이라고 불릴 만큼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프기 전까지 말이다. 시부는 담도암에 걸렸고 병세가 심해지자 섬망 증세까지 보인다. 며느리와 아들이 주야 교대하면서 병간호하지만 한계에 다다랐고, 곧 간병인을 고용한다. 시부는 간병인에게까지 욕을 퍼붓고, 옛날에 몰래 따먹던 자두를 먹고 싶다고 한다. 그러다가 꺼내어진 시부의 진심은 섬망을 겪는 환자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상처였다.


이제야 진심이 나오는 건가 싶게, 시부의 외침은 절망적이었다. 화자에게 화를 내듯 쏟아낸 그 말, 우리 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한 게 뭐냐, 박사랑 결혼하는데 열쇠 세 개를 해왔냐, 애도 안 낳아서 대가 끊겼다는 등, 딸이라고 부르며 다정하고 다정했던 시부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그렇다. 시부의 진심은 내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딸로 여긴다는 게 아니라, 태양 같은 내 아들을 훔친 도둑년이고 대를 이어줄 도구로 여겼다는 거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 화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이 구성하는 공간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시부의 고통스러운 병 앞에서 한없이 미안해지고 죄송스러워지는, 잘못한 것도 없이 언제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있었다는 게 억울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남편은 언제나 눈을 감고 있다. 도대체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자기를 봐주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로 있는 것인가. 외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타인이 불쑥 내비친 날것의 감정을 마주쳤을 때만큼 당혹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만 왜 울었냐고 한 번쯤은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살다 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다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요. 어쩌면 영옥 씨는 그때 뭔가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1페이지)


화자의 외로움에 손을 내민 건 그 누구도 아닌 간병인 황영옥 씨다. 처음 영옥의 등장은 전문가 포스였다. 시부의 침상을 둘러보며 필요한 것을 금방 정리하고, 환자에게 닥치는 거의 모든 문제를 거뜬히 해결한다. 마치 간병인이 아니더라도 꽤 오래 해왔던 일처럼, 영옥이 아니라면 누구도 해결하지 못할 일을 감당했다. 하루에 8만 원이라는 비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옥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을 시간을 가늠하게 한다. 죽어야지 하면서 읊조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를 불러왔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 걱정을 숨겨둔다. 결정적인 순간에 화자를 위로하는 단 한 사람은 영옥이었다.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만이 아는 감정, 민낯을 드러내는 잔인한 사람들 속에서 버텨온 시간이 만든 초연함이었으리라. 사랑도 구원해주지 못한 잔인함에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영옥이 구원해줬다. 한마디 말이 없이도, 담배 연기뿐이었어도.


글쎄,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 화자와 같은 상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겪었고 우리 엄마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면, 나는 더 독해지고 독설을 뿜어냈다. 덕분에 싸가지 없는 년소리도 많이 들었다. 어른도 몰라본다고, 저래서 딸년 낳을 필요 없다는 말까지 들어봤다. 웃긴 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존재들이었다는 거다. 미친년처럼 산발하고 욕을 쏟아냈다. 화가 나는 건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던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화자의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마치 그 순간의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침묵으로 아내의 죄를 묻던 것처럼 말이다. 여성이 가족을 돌보고 환자를 수발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도 폭력이 아닐는지.


결국,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만남은 소설 속 화자와 간병인 영옥 씨의 만남과 닮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싶고, 그 말을 들어주며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줄 사람은 여성뿐이었다. 지금을 사는 여성에게 필요한 건 이 같은 여성 연대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부장제 안에서 고통스러운 그녀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희망을 염원하면서. 상실의 순간을 앞에 두고도 이해를 바라야 하는 감정을 다독여야 한다는 게 힘들지만, 어쩌면 상실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진심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그 진심을 확인하는 계기로 나아가게 될, 가부장제가 극복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맨발에 슬리퍼 상복 차림으로 장례식장을 나와 본관을 서성이며 영옥 씨를 찾던 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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